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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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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와 스푸르기떼 트롤리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다 보면 구시가를 한 꺼풀 감싸며 돌다가 외곽으로 빠지기 전의 트롤리버스들이 정류하는 곳마다 거의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적당히 위장을 채우고 집을 나선 나에게 이 카페들이 너의 나른한 위장을 우리집 카페인으로 깨워주겠다며 트롤리버스 창문 너머로 손짓하는데 나도 굳이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두 정거장 정도 타고 가다 내려서 잠깐 앉아서 커피로 속을 헹구고 다시 남은 다섯 정거장을 타고 가던 길을 가곤 한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우즈가베네스 축제도 지났는데 날씨가 더 추워졌다. 진눈깨비가 짙게 내리던 날, 이른 아침이지만 마치 지정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던 사람들로 이미 반 정도 채워진 카페에 나도 자리 잡았다. 아침에 혼자 일하는 직원은 일손이 ..
에스프레소와 에그타르트 이 카페는 처음 갔던 날이 선명히 떠오르는데 2019년 7월 3일이었다. 병원 정기 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그날 커피를 마시며 정말 오랜만에 전자서점 현금충전을 했었다. 매월 1.2.3일에 현금충전을 하면 포인트를 두 배 주던가 했는데 충전을 해도 포인트 적립이 되지 않아 규칙이 바뀐건가 하고보니 시차 때문에 한국이 이미 4일이었던 것. 그때의 날짜와 시간이 여전히 충전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전자서점은 이제 거의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 빵집은 한창 개업을 해서 사워도우빵에 진심인 컨셉으로 홍보를 많이 했는데 아침에 가면 갓 구운 빵냄새가 진동을 해서 아침마다 들러서 빵을 사게하는 베이커리로는 거듭나지 못했지만 그 후에도 지점 몇 개를 내면서 여전히 살아남았다. 당시엔 브런치 카페가 많지 않..
어느 12월의 극장 만약 이곳이 뉴욕 브로드웨이의 어느 극장이거나 파리의 바스티유 극장이거나 하면 이 장면은 뉴요커나 파리지앵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그런대로 설득력 있는 풍경일까. 왠지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그곳이 아닌 이곳에 살고 있어서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들 앞에 굳이 지정학적 수사를 붙인 후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인 것처럼 감정이입 하는 것이 의외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에 놀라곤 한다. 나에게 이런 장면은 명백히 올가 혹은 옐레나, 아그네, 그레타 같은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샤바의 쇼팽 연주회에서 마주르카를 연주하던 피아니스트도 그렇다. 이들 모두를 가둬 버리는 아주 깊고 넓고 차가운 호수가 있다. 파리에서의 1년에 대한 향수를 호소하며 꿈에 젖던 하얼빈의 러시아어 시간 ..
12월의 11월 연극 회상 술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마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빈도로 마시고 싶다. 그러려면 좀 뜸하게 마셔야 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종이어도 명확하면 된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술을 대하는 자세와 감성은 또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긴 채로 나와는 다르겠지만 애주가의 영혼과 체질을 가지지 못한 나로선 딱 그 정도가 좋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연극보기 전에 진 한 잔을 마셨다. 술을 정말 거의 마시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대략 이렇다. 드라마의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즌의 내용을 잠깐 되짚어 줄 때 내 기억들이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재빠르게 되감겨 들어가며 수렴될 때의 느낌이 있다. 눈앞에 놓인 한 잔의 술이 바로 이전 술의 맛과 향과 추억을 마치 방금 전에 마신 것인 양 아주 명료하..
Vilnius 173_대마를 씹는 라마 여름부터 구시가에 대마 관련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 가게는 원래 사탕과 초콜릿을 팔던 가게였는데 문을 닫았고 1년 넘게 비어있던 점포에 풀을 뜯고 있는 건지 뱉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귀여운 라마 간판이 걸렸다. 이 근처에 채식 식당이 있다가 문 닫은 게 생각나서 이젠 비건 레스토랑이 생기는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대마 관련 가게. 저렇게 축 늘어진 라마를 보고 비건 레스토랑을 떠올린 것도 웃기지만 라마가 축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생각하니 더 웃기다. 중앙역 과 버스 터미널을 나와 구시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배낭여행자 아인슈타인 벽화를 돌면 만날 수 있는 라마,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대마 껌부터 대마 종자유, 사탕, 젤리, 봉, 파이프, 재떨이, 쟁반 등등 만화 굿..
파란 금요일 아침의 커피 예전에 마트에서 계산을 기다리며 두리번거리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80퍼센트 할인이라는 표지가 눈에 띄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도 호기롭게 반값 할인할 뿐인데 무엇이 이들을 이리도 급하게 했을까. 알고 보니 2월이었으니 엉겁결에 퇴물이 되어버린 다이어리들을 팔아치우는 중이었던 것. 다이어리는 잘 안 쓰게 된다. 하루당 한 바닥씩이나 할애된 심지어 시간까지 예절 바르게 기입된 공책이 지금보다 바쁜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은 망상을 일으키기때문에. 그렇다고 한들 그 위에 또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근데 이 80센트짜리 다이어리는 하루에 아주 좁고 얇은 7줄이 배분되었을 뿐이었으니 용적률이 좋다. 자 일어서야지 하고 덮고 보니 모든 것이 파랑이었다.
의복순례 파블로바 먹은 날인데 아마. 진짜 오랜만에 중고 옷가게 한바퀴를 돌았다. 역시 즉시 재채기 시작. 그래도 이 날 득템한 자켓을 날씨가 좀 추워진 틈에 신나게 입고 다녔다. 날씨 또 더워졌지만 금방 추워지겠지요.
7월의 코트 주말에 날씨가 쌀쌀해 보여 이때다 싶어 봄 코트를 입고 나갔다. 속에 이것저것 껴입으면 겨울의 끝머리에도 얼추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 겨울의 끝머리라고 하면 4월이 훌쩍 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정오가 넘어가자 날씨가 화창해졌지만 큰 무리 없다. 이곳에서 여름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스펙트럼은 약간 2호선 지하철 같은 느낌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녹색 밧줄 위에서 왕십리와 낙성대가 지닌 이질감 같은 것. 그런데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친구는 우산까지 들고 있다. 우리는 비가 올법한 날을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옷을 걸어놓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니 코트가 떨어져 있다. 7월의 코트가. 마치 지난겨울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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