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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 Lynne Ramsay 2011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처럼 지극히 상대적임에도 그만큼 엄격한 잣대를 가진 가치도 드물다.

틸다 스윈튼은 여배우는 물론 남자 배우를 통틀어서도 비교 불가능한 독특한 아우라를 지녔고 

여배우의 아름다운 얼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항상 상대적인 미를 거론해야 하는 단순치 않은 얼굴을 가졌다.

너무 다르기때문에 비교의 대상을 찾는것 자체가 어려운것이 그녀의 강점이지만 약점인것.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화장기 없는 얼굴과 설탕 같은 따스한 감정은 쏙 빠진 듯 삐죽하게 솟은 큰 키. 

언젠가는 합리적이었고 이성적이었던 한 인간이 마치 그동안 추구해 왔던 모든 의미를 잃고 난 뒤 갈팡질팡 하는 듯한 표정.  

천국을 꿈꾸며 어딘가로부터 탈출했지만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갇히고 마는 인간들 속에서 

천국이라는 이상을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천국의 이데올로기 위에 누구보다 냉정하게 군림했던 <비치>속의 그녀.  

여배우로써의 그녀의 여성성에 굳이 만족감을 느껴야한다면 몇몇 영화에서 그녀는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으니 찾아보자.

동화 속 공주에 목말라 하는 우리는 성별을 막론하고 모두가 기형적인 마초 근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외모에 대한 토론 자체가 그녀에게 퍽이나 고리타분한 테마 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미안. 틸다. 마틸다.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생김새가 만들어낸 편견을 무너뜨리고 관중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성장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영국인 유부녀를 연기했던 틸다 스윈튼.

젊어서는 영국 해협을 헤엄쳐 횡단하는 꿈을 가졌던 모험심 있고 자립적인 여자였지만 

현재는 부유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과 타협한 채 살아가는 유부녀를 연기했다는것은

그나마 내가 이 배우에게 가져왔던 선입견에 나름 힘을 실어주는 설득력 있는 설정이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아 틸다 스윈튼도 누군가의 아내가 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놀란것은

그녀가 그런 역을 맡아서가 아니라 내가 이 배우에게 그런 편견을 가졌다는게 너무 어처구니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쌍둥이 엄마라는 틸다 스윈튼이 누군가의 엄마를 연기하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결코 전형적이지 않은 누군가의 엄마를 연기하는 동시에 엄마 이전의 여자, 여자 이전의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면서

관객이 그녀에게 부여한 역할 기대 따위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연속적으로 본 <케빈에 대하여>와 <아이 엠 러브>에서의 그녀 말이다.

 


틸다 스윈튼이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시고니 위버 대신 <에일리언>의 리플리 역도 어울렸을거다.

그녀가 리플리를 연기했더라면 <케빈에 대하여>를 보면서 더 깊은 감정 이입이 가능했을지도.

하얀 유리관 속에 꽁꽁 언 듯 웅크리고 누워있는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오랜만에 시고니 위버 얼굴을 떠올리고 나니 덩달아 수잔 서랜든이 떠오르고 

비슷한 세대의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연기한 엄마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들 아름다운 금발 미녀는 아니지만 몇몇 배역을 거쳐서 결국은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던.

 예쁜 딸과 합세해서 돈 많은 남자를 등쳐먹는 엄마 (하트 브레이커스) 

어려서 잃어버린 딸 때문에 평생을 트라우마속에 살아가는 엄마 (The girl in the park)

남성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여성 (델마와 루이스) 수잔 서랜든은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위해 기적의 약을 찾는 엄마 (로렌조 오일) 이자

전 남편의 여자 친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병들어 가는 엄마 (스텝맘) 였으며

오랜 세월동안 신분을 감추고 살다가 자수하는 급진적인 반체제 인사 (The company you keep) 였지만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른 후 자수 할 생각을 하셨나요' 라고 기자가 묻자

평화로운 엄마의 얼굴로 '자식이 생기면 그들이 모든것을 변화 시키지'라고 말한다.

엄마이지만 이들이 연기하는 엄마들은 우연히도 조금은 다른 엄마들이었던것 같다.

근데 우리는 엄마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것은 아닐까. 

우리가 먼 훗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고 우리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엄마라는 역할은 어떤 개인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 아닌 인류의 산파 같은 공통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까.



자신이 언젠가 사랑했고 열정을 쏟았던 것들을 상자안에 닫아두고 현실과 타협하며 행복해지기란 힘들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와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의 엘리자베스는 그런 의미에서 흡사하다.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변과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주고 받은 상처로 단련되며 성장하는것이 

모든 인간이 지닌 공격 본능이라면 

현실에 순응하고 충돌을 회피하며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것은 인간의 방어 본능에서 기인하는지도.

나는 정직하게 내 행복을 위해 진정 투쟁하며 살고 있는것일까?

불행을 밥 먹듯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정직한것이 아닐까. 

잃는것이 있으면 얻는것이 있는데 그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고 한 쪽 저울에만 시선이 간다면 물론 삶의 균형은 깨져 버린다. 

하지만 그 균형이 깨질까 두려워 기울어진 저울을 들어 올리는것은 한편으로는 자기기만이 아닐까.



여행을 업으로 삼고 지도 안에서 자유로웠던 에바가 결혼과 출산의 댓가로 콘크리트 바닥위에 정착해야 했을때.

그나마 뉴욕이라는 도시의 자유분방함에 대리만족을 느끼던 그녀에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교외로 이사가야 한다고 남편이 제안해왔을때.

상자속에 가둬놓은 이상과 현실의 갭이 실제적으로 다가왔을때 그녀가 느꼈을 당혹감이 이해가 간다.



유아시절 엄마와의 교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케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애를 먹고 엄마의 관심에 집착한다.

에바와 케빈은 모자관계라기 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개인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만큼 서먹하고 불편하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도 궁금해서라도 혹은 마음에 들면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지는게 사람 마음이지만

넓고 텅빈 공간에 남겨진 엄마와 아들은 마치 아주 협소한 공간에서 

처음 본 사람의 꼬르륵 소리를 들을때만큼 난처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에바는 케빈에게 다가가서 '새로운 집에 이사 온 기분이 어때'라고 살갑게 껴안고 말을 걸어야 했을까?

모성애라던가 보호본능 같은것이 과연 아이를 가지는 순간부터 모든 여성들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기질인걸까?

그것은 여성에게 지닌 선천성이 아닌 후천적으로 학습되어지는 역할 같은게 아닐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에바는 엄마 없이 자란 여성인가? 엄마 없이 자란 여성이 모두 에바와 같은 여성이 되지 않는다면 

에바와 같은 엄마를 가진 아이가 모두 케빈과 같이 된다는것도 아주 희박한 경우가 아닌가.

에바를 탓하는것은 에바에게 인간 이전에 엄마라는 덫을 씌우는 오류가 아닐까.

 아니면 미국에서 벌어지는 학교 내 총기 사건 같은것을 사회적 책임이 아닌 

가정 내부의 문제로 교묘하게 책임을 전가 시키려는게 아닐까.



옛 지도들로 정성스럽게 방을 도배하면서 에바는 방을 꾸미는것이 개인의 특성을 나타내어 줄 수 있다고 케빈에게 말하고

에바가 공들여 표현한 그녀의 아이덴티티에 흡사 잭슨 플록처럼 물감을 발사하는 케빈은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케빈은 에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엄마로써의 정체성을 요구하며 도발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른다.

에바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서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것일지도.

하지만 이 영화는 진정 에바가 과도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욕망했기 때문에 

케빈이 케빈과 같은 아이로 자라날 수 밖에 없었다고 얘기하고 싶을걸까? 

과연 이 영화에서 케빈과 에바의 정체성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는것이 가능한 것일까?


 


서점 앞 자신의 책 광고앞에 서있는 아들을 보고 에바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에바가 모든것을 잃은 후 여행사 면접에 갔을때 그녀의 이력서를 본 보스는 

네가 이전에 무슨 일을 했건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복사하고 돈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에바는 순응한다.

에바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상처를 되새기는 흔적들을 매일 마주하면서도 살던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이상 잃을 수 있는것은 아들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낀 에바는 케빈의 남은 인생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엄마로서의 남은 책임을 다하려는 것일까.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강렬한 이 장면. 

남편과의 만남. 원치 않았던 아이의 탄생. 그로 인해 뺏겨버렸다고 믿는 그녀의 인생. 

집에 칠해진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는 장면도 그렇고 자식의 손에서 묻어난 핏물을 평생 닦으며 

자식의 죄를 십자가 처럼 짊어 지고 가야하는 자식 잘못 기른 부모로써의 원죄 같은것을 보여주려 하는것일지도.

아니 어쩌면 결정적인 원인은 에바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은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먹는 토마토 가지고 장난 치는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의 행태도 정말 처단받아야 마땅하다..)



(이 장면에선 정말 <Bothersome man> 에 나온 스칸디나비아 남자를 너무나 닮아서 놀랐다. 미안. 틸다)

케빈이 동생의 눈을 찌르고 열대 과일 리치를 먹는 장면도 그렇고

토마토 캔 가득한 선반이라니. 정말 한없이 무겁고 힘든 영화가 될 수 있었지만 곳곳의 감독의 재치가 돋보인다.

이 선반의 토마토를 모두 쏟아 붓는다고 해도 저 토마토 축제 속 토마토 만큼은 안될거다.

모든 불행의 시작. 에바에게 지워진 짊. 평생 먹어도 다 못먹을 토마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인지도 모른다.



가장 궁금한것은 케빈이 정상 생활로 돌아왔을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케빈과 에바를 받아 들여줄까이다.

그들은 살던곳을 떠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전과는 달리 서로를 의지하며 평범한 모자관계를 성립하게 될까.

언젠가 돌아 올 그의 방을 정리하고 그의 옷을 다림질하는 에바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하는 엄마의 모습에 가깝지만 에바 자신은 자신이 기대하는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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