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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더 퍼지 The Purge> James De Monaco (2013)




<The purge>


영화를 볼때 잔뜩 기대를 하고 보는 몇가지 경우.

예를 들어서 마이클 만이나 코엔 형제같은 감독들이 내놓는 신작들을 기계적으로 보는것 자체가 기대로 충만하다는것이고

곱게 나이들어가는 다이앤레인이나 장만옥의 얼굴을 훔쳐봐야겠다는,

거만한 눈초리의 잭블랙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기대로 골라보는 영화들은

마치 새로운 맛의 과일 맥주나 처음 먹어보는 빵을 집을때의 설레임처럼 멋진 배우들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The Purge>처럼 광고를 엄청 할법한 헐리우드 신작들은 왠만큼 강렬한 시나리오가 아니면 시선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가 허용되는 12시간'이라는 한 줄의 문구에 완전 꽂혀버렸다.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칠판 한 가득 롹의 계보를 적어놓고 열변을 토했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처럼 

대략 백여편의 영화로 이루어진 범죄영화의 계보같은것을 그려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도표속에서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 어떤 위치 정도를 차지하게 될까. 

아마도 칠판 맨 가장자리에서 제목옆에 ? 를 달고 있지는 않을까? 

총격질에 긴장감 만땅이지만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범죄 스릴러가 될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 

누군가는 희생되지만 범죄영화속의 쫓고 쫓기는 땀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나는 아무 죄책감없이 내 이웃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있지만 나를 심판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희생자들을 향한 동정과 상실감은 또 다른 이들을 향한 분노와 함께 남은 8748시간동안 독버섯처럼 피어오른다.



 신도들을 성폭행하고 포르노를 찍게했던 덕망높은 신부를 살해했지만 

모든이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철저히 희생자로 남았던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이 떠오른다.

선량한 일급살인범을 무죄로 석방시킨 희열로 가득했던 리차드 기어의 삼촌미소는 또 어떤가.

아직까지 <프라이멀 피어>라는 명작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식스센스>를 보고나온 관객이 표를 사려고 줄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이다'라고 

말한것 못지 않은 스포일러일지 모르지만. 앗! 어쩌다보니 <식스센스>의 스포일러까지 남겨버렸다.

칼만안들고 피만 안묻혔지 때로는 법위의 법으로 군림하는 종교인들과 

입법절차를 거쳐 성문화된 법을 통한 정의구현이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으로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도 모를 정의찾기에 혈안이 되있는 변호사들. 

그리고 분노라는 이름의 법으로 그 모두를 단번에 심판해버리던 에드워드 노튼.

하지만 퍼지의 12시간속에서는 에드워드 노튼도 누구도 살아서 돌아가기는 힘들것같다.



 1%의 실업률. 줄어드는 범죄율. 

감시카메라 앞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폭력과 살인.

카메라 아래로 나열되는 도시들은 캘리포니아주나 샌프란시스코같은 번화된 도시라기 보다는 

다코다,인디애나,알라바마,사우스다코타,오레곤 등등 뭔가 미국이라는 문명의 사각지대에 놓인듯한,  

미성년자들의 실종을 다룬 많은 영화들에서 눈이 가려진채 트렁크에 갇힌 미소녀들이 버려지던 그런 황량한 지역들이다.

사회 기득권층에 의해 사회악으로 분류되어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는 죽어 없어져도 아깝지 않은 존재들.

저런 인간 살아서 뭐해 혹은'개나 소보다 못한 놈'같은 사람들을 죄의식없이 없애버릴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는 세상.

하지만 중요한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단순한 감정들이,

더 잘사는 이웃에 관한 질투나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 여자친구 부모에 관한 소년의 미움같은 

말초적이고 순수할법한 감정들도 12시간의 축제를 기다리는 동안 탐욕과 분노로 견고하게 변해간다는데에 있다. 



최첨단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주택들. 

철벽의 경비 시스템 밖에서 배회하는 거리의 부랑자들이 숨을 곳이라고는 아무곳도 없다.

하지만 세상이 무법천지로 탈바꿈하고 모든 의료서비스가 중단된 상태에서 구원의 희망조차도 완전히 봉쇄된

12시간이라는 정의의 밤속에서 진정 안전한 장소가 존재할런지 의문이다.

저 예절바른 침입자가 신이 되버린 바깥 세계와 평화롭기 그지 없어야 할 내부를 가르고 있는 철문은

너무나 어이없게 순식간에 무너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삐까뻔쩍한 기술적인 반전을 기대했는데 예를 들자면

보안장비 일등 판매자인 에단호크의 집만큼은 영화 <패닉룸>에서처럼 집 내부에 또 다른 벙커가 설치되어 있다던가 

 아들이 집으로 들여보낸 흑인은 애초부터 에단호크에 앙심을 품고 굴러들어온 주도면밀한 살인자라던가

가면을 쓰고 몰려드는 심판자들은 철문과 한몸이될 수 있는 터미네이터의 T-1000 같은 로봇이라던가 

딸의 죽은 남자친구가 갑자기 좀비로 변한다던가 사실 세상엔 그런 황당한 영화들이 많으니깐.

이 영화의 반전이라면 절대 열리지 않을것같은 육중한 셔터가 차로 끌어당기니 어이없이 열린다는것.

모르긴해도 그 날 이후에 에단호크의 회사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을거다.

언제 어떻게 살해될지 모른다는 강박을 안고 사는 시대에 집에서라도 최소한 방탄 잠옷같은것은 입고 있어야 되는거 아닌가.

한마디로 시스템의 노예가 된 인간들이 얼마나 바보천치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내가 저지른 폭력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해자로 남는것은 바보라고 역설하는 사회.

법 없이도 살 사람, 세상에 적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의 씨를 말리는 사회. 

그런 사람들은 그렇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표적이 될지 모르니깐. 

어쩌면 우리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는것 그 자체, 태어난것 그 자체로 범죄자이고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12시간이 지배하는 황폐한 지옥의 유일한 해결책은 

에단호크의 또 다른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태어날때부터 분노의 유전자를 삭제해버리는것일듯.

그리고 그 세상은 달디단 감정만 지닌 감정의 좀비같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또 다른 지옥이 되버릴 가능성이 있다.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축제. 그리고 명절대목.

열두시간만 잘 버티고 나면 남은 일년은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치 풍년을 기원하며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굿을 하듯.  

복도에서 하얀 소복을 입고 양 팔에 큰 칼을 들고 달려오는 저 여자는 정말 동네에서 신내림 받는 여자같았다.



사실 영화가 꼬이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는것은 에단호크의 두 아이들이다.

보안 시스템 따위는 알고보니 밑빠진 독이었던 셈이니깐.

수첩에 심장박동수를 체크하는 이 아이는 무슨 지병이 있나보다. 

<패닉룸>에서도 그랬지만 이런 아이들은 항상 천식이 있거나 어디 아프거나 자기세계가 있는 아이들.

문제는 위급상황이 생겨도 일일구를 부를 수 없는 시간이 정해진 비극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는것.

<퍼니게임>의 살인자 커플에서 우리가 공포를 느꼈던 이유는

그들이 증오나 미움 ,동기가 배제된(혹은 일부러 언급되지 않은) 무조건적인 살인을 저질렀다는데 있다. 

이 반바지 커플은 빌린 계란으로 최후의 만찬을 지어먹으려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두려움도 죄의식도 없이

 처벌의 강박에서 완전히 해방된듯한 순진무구한 얼굴로 계란을 빌리러 다닌다. 

이들은 이미 진작에 이 기형적인 12시간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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