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lm

<호노카아 보이> 사나다 아츠시 (2009)

 

 

<호노카아 보이>속의 정지된 마을

 

리투아니아에 살면서 눈에 무뎌진지 오래이지만 그래도 첫눈은 항상 누구에게나 상징적인가보다.

'오늘 첫눈이 내렸다'라는 평서문을 머릿속에 담고 시작하는 하루.

반쪽짜리 식빵 네 조각을 펴놓고 땅콩잼 한층 딸기잼 한층 땅콩잼 한층을 발라 우유와 먹었다.

여기엔 내가 좋아하는 땅콩잼과 포도잼이 세로로 길게 섞인 그 스트라이프 잼이 없다.

사실 작년에 한국에 갔을때 그 잼을 사오려했지만 막상 서울에서 한번 먹고나니 너무 시시해보였다.

내가 그 잼을 리투아니아까지 배달해 왔을때 느낄 만족감이 그리 가치있어 보이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그 별것아닌 만족감을 충족시키는것은 어떻게 보면 그 물건을 과대평가하는것은 아닐까.

태어난곳에서 떠나와 다른 세상에 정착해서 살아간다는것.

철저한 계획에 의한 이민으로 해외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이고.

우연처럼 흘러들어왔다가 돌아갈 기회를 놓친사람들이 있을것이고. 

중요한것은 인생이란것이 칼로 탁하고 토막을내서 1막2막으로 정리할 수 있는 물건은 결코 아니라는것.

어떤 동기들에 일정량의 우연과 필연이 결합되어 인생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런 인생과 그 속의 일상들을 미니멀하게 최소한의 시나리오로 조용하게 풀어가는 영화들이 좋다.

우스운 습관들을 장난꾸러기처럼 의미없이 나열하고 애정을 가지고 사용하는 자기만의 단어가 있는 주인공들.

혼자있는것에 익숙하고  친구가 필요한것같지 않아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

음악으로 치면 yo la tengo나 slowdive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들.

<천국보다 낯선>의 에바나 <반칙왕>의 임대호같은 친구들.

나에게 있어 영화를 보는 행위는 그런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내어서 더 많은 인생의 동기동창을 만들기위함이다.

 

내년이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5년째로 접어든다.

그래서 유독 외국에서의 생활을 그린 영화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우리나라 영화속에서 그려지는 해외생활이란 아직까지 그저 너무 로맨틱하고 화려하기만하다.

본질을 보여주는데 서툴다고 해야할까.

(지난번에 홍상수의 밤과낮을 끝까지 보지 않은것은 그래서 너무 후회된다. 그의 눈에 비춰진 파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행을 다니거나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으례 여유로운 사람일거라는 편견이나 일종의 피해의식같은게 있는걸까.

영화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을 접하기란 쉽지않다.

해외생활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그 생활에 대한 암묵적인 로망으로 가득차있다고 할까? 

몇몇 일본영화들에서 아주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그들의 경제수준은 둘째치고라도

카피와 응용, 자기화와 토착화에 능한 일본 사람들이니 뭐 당연한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감성이 우리의 그것보다 세련된것은 아닐까.

 

 

<카모메 식당>의 헬싱키나 <냉정과 열정사이>의 이탈리아.

북유럽스타일과 '로맨스인 유럽'을 기본 골격으로 했다고는 해도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장면와 내러티브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마치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처럼.

그게 혹시 해외에서 오래 살아 본 감독이 찍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감독이 찍은 영화의 차이라면 더이상 할말은 없다.

어쩌면 감독의 로망을 내 로망인척 감정이입하며 봐야하는 영화가 불편하고 싫은건지도.

 

운좋게 보게된 영화 <호노카아 보이>

한국어로는 <하와이언 레시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하와이에 머물며 소일하는 일본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민하고 불평불만많은 여자친구역으로 짤막하게 아오이유우가 출연한다.

극중 등장인물들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등장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별이 반짝이고 달무지개가 뜨는 보석같은 해변으로 장시간을 날아 하와이까지 여행을 오지만

얼굴이 예쁘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녀의 마음과 표정은 정말 화산처럼 말라 비틀어진 상태이다.

여행객의 대부분은 지겹도록 똑같은 모토로 여행을 떠난다.

화산같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를 토대로 떠나오지만 결국은 화산만보고 돌아온다.

그 내면의 일상성을 버리지 못하고 저 아오이 유우처럼 불편함과 단조로움만 불평하다 여행을 망치는것.

산이 큰것도 죄고 길이 하나뿐인데 왜 이렇게 길을 헤매냐고 몰아붙이는것도 바로 여행자의 역설이다.

여행후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레오는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동네영화관 영사실 보조로 살아간다.

 

 

빌니우스에 살다보면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는 이곳에서 느끼는 이 정적이 과연 정당한것일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게된다.

조금 작은 도시로 가면 빌니우스는 상대적으로 대도시같다.

주말을 여름농장에서 보내고 그 조그만 도시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급 피로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에게는 시골같은 그 도시가 아주머니에게는 문명으로의 귀환같은것인거다.

고요함이란 그렇게도 상대적인것이다.

그 지독한 정적을 레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허심탄회하게 서술해 나간다.

 

 

심지어는 어딜가도 누구에게도 나란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절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낯설은 상황들에 자연스럽게 대처해나가는 레오의 담담한 나레이션은

뭐랄까 비이 할머니가 양배추롤에 끼얹던 말갛고 담백한 스톡같이 들렸다고나 할까?

영화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정지된 컷들.

사용되지 않은채 그저 싸여있는것만 같은 일련의 물건들.

파도치는 바다.

사람들이 염원하는 달무지개.

많은것이 필요한 삶을 사는것은 피곤한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그냥 물건일뿐 그리고 자연일뿐.

 

 

하지만 그러한 정적속에서도 누군가의 일상은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더이상 팝콘 기계 옆에 앉아서 낮잠을 잘 수 없게된 할아버지와

안마기를 차고 손님을 기다릴 수 없게 된 매표원의 일상이란것이 존재하고 있더라.

 

 

우연히 밀가루 배달을 왔다가 비이 할머니에게서 점심을 대접받는 레오.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는다는 레오의 말에 적적하게 사는 할머니는 매일 점심을 먹으러 오라는 호의를 배푼다.

매일매일 정성스레 차려진 할머니의 점심을 먹고  사진 한장씩을 남기는 레오.

그래도 인스턴트 라면으로 가득한 소포를 받는 기쁨은 그것과는 또 다른 가치이다.

이 폴라로이드 사진들은 너무 슬프게 보인다.

폴라로이드와 비디오카메라는 왠지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일을 굳이 잡아두려는 미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 보여서 싫더라.

 

 

 유일하게 요리과정을 발랄하게 보여주는 이 양배추롤은 리투아니아식 양배추 롤과도 기본적인 레시피는 똑같은것 같다.

어떤 양배추 잎사귀는 마치 배추잎처럼 보이더라.

양배추가 무척 얖고 크고 초록빛이 나는게 훨씬 더 싶게 롤을 만들 수 있게 보인다는것.

근데 마요네즈에 크림까지 끼얹는것은 좀 많이 느끼할것 같고

리투아니아에서는 마요네즈대신 케찹을 넣어서 빨간 국물로 만들어 내는 때도 있다.

사실 일본의 여러음식들이 그렇지만 특히 카레나 돈카츠, 고로케 같은 요리들은 전부 기존의 외국요리를 응용해서 만든것인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일종의 카레 컴플렉스 같은게 있는것같다.

영화 <텐텐>에서도 그렇지만 항상 카레에 망고잼이나 망고 처트니 같은것을 첨가해야한다는것을 강조한단 말이지.

잼이나 처트니 같은것은 또 얼마나 아시아적이지 않은것인데 말이다.

 

 

하와이에 정착한 일본 이민자들의 고요하지만 외롭고 적적하나 달달한 삶을 보여주는 영화.

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한번 볼까말까한 달무지개를 보겠다고 태평양을 건너 오는 사람들.

페넬로페 크루즈에 안달하고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관대한 어느 할아버지의

병상에 누운 부인을 바라보고 앉은 뒷모습에서도

댓가없이 매일매일 진수성찬을 차리지만 질투에 불타 땅콩을 다지는 할머니에게서도

얻어지는 결론은 사람은 결국 다 똑같다는것.

단지 우리가 개개인에게 그들이 그들답기를 항상 강요하는것일뿐.

하지만 그들다워야 한다는것의 정의와 그 강요의 기준과 이유는 타당하지 않을때가 많다.

게다가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라는것은 때로는 본질과 너무 동떨어져있지 않은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