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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08 Blue is the warmest color_Abdellatif Kechiche_2013 (2)
  2. 2016.04.06 [The Lobster] Yorgos Lanthimos (2015)
Film2017.03.08 00:57



(Blue is the warmest color_2013)




꽤나 이슈가 되었던 영화이던데 이 영화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다가 얼마전에 크라이테리언 인스타계정에 영화 포스터가 몇번 계속 등장하길래 호기심에 적어놨다가 찾아 보았다. 이 계정에는 크라이테리언 사무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어떤 배우의 생일이나 기일을 기념하면서 배우의 출연작 포스터가 올라오거나 가끔씩 오늘 어떤 영화를 보겠냐는 살가운 질문들도 올라온다. 환호와 애정 일색의 짧은 코멘트들을 읽고 있으면 동호회같은 기분이 들어 재미있고 가슴이 따뜻해지고 그런다. 이 영화의 포스터속에는 눈부시게 밝은 파랑 머리를 한 레아 세이두가 있었다. 고개를 약간 들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듯 반쯤 감긴 눈은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완전히 굴복당한듯한 애띤 소녀, 아델이 그녀와 마주보고 있었다. 아델의 표정은 단순히 사랑받고 싶은 이의 표정을 넘어서 내가 널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더 확실한 굴복의 조건을 채워 달라고 애원하는 이의 얼굴에 가까웠다.  엠마 (레아 세이두) 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것 같은 누구에게서라도 영감을 얻을 수 있을것 같은 표정으로 군림하고 있다.  관계에 종속되길 원치 않는 이런 이들은 보통 상처를 주는데 익숙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아델은 어떨까. 내가 누군가에게 큰 영감을 주는 주체가 됐음을 깨닫게 될때 단순히 자존감 수치가 올라가는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것 이름을 가지게 된다는것은 한편으로는 종속되는것이다. 아직 덜 성숙한 아델은 그 달콤함에 취해있는듯 보였다. 누군가는 큰 좌절을 안고 뒤돌아설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지만 차이고 차였다는 단순 동사로 설명될일은 아닐것이다. 단 한시간이라도 가슴깊이 사랑했다면 아픔은 고스란히 절반씩이다. 사실 포스터가 인상 깊었던것은 아마 내 자신이 엠마의 아우라에 전복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력을 지닌 사람에 대한 묘한 질투 같은것,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매력을 지닌 타인이고 싶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거리를 걷다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엠마를 처음 봤을때 아델이 침묵속에서 표현해내던 전율의 근원은 나의 그것과 동일한것이었으리라.  아델의 평범하고 팍팍한 일상들이 성실하게 나열되는 상황에서 영화가 장장 3시간짜리라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왠만큼 재미있지 않고서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 버겁다.  ' 뼈를 깎는 고통을 느끼며 정체성을 탐험하는 아델의 질풍노도의 감정에 관한 이야기. 엠마는 가능한한 거침없고 치명적이고 잔혹해야 할거고 아델은 아마 등장하는 모든 이와 갈등을 겪겠지. 그리 오래 지속될 종류의 관계가 아니야. 상처는 자체적으로 치유될거다.'  이런 이야기에 3시간이나 필요할까. 실제로 영화는 그런 플롯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들이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싸우고 헤어지고 미련을 못버리고 발버둥치고 슬픔에서 헤어나려는 긴 시간속의 과정들을 그대로 축소하고 축소시켜서 3시간으로 압축해놓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관계의 미니어쳐 같은 영화이고 그것이 이성간이든 동성간이든 큰 차이가 없다는것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어느 과정 하나에 더 긴 시간을 할애하거나 감상적인 현미경을 들이대거나 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선댄스 느낌이 농후한 이 영화가 칸에서 상을 탔다고 해서 신선했다.  재작년인가 상가일레의 여름 (The summer of Sangaile) 라는 리투아니아 영화가 선댄스에서 감독상을 탄 적이 있는데 그 영화 역시 두 소녀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랬던것 같다.  상가일레가 어떤 소녀를 만나면서 치유를 경험하고 도약하는 과정들을 시적으로 은유하며 달콤한 결말을 상상하도록 하는데에 촛점이 맞춰졌다면 이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기승전결이 매우 뚜렷한 두 여자의 관계를 기록영화처럼 보여준다.  이 영화에 은유가 있었다면 아델이 먹는 스파게티와 엠마가 먹는 굴과 와인에 관한 정도일거다. 아델은 굴과 와인을 천천히 음미하고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차이점에 대해 토론하는 엠마에게서 영감을 얻는 대신 소외감을 느낀다. 그 예술가들을 잘 몰라서 사랑이 깨진것은 아니다. 아델에게는 사랑만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너무 많이 생겼고 무엇으로 그 공간을 채워야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연스레 자기 세계로 걸음을 옮기는 엠마를 보는것이 고통스러웠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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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6.04.06 06:06



<The Lobster>



[Youth]를 통해 오랜만에 만난 목소리와 눈썹의 미인 레이첼 와이즈. <True Detective 시즌2> 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콜린 파렐. 각기 다른 영화들을 통해 좋아하게 된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는 더 큰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된다. 호기심 자극하는 포스터와 생소한 감독의 이름을 보고 망설임없이 보게 된 영화 <The Lobster>. 영화를 통해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새로운 인생을 간접 경험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어떻게 대처 해야 할까 진지하게 생각하며 보게 되는 영화들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최근에 본 <Danish Girl>, <Room> 같은 영화도 적지 않은 감정 이입을 끌어 냈지만 이 영화가 그 중 가장 절망스럽게 느껴진 이유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고독 이라는 감정, 그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연이라는 이미 크나큰 좌절을 경험한 사람이 그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짝짓는 기관으로 옮겨진다. 상대가 그런 기관으로 옮겨져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것을 알지만 이별을 통보하고 마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왜? 라는 질문도 하지말아야 하는 당위성에 완벽하게 세뇌당한 사회 구성원들. 그들의 움직임과 표정은 경직되어있고 말투는 음정의 높낮이도 속도의 변화도 없이 메말랐고 기계적이다. 영화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장 공포스러운 사회이다. 자주 반복되는 낡은 주제이지만 그 주제를 풀어내는 소재와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냉소적인 위트와 유머로 가득했기에 대사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영화. 콜린 파렐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좋았다.



주인공 데이빗 (콜린 파렐)이 속한 사회는 고독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이다. 독신은 불법이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받은 데이빗은 그처럼 혼자가 된 사람들이 모여있는 호텔로 옮겨진다. 도착하자마자 신상을 등록하고 신발과 옷을 배급받고 호텔 내 규칙을 설명받는다. 그 과정에 참여하는 데이빗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온화하다. 그 모든 과정을 설명하는 직원들의 얼굴에서도 눈꼽만큼의 동정이나 연민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호텔에서 45일동안 짝을 찾지 못하면 그들은 동물로 바뀌게 된다. 랍스터는 짝짓기에 실패할 경우 데이빗이 바뀌기로 선택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사람 사냥을 한다. 사냥의 대상은 바로 숲 속에 모여 살아가는 솔로들. 바로 사랑의 감정이 허용되지 않는 혼자서만 살아가야하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사냥한 사람의 수 만큼 45일이라는 시간에 추가로 살 수 있는 날 수를 할당받는다. 데이빗이 호텔에 입소하면서 함께 데리고 들어온 개는 그의 형이다. 짝짓기에 실패하고 사냥술도 탁월하지 못했는지 결국 개로 변했다. 새로 입소한 모든 이들에게 싱글룸이 배정된다. 45일안에 짝을 찾으면 2주동안 더블룸에서의 생활이 주어지고 그 후에 호수위의 요트로 옮겨져서 관계 숙성의 기간을 거쳐서도 커플로 남으면 또 다시 혼자가 불법인 세상으로 방목된다. 방을 배정받은 데이빗은 한쪽 손을 벨트에 묶인다. 혼자서 사는것이 얼마나 불편한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한 호텔측의 조치이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데이빗의 방에 방송이 흘러나온다. '남은 시간 44일. 아침 드시러 오세요' 



아침식사 도중 알게 된 동병상련의 친구들. 한명은 다리를 절고 다른 한명은 말을 더듬는다. 데이빗은 근시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헤어짐을 선언하는 아내에게 데이빗이 묻는다. '그 남자도 안경을 쓰나?' 데이빗의 근시는 이혼 사유이기도 하다.) 구성원들을 구별짓는 이런 신체적 핸디캡들은 그들이 이성을 고를때 염두에 두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자신과 100퍼센트에 가까운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을 찾는것은 헤어짐과 동시에 감금과 죽음이 보장된 무시무시한 사회에서 이별의 가능성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노력인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더 우수한 신체 조건과 우월한 지능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신분 상승을 하거나 똑똑한 자녀를 낳겠다는 따위의 욕망이 불필요한 사회이다. 나와 더 다른 사람일수록 이별의 가능성은 커지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풍경을 좋아하는지 따위를 천천히 탐색하며 영혼의 동반자를 찾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다. 사회의 입장에서도 그만한 시간 낭비가 없다. 이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저 때가되면 짝이나 지어서 애를 낳고 노동력이나 생산하며 평생 일을 하며 사회의 부품이 되면 족한것이다. 다리를 저는 남자의 사연도 참 기구하다. 그의 엄마는 아버지의 외도로 이혼 당하고 이 호텔에서 생활하다 결국 시간내에 짝을 찾지 못하고 늑대가 되어 동물원에서 살게 된다. 동물원 우리 속의 수 많은 늑대 중 정작 누가 자신의 엄마인지 알 수 없던던 남자는 어느 날 동물원 우리로 뛰어든다. 그리고 우리 속의 늑대중에 그를 공격하지 않았던 늑대가 자신의 엄마라고 믿는다. 물론 그는 다른 늑대들의 공격으로 다리를 잃는다. 말을 더듬는 남자는 호텔에서 자위를 하다가 토스터기에 손을 집어 넣어 태우는 벌칙을 받는다. 그는 바뀌고 싶은 동물로 앵무새를 선택한다. 그는 다같이 앵무새가 되어서 죽어서도 친구로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는 짝을 찾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사냥 시간이 되었다는 방송이 나오면 모두들 총을 메고 버스레 오른다. 사냥에 능숙해서 150일이 넘는 추가 수명을 할당받은 여자도 있다. 호텔에서는 사격 수업도 행해진다. 데이빗은 절름발이 친구에게 새로 입소한 사람중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하지만 절름발이 친구는 그녀가 일시적으로 부상을 입었을뿐 곧 정상적으로 걷게 될것이라며 자포자기의 어조로 말한다. 한정된 공간속의 정해진 사람의 무리에서 짝을 찾는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게다가 특정한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절름발이는 사냥을 나가는 버스안에서도 안절부절이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자신이 남들보다 빨리 사냥을 할 수 있을리 없다는것이다. 사냥을 통해 무기력하게 삶을 연장해간다면 동물원 우리속에 갇혀있던 자신의 엄마와 결국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짝을 찾는것에 다른이들보다 적극적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연장되는 삶. 순수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는 유지되기 힘든 삶.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속여야 하는 삶.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속내를 들여다보아도 그다지 다를것이 없어 보인다.




45일이 지나도록 짝을 찾지 못한 한 소녀는 동물로 바뀌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절대 산책이나 섹스처럼 동물이 되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조언도 받는다. 마지막 저녁만을 남겨 둔 친구에게 성공적으로 짝을 찾아서 요트로 이사하기 직전의 친구가 작별 편지를 읽어 준다.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이라도 흘려야할것 같지만 소녀는 편지를 읽는 친구의 뺨을 때릴 뿐이다. 그리고 소녀가 선택한 죽기전 마지막 행위는 혼자서 영화 <스탠 바이 미>를 보는것. 어린 리버 피닉스가 출연했던 4명의 소년의 우정이 그려진 영화이다. 짝은 찾지 못하고 결국은 동물이 되는 사회부적응자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조금은 더 인간적인 사람들인걸까. 



절름발이 남자는 호텔밖의 사회로 돌아가는데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보인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그는 일부러 얼굴을 부딪혀 코피를 낸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커플이 되는데 성공한다. 그런 그를 신기하듯 바라보는 데이빗에게 그가 묻는다. '조금 아프긴해도 가끔씩 부딪혀서 코피를 흘리는게 나을까. 아님 숲속에서 더 큰 동물에게 잡혀 먹는것이 나을까.' 데이빗 역시 그의 주장을 부정하지 못한다. 거짓으로 짝을 찾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그 사실이 발각되면 사후 세계에 대한 선택의 권한도 박탈당하고 누구도 되고 싶지 않은 동물로 변하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을 통제하려는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거짓으로라도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감정은 통제 가능한 어떤 기능이 된다.




호텔에 머무는 짧은 시간동안 이들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충고를 구하고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할때 결국 그 우정이라는 감정도 기능으로만 존재한다는것을 보여준다. 호텔을 탈출하여 숲 속 솔로들의 무리에 속하게 된 데이빗은 사냥을 나온 친구와 조우한다. 좀 더 친하게 지냈으면 딴 세상에서는 함께 앵무새가 됐을지도 모르는 친구인데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서 조우한 것.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원빈과 장동건의 조우에 버금가는 장면이 아닐 수... 함께 앵무새로 변해서 죽어서도 친구로 지내자 했던 사람은 하루라는 생명 연장을 위해 총부리를 겨눈다. 데이빗은 제발 날 쏘지 말라며 있지도 않는 우정 타령을 한다. 



숲 속의 무리들은 싱글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 저항하는 반정부단체에 가깝다. 서로 호감 섞인 말과 눈길을 주고 받는것도 금지 된다. 한 쪽 세상에서 남자는 자위를 하다가 토스터기에 손을 태우는 벌칙을 받지만 이곳에서는 그것만이 허용된다 .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데이빗에게 숲 속 리더가 묻는다 '너 어디갔다 이제 왔어?' '어. 나 저쪽 구석에서 자위 좀 하고 왔어.' 혼자 일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는것만으로도 얼핏 훨씬 나은 사회처럼 보이지만 비논리적이고 폭력적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사랑에 빠진 구성원의 눈을 멀게해 버린다거나 키스를 한 사람의 입술은 무자비하게 잘라버린다.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숨는 연습도 해야한다. (등장인물들 뒤로 뚜벅뚜벅 지나가는 낙타는 정말 웃기다. 숲 속의 낙타라니. 누군가가 죽어서 낙타가 되길 원했던것인데. 아무튼 진지하고 잔혹하고 슬픈 영화지만 정말 웃긴 영화이기도 하다.)



호텔을 빠져나와 숲 속 생활을 시작한 데이빗은 사랑에 빠진다. 이들이 만약 호텔에서 만났다면 아무런 거짓말이나 노력도 필요없이 커플이 되어 행복한 호텔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었겠지만 역설적이다. 이들은 도리어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운좋게(?)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회를 전부 경험하고 있는 데이빗이 말한다. '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데 느끼는 척 하는것이 뭔가를 느끼지만 느끼지 않는 척 하는것보다 훨씬 힘들다. ' 그렇다면 숲 속의 사회는 더 행복한 사회일까. 




직접적으로 사랑을 속삭이거나 표현해서는 안되는 이들은 수십가지의 신호와 제스처들로 대화한다. 음악도 함께 듣고 둘만의 미래도 그려보지만 모든것이 아슬아슬하다. 숲속에서 함께 음악을 듣는 이 장면을 보고 있자니 어떤 음악을 함께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것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지 영화의 감독도 아는것 같아서 반가웠다. 2016년 들어서 본 영화와 드라마 중 단연 아름답고 가슴 먹먹했던 장면이 둘 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콜린 퍼렐이 연기했다. 이 장면은 그 두 장면 중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트루 디텍티브> 에서 콜린 파렐과 레이첼 맥아담스가 대사 없이 서로를 길게 응시하는 장면이다. <건축학개론>의 서연과 승민,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가 숲 속 사회의 구성원이었다면 그들이 옥상에서 함께 듣던 음악 그리고 빈의 레코드 샵 감상실에서 듣던 음악들이 단지 낭만적일 수 만은 없었을것이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산다는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마치 세상에 단 둘만이 남겨진듯한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런 사람들을 포용해 줄 수 없는 사회. 살 만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란 사회 구성원들을 효과적으로 결속하기 위한 수간이지만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것도 사실은 바깥 세상의 사냥꾼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속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발각되고 숲속 사회의 리더는 근시 치료 수술이라는 거짓 명목으로 레이첼 와이즈를 수술대 위에 눕혀 눈을 멀게 한다. 잘못된 사회 규범에 눈이 먼 지배층이 휘두르는 폭력에 여자는 아무런 사회적 보호망도 없이 내팽겨쳐진다. 앞을 보지 못하니 사냥에서도 살아 남을 확률이 적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볼 수 없다. 그녀가 속한 세상이 숲 속이 아닌 호텔이었더라도 그녀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것이다. 사냥을 할 수 없으니 생명은 연장되지 못할것이고 그런 장애를 지닌채 적합한 상대를 만나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확률도 크지 않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것은 데이빗뿐이다. 그는 그들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를 관조하는 관객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다.



눈이 먼 여자와 함께 데이빗을 숲을 빠져나온다. 안전한 삶은 어디에서도 보장되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이 가진것은 서로뿐이다. 앞으로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삶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들은 신분을 증명하지 못해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들이 할 수 있는것이라면 감정을 지어낼 필요도 없이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이 그저 서로의 곁을 지키는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을 지속시켜 나가기위해 그들이 각자 갖춘 조건은 더이상 이상적이지 않다. 서로가 운명처럼 닮아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한명이 실명이 된 상황에서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데이빗은 결국 자신도 실명하기로 결심한다. 어떤 사회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유효하다고  말하고 싶은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 이토록 극단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눈을 찌르는 데이빗은 보여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데이빗을 기다리는 여인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데이빗이 눈을 찔렀는지 아니면 혼자서 식당을 빠져나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은 어떤것일까. 데이빗 역시 실명했길 바라는것은 잔혹하지만 실명한 여자가 혼자 남게되길 바라는것은 더욱 잔인하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일 필요는 없지만 선택의 주체는 우리 스스로여야 하니깐. 호텔도 숲 속 사회도 탈출해서 능동적으로  감정의 주체가 되고자 했던 데이빗이라면 결국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든 사랑하는 사람 곁에 남는 길을 선택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눈먼 상대를 위해 내 눈을 찌를 수 있을까.  차라리 사랑은 그저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데이빗이 그녀를 놔두고 유유히 떠났을거라 생각하는것이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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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