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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31 <파리 5구의 여인 The women in the fifth > 파벨 포리코프스키 (2011)
Film2013.05.31 06:02

 

 

 

<파리 5구의 여인> The women in the fifth

 

이 영화를 본지 한참이 지났는데 최근 들어서야 내가 본 영화가 이 영화란것을 알았다.

가끔 그럴때가 있다. 뚜렷한 동기없이 우연히 봤는데 재밌었던 영화들에 대해 누군가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그게 무슨 영화인지, 내가 본 영화인지 아닌지 헷갈릴때가 있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때 문장성분의 배열때문이었는지 엉뚱하게도 바네사 파라디가 나왔던 <걸 온더 브릿지>가 바로 떠올랐고 제목속의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영문 제목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최종적으로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던 이유는 아마 스쳐지나간 에단 호크나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이름때문이었을거다.

실제 제작년도는 2011년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개봉을 했다.

나는 리투아니아어로 더빙된것을 보았는데 리투아니아에서는 이미 케이블에서 방영이 된듯하다.

한국어 제목에 친절하게 파리라는 지명을 명시한것과 <비포 미드나잇>과 상영시기가 비슷하게 겹치는 것은 우연일까?

 

 

모호함이 주제인듯한 이런 영화들.

 주어도 목적어도 술어도 불분명하고 배경도 등장인물도 모두 거짓인것 같은 이런 영화들에서 느끼는 묘한 쾌감이 있다.

나는 정말 봐도봐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영화들을 모두가 너무 명쾌하게 이해할때 절망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영화 보기가 편해지는 이유는 그 불분명함을 내 편한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해가기때문인듯.

 

 

 

헤어진 아내와 딸을 만나러 파리로 오는 톰(에단호크).

입국심사대에서 파리에 정착하러 왔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지만 

정작 파리의 전부인 아파트에 도착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비밀번호를 되는대로 눌러볼 뿐 

톰은 무슨 이유인지 아내와 이혼해서 딸조차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져있다.

 

 

파리까지 찾아온 남편을 쫓아내려 인정사정없이 경찰을 부르는 여자를 보면 뭔가 대단한 잘못을 한것 같지만

영화는 딸을 만날 수 없는 아빠를 가엽게 여길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재빨리 우리의 시선을 딴곳으로 돌려버린다.

 

 

버스에서 가방을 도난당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호텔방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톰에게 파리는 그저 녹회색 모노톤의 낯선 도시일뿐

낯선 사람들이 건네는 낯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들을 통해서 톰은 파리의 이곳 저곳을 유랑하지만

그의 두꺼운 안경을 통해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속에서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마치 실존하지 않는듯

실재한다고해도 그와 함께있는 짧은 순간동안만, 그의 눈과 귀속에서만 존재하는듯 보인다.

마치 그가 만들어낸 소설 속 허구의 장소처럼 

낮도 밤도 없는 어두운 숲, 그와 그의 누군가만이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마술적 공간처럼. 

 

 

톰은 아내와 딸뿐만아니라 그가 떠나온 미국에서조차도 마치 삶의 모든기반을 잃은 듯하다. 

그와 비슷한 시력을 가진 여섯살 난 딸이 그가 되돌려 받고자 하는 전부이지만

프랑스인 변호사는 딸의 양육권을 돌려받는 소송을 준비하는 댓가로 10000유로의 수임료를 요구하고

호텔 맞은편방에 사는 흑인은 톰이 호텔 주인의 아내와 잔것을 폭로하겠다며 1000유로를 요구한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녹록한것은 글을 쓸 수 있는 펜과 종이뿐

 

 

숙박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톰에게 호텔 주인은 밤동안 정체 불명의 공간에 머무는 댓가로 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고

톰은 깜박이는 램프와 남겨져서 편지를 쓰는데 몰두한다.

 

 

마치 <비포선셋>에서 다시만난 줄리델피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결국은 그녀와 이혼을 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것처럼

비포 시리즈부터 지금 이 영화까지 에단호크가 연기하는 톰과 제시는 실제 어느 미국 작가의 이야기인것 같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톰은 호텔 식당 구석에 처박혀서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을 소설의 주인공삼아

인생의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는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묘사하는 숲속과 그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은 동일한 공간이다.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의 공간.

폐쇄회로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주지만 정작 그들은 서로를 볼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것은 그의 말처럼 그가 희망을 갖고 구상하는 그의 두번째 소설인지도 모른다. 

 

 

영화속에서 톰이 쓴  'forest life' 라는 책을 읽게 된다면 톰의 감정상태를 좀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것은 전반적인 영화의 색채와 말없는 이민자들이 토해내는 파리의 이질적인 모습.

 숲에는 세상의 모든 녹색이 존재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를 채운 색채는 녹색이 되려다 만 모노톤의 옅은 회색이다.

톰의 침대 시트도 도시의 하늘도 마치 일부러 더이상 나뭇잎이 자라지 못하도록 잘라놓은듯한 도시의 나무까지

톰을 에워싼 세상은 그의 안경필터를 통해서 마치 목이 졸려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람처럼 창백하다.

 

 

영화에서 톰이 마주치는 인물들 혹은 톰이 묘사하는 인물들은 모두 프랑스인이 아니다.

그나마 현실적인 인물들은 그의 프랑스인 아내나 프랑스인 변호사와 통역사 정도.

허름한 여인숙을 운영하는 세자르는 터키계 이민자이고 그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은 이민자에 종속된 또다른 이민자들.

세자르의 아내이자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톰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인은 폴란드 이민자.

마치 저승사자처럼 나타나서 톰을 혼돈에 빠뜨리는 마르짓은 루마니아계 프랑스인이자 헝가리인 남편을 둔 번역가이다.

파리라는 공통된 공간에서 제 3의 언어로 소통하는 그들이지만 이곳 파리에 있는것이 행복해보이지 사람들.

어찌된 연유로 지금 같은 공간에 있지만 왠지 금새라도 흩어져버릴것 같은 사람들.  

그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때 왠지모르게 우울해진다.

 

 

영화에서 이곳이 파리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는 아마 이 장면인것같다.

물론 이 장면도 그냥 잘라서 가져다 붙인게 아닌가 싶을정도로 다소 어설프지만. 

많은 영화들을 통해서 에펠탑은 마치 파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기념물처럼 묘사되어있는데 실제로는 어떨까.

이 장면에서는 오히려 절반도 채 나오지 않은 에펠탑이 워낙에 거대하고 가깝게 묘사되어서

파티가 열렸던 장소나 마가릿의 느낌이 영화 속 파리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훨씬 화려하고 강렬하게 표현된것 같다.

마르짓은 톰의 눈에만 보이는 여인이고 그녀가 톰에게 건넨 명함도 톰 하나만을 위한 메세지일지 모른다.

그녀 자신이 그녀의 남편에게 그랬던것처럼 궁지에 몰린 톰의 뮤즈였던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톰은 외형적으로는 가족을 잃은 한 남자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창작의 한계에 부딪친 소설가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마르짓이 이미 예전에 자살한 여인으로 밝혀지면서 톰은 헤어나올 수 없는 혼란에 갇히고 마는데

분명한것은 마르짓과의 대화를 통해서

딸을 다시 만나려하는 톰의 욕망과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현실과의 괴리감이 좁혀지고 있다는것.

톰은 여전히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마치 숲속에서 점차 또렷해지는 딸의 실루엣처럼

그는 그가 보고자하는 현실과 그가 처해있는 현실의 차이를 점차적으로 인정해간다.

마르짓은 톰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더욱 처절하게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과거의 실수를 돌이키려 발버둥치는 사람들 눈에만 보이는 죽음의 전령사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슬픔과 불행을 초월해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야하는 예술가의 번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걸까?

 -넌 그들이 나에게 어떤짓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못할거야.

-너도 너 자신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하지.

    

 

이런 종류의 색감은 아마도 톰이 밤새도록 경비를 서고 새벽이 되어 호텔로 돌아올때쯤의 모습같다.

거리에는 신호등만이 쓸쓸하게 깜박이고 새벽녘에 건물 창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은 불꺼진 도시를 더욱 도시답게 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 밤기차를 타고 이동할때가 많아서 아침이 되기 전에 새로이 도착한 도시는 텅 비어있기 마련이었다.

항상 따뜻한 커피를 마실곳을 찾아 헤매곤 했는데 이번 여름에도 텅 빈 파리의 골목을 걷게 될 기회가 있을까.

그러려면 아마 <영원한 휴가>속의 앨리처럼 밤을 새서 파리 거리를 걸어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톰처럼 어디 한구석에 처박혀서 나와 누군가를 위한 둘만의 장소를 갈망해야할지도.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