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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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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코트 주말에 날씨가 쌀쌀해 보여 이때다 싶어 봄 코트를 입고 나갔다. 속에 이것저것 껴입으면 겨울의 끝머리에도 얼추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 겨울의 끝머리라고 하면 4월이 훌쩍 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정오가 넘어가자 날씨가 화창해졌지만 큰 무리 없다. 이곳에서 여름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스펙트럼은 약간 2호선 지하철 같은 느낌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녹색 밧줄 위에서 왕십리와 낙성대가 지닌 이질감 같은 것.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친구는 우산까지 들고 있다. 우리는 비가 올법한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옷을 걸어놓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니 코트가 떨어져 있다. 7월의 코트가. 마치 지난겨울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기억 지분 밀키 우롱을 가끔 마시는데 시치미떼는 듯한 비릿함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고 거름망에서 점차 온전한 낙엽처럼 되어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그런데 이제 밀키 우롱이 켐핀스키의 기억 지분을 가지게 되어서 그런지 이분이 좀 나에게 으스대는 느낌이 든다. 더불어 마지막 캬랴멜은 느닷없는 흑백변환으로 봉인되었음.
이브닝 티 세트. 회상이라 하면 뭔가가 좀 오래 지나서 어렴풋한 가운데에 즐겁고도 가슴 뛰었던 일들에 관한 지극히 선택적이고 편파적이며 멜랑콜리한 골몰이라고 생각하는데 신기하게도 가장 가까운 아침에 벌어진 일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진 일들이 아주 오랜 기억 저편으로 서서히 스러져 그것을 회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곤 했다. 누군가의 여행이 나의 여행처럼 느껴졌으니 그것이 마치 소설 속 화자가 자신의 여행 중에 읽고 있는 여행 에세이의 유쾌한 농담의 한 귀퉁이를 몰래 읽어주는 느낌이랄까. 그리하여 나는 지금까지의 들뜬 기분을 최대한 금이 안 나게 꼬깃꼬깃 접어서 이제는 좀 지상으로 내려와야겠다. 바르샤바에 내렸다가 가까스로 빌니우스에 당도한 새콤달콤과 카라멜 그리고 작설차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의 책 작년에 리투아니아어로 번역되어 나온 타르코프스키의 책을 찔끔찔끔 읽고 있다. 이런 책은 사실 진도가 잘 안 나가지만 그나마 처음부터 순서대로 쭉 읽어야 하는 부담감이 없어서 단어 사냥한다 생각하고 하루에 한 페이지씩이라도 읽는데서 보람을 느끼려고 한다. 특히나 이 책은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처음에 얼핏 본 표지가 너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인데 이 영화 자체는 나의 베스트라고 할 수 없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눈으로 한컷 필터링된 이탈리아를 감상하는 매력이 있다. 많은 감독들을 좋아하지만 그 작품들은 보통은 그들의 연출작이라고 일컫게 되는데 유독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은 그의 유산이라는 개념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각각의 작품들이 서로 겹치거나 반복되는 인상이 없이 구성도 느낌도 다..
무심코 담아놓고 쳐다보게 되는 것들. 가끔 사 먹는 크림치즈가 들어간 미니 파프리카. 마트엔 이런 동그란 파프리카 말고 뭉툭하지만 길쭉한 모양의 미니 파프리카만 있어서 몇 번 크림치즈를 넣어서 구워봤는데 옆으로 잘 삐져나오고 아무튼 이렇게 예쁘게는 안 만들어진다. 이것은 의외로 달고 육각의 예쁜 유리병에 담겨있다.
세탁기 사용 설명서를 읽으며. 주말에 옷장 정리를 하다가 5년 전에 산 세탁기 사용 설명서를 발견해서 읽어보았다. 주기적으로 해줘야 할 필터 청소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좀 찔끔했다. 설명서에 다양한 외국어들이 들어가 있어서 분량이 꽤 두꺼운데 이 세탁기 책은 특히 정말 너무 책처럼 생겨서 그리고 워싱 머신이란 단어에 대한 개인적 집착으로 남겨 놨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닉 유스의 워싱 머신 앨범과 그 앨범 커버를 좋아하는 건데 사실 이 앨범 커버가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순간이라면 예전에 피씨통신의 브릿 동의 시샵이 푸른색의 워싱 머신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음감회에 나왔을 때였다. 중키의 마른 남자들이 한국에서 잘 구하기 힘든 외국 밴드 티셔츠 같은 것을 입었을 때의 특유의 핏과 소울 같은 게 있는데 또 이런 분들은 영..
옛날 달력 한 장. 헌책을 읽는 경우 이전 책 주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특정 부분에 줄이 그어져 있거나. 메모가 되어있거나. 날짜와 함께 건넨 이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하고 직접 산 책에 대한 기대 같은 것도 간혹 적혀 있다. 책을 팔았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책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겠지만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않는 책이란 사실 없다. 나도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많진 않지만 가지고 있던 책을 대부분 팔고 왔지만 어떤 책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거리 도서관에서 가져오는 책들도 자신들의 사정이 있다. 며칠 전 카페 가는 길에 발견해서 카페로 데려간 톨스토이의 부활은 리가에서의 추억이 담긴 책인가 보다. 반갑게도 그 속엔 뜯어서 간직한 달력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비 오는 날에 길거리에서 열어 봤으면 아마 나풀나풀 떨어..
비 내린 다음. 윗줄은. 카푸치노와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의 도나스. 아랫줄 왼쪽으로부터는. 카페에서 읽으려고 가져 간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인상기. 카페 가는 길목에 있는 거리 도서관에 있길래 습관적으로 집어 온 톨스토이의 부활. 카페에 비치되어있던 빌니우스 관련 계간지 순이다. 이들이 모두 우연인데 어떤 면에서는 비교할 구석을 주었다. 따끈따끈한 계간지는 늘 그렇듯이 빌니우스가 발굴해서 기억하고 지켜나가야할 가치가 있어보이는 과거의 것들에 대한 감상적인 시선이 담겨있다. 부활은 보통 카츄사와 네흘류도프가 법정에서 조우하는 순간까지는 나름 생명력있는 서사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읽지만 그 이후부터는 뭔가 새로움을 주입하며 혼자 앞으로 막 내달리는듯한 느낌에 오히려 마음속은 정체된듯 오글거린다. 겨울에 쓴 유럽의 여름 인상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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