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12.12.16 06:29

 

 

<줄리 앤 줄리아>

 

영화를 볼때 내가 줄거리와 관계없이 가장 집중해서 보는것은

주인공이 먹는 음식이나 마시는 음료나 주인공이 머무는 부엌의 모습 등등.

하물며 이렇게 음식에 죽고 못사는 사람들의 치열한 이야기는 하루하루 무엇을 먹을지를 고민하고

무거운 식재료와 함께 힘들게 귀가해서 맛있게 먹어 줄 사람의 행복한 표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묵묵히 저녁을 준비하고

눈 깜짝 할 사이에 싱크대로 직행하는 빈 접시와 마주할 때 까지의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원초적 행위는 아니지 않겠느냐는데에 위안을 준다.

 

 

나름 전용 루프탑 레스토랑도 지닌 좋은 건물이지만 브룩클린이라는 지역은 아무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구역인가보다.

이삿짐을 바리바리 채워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오는 줄리 부부. 줄리는 그저 이 새로운 집이 못마땅하다.

직장에서도 시달리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아내를 인내심과 확신을 가지고 토닥이는 남편.

줄리 남편과 줄리아 남편으로 조금만 시점을 바꿔서도 영화 한편은 만들 수 있겠다.

상대적인 결핍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좋다.

그런 사람들만이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수 있고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것 같다.

 

 

메릴 스트립은 마가릿 대처와 보그 편집장도 그렇고 실존인물을 연기하는데 재미를 붙였나보다.

 실존 인물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영향력있는 인물이라고해도 그 사람을 똑같이 연기해 내는데에서는 별 매력을 못느끼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실제 줄리아 차일드라는 여자가 저랬나보다 하고 애써 집중을 하려고는 했지만

약간 불편하게 느껴진것도 사실이고.

개인적으로 메릴 스트립 최고의 영화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리버 와일드>가 아닌가 싶다.

다시 보고 싶다 리버와일드. 섹시한 케빈베이컨과 젊고 강했던 메릴 스트립.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데 있어서 부족하고 힘들었던 시간들 모두 가치있다.

젊다면 더욱 그렇고 함께 이겨낼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더더욱이다.

좁아도 저렇게 둘이 나란히 철퍼덕하고 앉을 수 있는 둘만의 부엌이 있고

다 만들지도 않은 음식들을 매번 감탄하며 먹으려드는 동반자가 있고

우리들은 생각보다 많은것을 가졌지만 가지지 못한것에 집착하게끔 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나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을 하려면 정말 재료를 아끼지 말아야하고 특히 기름 버터 이런거 아끼면 안되는것 같다.

도대체 이렇게 기름진 브루스케타를 만들려면 기름을 얼마나 부어야 하는거지? 레시피의 문제인가?

일년 365일동안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등장하는 레시피를 전부 시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블로그를 시작하는 줄리.

 시기적으로 아직 블로그가 많이 활성화되기 이전이라는 이점도 있었겟지만

이런 아이디어와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는것에 박수를 보낸다.

왜 영화 <카모메 식당>이 매니아층을 만들고 갑자기 실제로 여기저기 비슷한 식당들이 생기는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모든 가능성과 희망들로 포화상태인것만 같은 이 세상에서 색다른 안목과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루종일 직장에서 상사에게 치이고 고객에게 치이고 온 세상에 치이는듯한 줄리.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그저 불확실하기 만한 하루하루. 

'너 내가 왜 요리를 좋아하는지 알아?

달걀 노른자와 초콜릿 설탕과 우유를 넣으면 그게 걸쭉 해진다는걸 알고 있다는게 좋아'

어쩌면 그것이 신께서 음식에 부여한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하루 두세번 죽을때까지 꼬박꼬박 먹어야 하는 음식인데 매일매일 감자와 양파를 자르고 볶고 지지면서 마치 시험을 보듯

입에 담지도 못할 맛없는 음식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어야한다고 생각해봐라.

인간이라면 최소한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을때만큼은 아무 조건없이 행복 할 권리가 있다는것이다.

 

 

요리를 하고 블로그를 작성하면서 시행착오를 겪는 줄리.

어떤면에서 줄리는 줄리아보다 훨씬 똑똑하고 목표지향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줄리아의 욕망은 줄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맹목적이었고 순수했었던것 같다.

어쩌면 줄리가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시대는 뭔가를 순수하게 지향하는 삶은 살기 어려운 시대 일지도 모르겠다.

 

 

구운 생선은 나도 정말 좋아하는데 냉동 생선을 해동 시켜놨으니 레시피는 모르지만 비슷한 생김새로라도 구워봐야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나온 음식중에 가장 맛있어 보였다.

어쩌면 그들이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맛본 이 생선 한마리가 줄리아의 요리 본능을 자극했었는지도.

 

 

실제 줄리아 차일드가 쓴 이 책을 지난번에 서점에서 봤는데 두권으로 나뉘어져있는데 다른 한권은 연초록색 커버였던것 같다.

요리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블로그나 요리책도 별로지만

이렇게 너무 시시콜콜하게 기술적으로 많이 써있는 요리책도 별로더라.

 

 

이 책은 내가 그 날 서점갔을때 산 요리책. Phaidon 이란 출판사 책인데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내가 뭐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마트의 갖가지 채소들을 어떤식으로 요리해 먹을지를 몰라서 장만했다.

한국이 아니니깐 달래 냉이 씀바귀 이런 채소들을 먹을 일이 없으니 여기서 파는 채소들을 먹어야 하는데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양배추를 절이거나 오이나 토마토를 샐러드로 먹는게 아니면 채소를 잘 먹지 않는것 같다.

마트에는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잘 안먹는 채소들이 넘쳐나고 게다가 이탈리안 레시피니 더더욱 땡긴다.

눈감고 딱 펴지는 페이지를 하나씩 섭렵해 가고 있는데 괜찮은 시금치 요리들을 알게되서 우선 책을 산 보람이 있다.

예를 들면

 

 

각종 치즈와 섞는 이런 시금치 파이라던가.

오븐이 구식 가스 오븐이라 밀가루 반죽이 돌처럼 굳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삶은 감자에 베사멜 소스와 치즈를 붓고 삶은 시금치를 섞는 이런 요리도 굿이다.

한국식 시금치 볶음을 해먹기엔 뭔가 적합하지 않아보이는 시금치들이라서 이런 메뉴 너무 좋다.

주말마다 이 요리책을 펴보고 다음주에 해먹을 음식 두세가지정도를 정해서

식당에 식자재 주문하면서 추가적으로 집에 필요한 채소를 주문하는데 쏠쏠한 재미가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인데

잘 차려입은 웨이터가 가져와서 따주는 병속의 와인보다

이렇게 500ml,1ltr 씩 작은 유리병에 담겨져 나오는 와인이 좋더라.

비싼 안주말고 몇조각씩 수수하게 짤려져 나오는 치즈들도 그렇고.

내가 부엌에 가서 앉아있지 않으면 와이프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요리에 미친 아내를 향해 농담석인 핀잔을 던지지만

줄리아가 결국 생각해내지 못한 음식에 관한 단어를 마치 사전을 펼쳐 보여주듯 자연스럽게 내뱉는 폴.

상대의 취미와 열정을 인정하고 말 없이 따라가 주는 이런 사람은 우리가 꿈꿔야 할 배우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되어주야 할 모습이 아닌가 싶어 뜨끔했다. 

근데 남편 역할의 스탠리 투치를 보면서 자꾸 <러블리 본즈 Lovely bones>의 변태아저씨가 생각나서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 배우는 내가 십년도 더 전에 시사회에서 본 <빅 나이트 Big night>의 그 이탈리아 식당 주인이 아니었던가?

처음으로 리조또라는 음식을 알게해준 그 영화. 다시 한번 볼 수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영화를 보면서 사실 <내 아내의 모든것>이 계속 생각나서 웃겼다.

'줄리아 긍정씨'라고 불려도 손색없을정도로 모두에게 밝음과 경쾌한 기운을 주는 줄리아와

불만과 독설과 짜증으로 일관하는 정인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맛있는 음식에 목숨을 건다는것과 둘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줄리아 차일드는 남편 폴 차일드가 죽고나서도 혼자 십년을 더 살았더라.

실제 그들의 인생도 영화속에서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웠길 빈다.

실존 인물을 영화화한다는건 어느 정도 왜곡의 가능성을 안고있으니깐 뭐.

 

 

결국 줄리의 블로그는 인기 블로그로 자리매김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책으로 만들어지고 그 책은 또 영화화되었다.

단순히 꿈꾸기만해서 모든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꿈이 다른이의 꿈과 또 다른이들의 이해관계에 적절히 들어맞을때 해피엔딩이다.

 

 

가끔 나만의 책을 만드는 꿈을 꾼다.

출판을 해서 많은 독자를 거느리거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런 책도 좋지만

그냥 자기 돈들여서 자기가 쓴 글과 그림으로 단 몇부만 발행해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나눠주고 싶은 그런 책말이다.

그리고 옆에서 저렇게 진심으로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이상 바랄게 무엇이 있나 싶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2.12.06 06:59

 

 

<내 아내의 모든것>

 

꼭 요리를 주제로 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런 영화는 왠지 음식영화라는 장르로 분류해두고 싶다.

음식 셋팅에서부터 식기며 요리도구, 부엌 인테리어까지 구석구석 신경써서 촬영한게 티나는 그런 영화들말이다.

음식을 대하는 주인공들의 자세는 또 얼마나 야무지고 아기자기한지.  

 너무 금새스쳐지나가서  몇번이고 정지시켜놓고 천천히 살펴보고  싶었던 장면들이 많이 있었다.

어쩌면 요리장면이나 식사장면을 더 많이 첨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배재한것은 아닐까.

깡마른 몸에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정인은 그래도 요리를 할때만큼은 행복해보인다.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고 까다로운 그이기에 그가 만드는 음식도 상대적으로 맛있어 보였던것은 아닐까.

하지만 정인의 인생은 매우 권태롭고 위태로워 보인다.

행복의 본질은 변한다.

그 변화를 감지한 사람들은 권태를 느낀다.

하지만 권태를 불행이라는 단어와 동일시할 수 있을까.

 

 

아내를 유혹해 줄 전설의 카사노바를 고용한다는것은 지극히 극적인 발상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나름 현실적이다.

물론 웃자고 한 얘기들이었겠지만 몇몇 토크쇼에서 이선균 스스로 불평하듯 털어놓은 그의 결혼생활을 상기시키니

영화속의 그가 연기한 캐릭터에 좀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솔직하게 자기 인생을 얘기할 수 있는것도 생각해보면 배우에게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겠구나.

왠지 결혼이나 출산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임수정이기에 정인의 캐릭터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이 영화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임수정은 당당히 서른배우의 반열에 들어선것 같다.

그가 나오미 왓츠나 샤를롯 갱스부르 같은 느낌의 배우로 늙어갔으면 좋겠다. 

 

달콤하고 자유분방한 연애끝에 결혼에 골인. 저기 서울 외곽의 신도시 어디쯤일까?

별로 한국 같아 보이지 않는 동네에 알록달록 예쁘게 줄지어선 집들 사이로.

'7년 후'라는 자막이 뜬다,

아. 너무나 불편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결혼 후 별다른 직업없이 건축하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괜찮은 집에서 괜찮은 옷입고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가는 여자.

하기싫은거 많아보이고 고집있어 보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욕구불만에 약간의 피해의식에 열등감마저 보인다.

'우리 다시 아기를 가져보도록 해볼까?'라는 정인의 메세지는

임신과 출산이 이 두사람에게 어쩌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뉘앙스를 주지만.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서 결혼을 해서 7년동안 아이없이 둘이서 살면

저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것은 필연적이라는 암묵적인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기때문에 불편하다.

 불행을 합리화시키고 일반화시키는데있어서 인간은 선수다.

 

 

저렇게 볕이 잘드는집인데 아침부터 전등은 뭐하러 켜놓은거냐.

남자는 처음 봤을때의 여자 모습을 항상 기억하며 여자가 항상 처음과 같기를 바라고

여자는 남자가 처음처럼 만족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항상 변화를 꾀한다고 누가 그러더라.

뭐냐.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라는 책이라도 읽어야 될것같은 분위기다.

 

 

코발트색 타일에 개나리색 부엌가구.

아침볕이 저렇게 잘드는 예쁜 공간에 정말 완전 모르는 사이처럼 남겨진 두사람.

둘사이 백만광년사이의 거리를 가득메운것은 진공청소기 소리와 담배연기뿐.

우울하다.

이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려면 어느정도로 상대가 싫어야할까.

어느 정도의 실수와 잘못이 용인될 수 없는걸까.

변하는 상대보다 더 낯설은것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상대가 싫어지는 자신이 아닐까.

살아서 단 한 순간이라도 이 사람을 증오해야할 순간이 있을것이라고 언제 상상이라도 했었을까.

나없이 한번 살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실감해봐 라는 저주 같은건가.

 

 

이 두사람의 욕망은 확실한 불일치다.

여자는 여전히 요리로만 소통하려하고 

남자는 이미 음식으로 그녀를 이해하는 방법을 까먹었다.

정인의 얼굴에서 영화 <삼공일 삼공이>의 방은진이 보인다.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남겨진 여자.

설거지는 항상 자기만 하는것 같고 그걸 누구한테 떠넘기기엔 명분이 없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 집에 볕도 잘들겠다 뭔가 자기를 위한 삶을 살 여력도 되는데 더이상  불평하지 말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일하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그 후에 여자들이 느끼는 공허감.

가장으로써 항상 일만하고 나중에 뒤돌아서서 내 인생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남편이 느끼는 공허감.

인간 자체가 그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것이니,

아이만 키우다가 자신을 잃었다느니

아이라도 없으면 삶은 무의미하다느니  

아무튼 이런식으로 본질을 피해가려 하지 말자.

 

 

감히 단 한번도 존재해본적 없는 캐릭터라고 해도 좋을만한 류승룡 캐릭터.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로망일뿐이고 누군가의 뮤즈일뿐이다.

 뮤즈는 매력적이다. 왠지 다 주고 나면 새로운 인생을 선물받을것 같은 환상을 준다. 

하지만 사랑에는 빠지지 말자.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2.08.26 03:56

 

 

손님맞이와 이사준비에 정신을 뺏겨서 전 세계인의 축제라는 올림픽은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런던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데 정작 우리집에는 런던에서 시누이와 그의 남자친구가 놀러왔다.

일주일간 머물던 손님들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옮겨진 이삿짐들을 하나씩 하나씩 옮기던 날.

올림픽 얘기로 가득채워진 인터넷 홈페이지들을 보니 문득 나도 올림픽이 보고 싶어진다.

텔레비젼도 없거니와 있다고해도 한국경기를 중계 할 확률은 0퍼센트라고 해두자.

그리고 방송사의 인터넷 생중계는 해외 거주자에게는 자동적으로 차단이 되는 법.

여기저기 혹시나 해서 찾아보다가 공중파 3사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선수들이 참여하는 대부분의 경기와 정말 왠지 재수없었던 폐막식까지 전부 챙겨보았으니.

영국과의 시차가 2시간 뿐인 리투아니아에서 오히려 올림픽 시청하기가 편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올림픽이 끝나고 나니 자동적으로 공중파 3사 실시간 시청은 불가능해졌다.

혹시나 몰라서 가입을 해보았는데 이럴수가! 가입일로부터 일주일간은 모든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것이다.

가지고 있는 메일주소를 다 써먹고 나면 물론 이 새로운 문명과도 안녕이다.

 

리모콘 버튼만 누르면 티비가 나오고 디비디가게에 가면 원하는 영화를 빌릴 수 있는 무한정 재생의 일상대신

하나의 이메일 주소로 단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부여받고 최대한 많은 기억을 구겨넣으려 애쓰고 있는 요즘.

 그래서 결론은 한국 영화를 원없이 보고 있다는것.

어디에라도 적어놓지 않으면 어제 무슨 영화를 봤는지 곰곰히 생각을 해봐야 할 정도로 사실 모든게 뒤엉켜있다.


<내 아내의 모든것>을 보고는 임수정이 급격히 좋아졌다.

내 머릿속에 임수정은 드라마 <학교>의 차가운 반장과 <장화 홍련>의 냉소적인 언니로

십년전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었고

어느새 유부녀를 연기해도 되는 나이가 되어버린 이 여배우에 대해 한번도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것을 알게되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는지 물어보고 싶어진다.

마치 현실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문제의 해답을 찾기위해 비슷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느낌이랄까?

 

 

무슨 영화를 볼 지 계속 화살표 버튼을 누르다 포스터에 한번 꽂히고 일부러 시놉시스는 보지않고 내려버렸고

최소한 출연배우라도 보자 해서 보니 임수정과 현빈이다.

영화 시작부터 10분 넘게 이어지는 차량 내부 신.

뭐지. 요즘 세상에 이 긴긴 롱테이크의 영화는? 문제는 영화 자체는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는것.

여자는 헤어지자는 말을 힘들게 내뱉었고 남자는 답답할 정도로 안정적인 움직임으로 계속 운전을 한다.

여자도 남자도 어조에 변화가 없다.

마치 오랜세월동안 비슷한 리듬과 공기속에서 함께 길들여진 사람들처럼.

누군가는 이 긴 침묵을 깨버리고 싶은게 분명하다.

평소처럼 이것저것 짚어보기 시작한다.

얘네들은 뭘 하는 사람들일까. 왜 헤어지려고 하는것일까. 과연 잘 헤어질 수 있을까.

정작 이 긴 롱테이크뒤에 어떤 장면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임수정은 또 한없이 예민한 역할을 맡았고 현빈은 전과 다르게 우유부단해졌구나 정도만 가늠해본다.

 

 

여자는 짧은 출장에서 돌아왔고 약속대로 이 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기다렸다는듯이 비가 내린다.

서로를 대하는 여자와 남자의 모습은 항상 그랬던것처럼 자연스럽지만

그 자연스러움속에는 한없이 팍팍하고 낯설은 표정이 있다.

하지만 한번도 서로에게 익숙해 본 적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침묵속에서도

서로의 버릇을 인정하고 자신의 습관에 자유로웠던 이들의 관계가 간간히 보인다.

닫기 힘든 베란다 문을 닫아주거나 면도기와 면도용크림을 정리해주는 배려같은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선명해지는것은 무엇일까.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오랜 요리책 사이에 남겨진 빛바랜 레시피와 쪽지들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은 오히려 한번 마음잡고 펼쳐봐야 드러나는 그런 흐릿한 기억이 되어가는걸까.

담담하게 이별을 준비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우울해진다.

버릴것은 정말 미련없이 버려야 하고 포기는 정말 용기있는 사람들이 하는거라는 여자의 말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세상에는 정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간직하는것보다 버리는데 익숙하고 포기하는데 익숙한 사람.

감정에 관한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집안 씬부터는 거의 실시간으로 진행된다.

영화의 러닝타임과 영화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같은 호흡으로 진행되는것이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여자가 계단을 올라가는 속도로 나도 한번 걸어보았다.

사람이 저렇게 느리게 걷고 천천히 움직일 수 있으려면 감정과의 장난이 필요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내 감정을 이해해줬으면 해서 의도적으로 자기감정을 절제해야하고,

상대의 감정에 무관심해지려는 의도도 필요하며,

나름의 자기 성찰도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해답을 얻기란 힘들다.

누군가가 먼저 침묵을 깨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모두가 이기적인 그 순간은 어쩌면 서로가 잘났다며 전쟁처럼 싸우는 순간이 아니라  

침묵하는 순간일지 모른다.

 

 

쏟아지는 비로 다리가 통제되고 마치 최후의 만찬처럼 예약해 놓은 식당에 가지못하게 된 이들.

결국은 세련된 집에서 세련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버린듯한 파스타 요리를 한다.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나 열심히 후라이팬을 흔들며 마늘을 볶아내는 디테일한 장면들은

오히려 뭔가 영화의 촛점을 흐리는듯한 불필요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뭐랄까. 세련된 생활방식처럼 감정도 세련되게 끌고가려는 주인공들의 모습이랄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보이네.

집으로 들어온 남의 집 고양이로 인해 주인공들의 절제되었던 스텝은 꼬이기 시작한다.

겁먹은 고양이로인해 남자는 손이 할퀴고 고양이는 집안 어딘가로 숨어든다.

여자는 당황에서 거즈를 손에 감싸주고 한참을 둘이 정지해서 있는데

키스를 하려다 마는 남자와 남자의 손을 거즈로 감싸고 정지에 있는 둘 사이로

선반에 놓여진 강아지 피규어가 보인다.

마치 행복했을 어떤 순간을 응시하고 있기라도 한듯 우두커니 서있는

언젠가 남자가 여자에게 만들어 주었던 꼬리가 잘린 강아지말이다.

엔딩스크립이 올라가는것을 쭉 보고있자니

이 영화는 이노우에 아레노라는 일본 작가의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가 원작이란다.

 집안 어딘가에 숨어있던 고양이는 꺼내둔 앤초비 통조림 냄새로 부엌가까이 돌아온다.

 

 

남자가 여자 짐정리를 도와준다며 여자의 그릇을 정성스럽게 싼다.

정작 여자는 서두르지 않고 짐정리에 냉소적인 느낌마저 준다.

오늘이 아니라면 일년 후라도 이들은 왠지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혹시 남겨지게 될지 모르는 차곡차곡 쌓인 그릇들처럼 고양이를 부른 앤초비냄새처럼

그들의 사랑이란것도 다시 돌아올 곳을 남겨둔것은 아닐까.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죄악인것처럼.

영화는 결과를 말해주지 않지만 주인공들의 이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묘한 영화이다.

 

고양이 주인으로 나오는 김지수의 갑작스런 등장에 보지는 않았지만 '여자 정혜'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무슨 이유로 특별 출연을 하는거지 하면서.

지루한 하루를 올곳이 보여주는 영화를 보면서

옛 남자친구와의 지루한 하루를 보여준 '멋진 하루'라는 영화도 떠오르고 말이다.

게다가 임수정의 또 다른 남자로 전화통화속에 등장한 남자 목소리가 하정우인것을 알고보니 또 묘하다.

감독 이름을 검색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여자 정혜와 멋진하루의 감독과 동일인물이네.

이런걸 확인하게되면 괜히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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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