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13.11.10 09:52




<The purge>


영화를 볼때 잔뜩 기대를 하고 보는 몇가지 경우.

예를 들어서 마이클 만이나 코엔 형제같은 감독들이 내놓는 신작들을 기계적으로 보는것 자체가 기대로 충만하다는것이고

곱게 나이들어가는 다이앤레인이나 장만옥의 얼굴을 훔쳐봐야겠다는,

거만한 눈초리의 잭블랙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기대로 골라보는 영화들은

마치 새로운 맛의 과일 맥주나 처음 먹어보는 빵을 집을때의 설레임처럼 멋진 배우들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The Purge>처럼 광고를 엄청 할법한 헐리우드 신작들은 왠만큼 강렬한 시나리오가 아니면 시선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가 허용되는 12시간'이라는 한 줄의 문구에 완전 꽂혀버렸다.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칠판 한 가득 롹의 계보를 적어놓고 열변을 토했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처럼 

대략 백여편의 영화로 이루어진 범죄영화의 계보같은것을 그려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도표속에서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 어떤 위치 정도를 차지하게 될까. 

아마도 칠판 맨 가장자리에서 제목옆에 ? 를 달고 있지는 않을까? 

총격질에 긴장감 만땅이지만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범죄 스릴러가 될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 

누군가는 희생되지만 범죄영화속의 쫓고 쫓기는 땀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나는 아무 죄책감없이 내 이웃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있지만 나를 심판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희생자들을 향한 동정과 상실감은 또 다른 이들을 향한 분노와 함께 남은 8748시간동안 독버섯처럼 피어오른다.



 신도들을 성폭행하고 포르노를 찍게했던 덕망높은 신부를 살해했지만 

모든이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철저히 희생자로 남았던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이 떠오른다.

선량한 일급살인범을 무죄로 석방시킨 희열로 가득했던 리차드 기어의 삼촌미소는 또 어떤가.

아직까지 <프라이멀 피어>라는 명작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식스센스>를 보고나온 관객이 표를 사려고 줄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이다'라고 

말한것 못지 않은 스포일러일지 모르지만. 앗! 어쩌다보니 <식스센스>의 스포일러까지 남겨버렸다.

칼만안들고 피만 안묻혔지 때로는 법위의 법으로 군림하는 종교인들과 

입법절차를 거쳐 성문화된 법을 통한 정의구현이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으로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도 모를 정의찾기에 혈안이 되있는 변호사들. 

그리고 분노라는 이름의 법으로 그 모두를 단번에 심판해버리던 에드워드 노튼.

하지만 퍼지의 12시간속에서는 에드워드 노튼도 누구도 살아서 돌아가기는 힘들것같다.



 1%의 실업률. 줄어드는 범죄율. 

감시카메라 앞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폭력과 살인.

카메라 아래로 나열되는 도시들은 캘리포니아주나 샌프란시스코같은 번화된 도시라기 보다는 

다코다,인디애나,알라바마,사우스다코타,오레곤 등등 뭔가 미국이라는 문명의 사각지대에 놓인듯한,  

미성년자들의 실종을 다룬 많은 영화들에서 눈이 가려진채 트렁크에 갇힌 미소녀들이 버려지던 그런 황량한 지역들이다.

사회 기득권층에 의해 사회악으로 분류되어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는 죽어 없어져도 아깝지 않은 존재들.

저런 인간 살아서 뭐해 혹은'개나 소보다 못한 놈'같은 사람들을 죄의식없이 없애버릴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는 세상.

하지만 중요한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단순한 감정들이,

더 잘사는 이웃에 관한 질투나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 여자친구 부모에 관한 소년의 미움같은 

말초적이고 순수할법한 감정들도 12시간의 축제를 기다리는 동안 탐욕과 분노로 견고하게 변해간다는데에 있다. 



최첨단 시스템으로 중무장한 주택들. 

철벽의 경비 시스템 밖에서 배회하는 거리의 부랑자들이 숨을 곳이라고는 아무곳도 없다.

하지만 세상이 무법천지로 탈바꿈하고 모든 의료서비스가 중단된 상태에서 구원의 희망조차도 완전히 봉쇄된

12시간이라는 정의의 밤속에서 진정 안전한 장소가 존재할런지 의문이다.

저 예절바른 침입자가 신이 되버린 바깥 세계와 평화롭기 그지 없어야 할 내부를 가르고 있는 철문은

너무나 어이없게 순식간에 무너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삐까뻔쩍한 기술적인 반전을 기대했는데 예를 들자면

보안장비 일등 판매자인 에단호크의 집만큼은 영화 <패닉룸>에서처럼 집 내부에 또 다른 벙커가 설치되어 있다던가 

 아들이 집으로 들여보낸 흑인은 애초부터 에단호크에 앙심을 품고 굴러들어온 주도면밀한 살인자라던가

가면을 쓰고 몰려드는 심판자들은 철문과 한몸이될 수 있는 터미네이터의 T-1000 같은 로봇이라던가 

딸의 죽은 남자친구가 갑자기 좀비로 변한다던가 사실 세상엔 그런 황당한 영화들이 많으니깐.

이 영화의 반전이라면 절대 열리지 않을것같은 육중한 셔터가 차로 끌어당기니 어이없이 열린다는것.

모르긴해도 그 날 이후에 에단호크의 회사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을거다.

언제 어떻게 살해될지 모른다는 강박을 안고 사는 시대에 집에서라도 최소한 방탄 잠옷같은것은 입고 있어야 되는거 아닌가.

한마디로 시스템의 노예가 된 인간들이 얼마나 바보천치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내가 저지른 폭력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해자로 남는것은 바보라고 역설하는 사회.

법 없이도 살 사람, 세상에 적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의 씨를 말리는 사회. 

그런 사람들은 그렇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표적이 될지 모르니깐. 

어쩌면 우리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는것 그 자체, 태어난것 그 자체로 범죄자이고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12시간이 지배하는 황폐한 지옥의 유일한 해결책은 

에단호크의 또 다른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태어날때부터 분노의 유전자를 삭제해버리는것일듯.

그리고 그 세상은 달디단 감정만 지닌 감정의 좀비같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또 다른 지옥이 되버릴 가능성이 있다.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축제. 그리고 명절대목.

열두시간만 잘 버티고 나면 남은 일년은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치 풍년을 기원하며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굿을 하듯.  

복도에서 하얀 소복을 입고 양 팔에 큰 칼을 들고 달려오는 저 여자는 정말 동네에서 신내림 받는 여자같았다.



사실 영화가 꼬이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는것은 에단호크의 두 아이들이다.

보안 시스템 따위는 알고보니 밑빠진 독이었던 셈이니깐.

수첩에 심장박동수를 체크하는 이 아이는 무슨 지병이 있나보다. 

<패닉룸>에서도 그랬지만 이런 아이들은 항상 천식이 있거나 어디 아프거나 자기세계가 있는 아이들.

문제는 위급상황이 생겨도 일일구를 부를 수 없는 시간이 정해진 비극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는것.

<퍼니게임>의 살인자 커플에서 우리가 공포를 느꼈던 이유는

그들이 증오나 미움 ,동기가 배제된(혹은 일부러 언급되지 않은) 무조건적인 살인을 저질렀다는데 있다. 

이 반바지 커플은 빌린 계란으로 최후의 만찬을 지어먹으려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두려움도 죄의식도 없이

 처벌의 강박에서 완전히 해방된듯한 순진무구한 얼굴로 계란을 빌리러 다닌다. 

이들은 이미 진작에 이 기형적인 12시간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3.05.31 06:02

 

 

 

<파리 5구의 여인> The women in the fifth

 

이 영화를 본지 한참이 지났는데 최근 들어서야 내가 본 영화가 이 영화란것을 알았다.

가끔 그럴때가 있다. 뚜렷한 동기없이 우연히 봤는데 재밌었던 영화들에 대해 누군가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그게 무슨 영화인지, 내가 본 영화인지 아닌지 헷갈릴때가 있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때 문장성분의 배열때문이었는지 엉뚱하게도 바네사 파라디가 나왔던 <걸 온더 브릿지>가 바로 떠올랐고 제목속의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영문 제목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최종적으로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던 이유는 아마 스쳐지나간 에단 호크나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이름때문이었을거다.

실제 제작년도는 2011년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개봉을 했다.

나는 리투아니아어로 더빙된것을 보았는데 리투아니아에서는 이미 케이블에서 방영이 된듯하다.

한국어 제목에 친절하게 파리라는 지명을 명시한것과 <비포 미드나잇>과 상영시기가 비슷하게 겹치는 것은 우연일까?

 

 

모호함이 주제인듯한 이런 영화들.

 주어도 목적어도 술어도 불분명하고 배경도 등장인물도 모두 거짓인것 같은 이런 영화들에서 느끼는 묘한 쾌감이 있다.

나는 정말 봐도봐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영화들을 모두가 너무 명쾌하게 이해할때 절망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영화 보기가 편해지는 이유는 그 불분명함을 내 편한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해가기때문인듯.

 

 

 

헤어진 아내와 딸을 만나러 파리로 오는 톰(에단호크).

입국심사대에서 파리에 정착하러 왔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지만 

정작 파리의 전부인 아파트에 도착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비밀번호를 되는대로 눌러볼 뿐 

톰은 무슨 이유인지 아내와 이혼해서 딸조차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져있다.

 

 

파리까지 찾아온 남편을 쫓아내려 인정사정없이 경찰을 부르는 여자를 보면 뭔가 대단한 잘못을 한것 같지만

영화는 딸을 만날 수 없는 아빠를 가엽게 여길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재빨리 우리의 시선을 딴곳으로 돌려버린다.

 

 

버스에서 가방을 도난당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호텔방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톰에게 파리는 그저 녹회색 모노톤의 낯선 도시일뿐

낯선 사람들이 건네는 낯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들을 통해서 톰은 파리의 이곳 저곳을 유랑하지만

그의 두꺼운 안경을 통해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속에서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마치 실존하지 않는듯

실재한다고해도 그와 함께있는 짧은 순간동안만, 그의 눈과 귀속에서만 존재하는듯 보인다.

마치 그가 만들어낸 소설 속 허구의 장소처럼 

낮도 밤도 없는 어두운 숲, 그와 그의 누군가만이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마술적 공간처럼. 

 

 

톰은 아내와 딸뿐만아니라 그가 떠나온 미국에서조차도 마치 삶의 모든기반을 잃은 듯하다. 

그와 비슷한 시력을 가진 여섯살 난 딸이 그가 되돌려 받고자 하는 전부이지만

프랑스인 변호사는 딸의 양육권을 돌려받는 소송을 준비하는 댓가로 10000유로의 수임료를 요구하고

호텔 맞은편방에 사는 흑인은 톰이 호텔 주인의 아내와 잔것을 폭로하겠다며 1000유로를 요구한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녹록한것은 글을 쓸 수 있는 펜과 종이뿐

 

 

숙박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톰에게 호텔 주인은 밤동안 정체 불명의 공간에 머무는 댓가로 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고

톰은 깜박이는 램프와 남겨져서 편지를 쓰는데 몰두한다.

 

 

마치 <비포선셋>에서 다시만난 줄리델피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결국은 그녀와 이혼을 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것처럼

비포 시리즈부터 지금 이 영화까지 에단호크가 연기하는 톰과 제시는 실제 어느 미국 작가의 이야기인것 같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톰은 호텔 식당 구석에 처박혀서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을 소설의 주인공삼아

인생의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는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묘사하는 숲속과 그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은 동일한 공간이다.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의 공간.

폐쇄회로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주지만 정작 그들은 서로를 볼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것은 그의 말처럼 그가 희망을 갖고 구상하는 그의 두번째 소설인지도 모른다. 

 

 

영화속에서 톰이 쓴  'forest life' 라는 책을 읽게 된다면 톰의 감정상태를 좀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것은 전반적인 영화의 색채와 말없는 이민자들이 토해내는 파리의 이질적인 모습.

 숲에는 세상의 모든 녹색이 존재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를 채운 색채는 녹색이 되려다 만 모노톤의 옅은 회색이다.

톰의 침대 시트도 도시의 하늘도 마치 일부러 더이상 나뭇잎이 자라지 못하도록 잘라놓은듯한 도시의 나무까지

톰을 에워싼 세상은 그의 안경필터를 통해서 마치 목이 졸려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람처럼 창백하다.

 

 

영화에서 톰이 마주치는 인물들 혹은 톰이 묘사하는 인물들은 모두 프랑스인이 아니다.

그나마 현실적인 인물들은 그의 프랑스인 아내나 프랑스인 변호사와 통역사 정도.

허름한 여인숙을 운영하는 세자르는 터키계 이민자이고 그의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은 이민자에 종속된 또다른 이민자들.

세자르의 아내이자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톰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인은 폴란드 이민자.

마치 저승사자처럼 나타나서 톰을 혼돈에 빠뜨리는 마르짓은 루마니아계 프랑스인이자 헝가리인 남편을 둔 번역가이다.

파리라는 공통된 공간에서 제 3의 언어로 소통하는 그들이지만 이곳 파리에 있는것이 행복해보이지 사람들.

어찌된 연유로 지금 같은 공간에 있지만 왠지 금새라도 흩어져버릴것 같은 사람들.  

그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때 왠지모르게 우울해진다.

 

 

영화에서 이곳이 파리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는 아마 이 장면인것같다.

물론 이 장면도 그냥 잘라서 가져다 붙인게 아닌가 싶을정도로 다소 어설프지만. 

많은 영화들을 통해서 에펠탑은 마치 파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기념물처럼 묘사되어있는데 실제로는 어떨까.

이 장면에서는 오히려 절반도 채 나오지 않은 에펠탑이 워낙에 거대하고 가깝게 묘사되어서

파티가 열렸던 장소나 마가릿의 느낌이 영화 속 파리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훨씬 화려하고 강렬하게 표현된것 같다.

마르짓은 톰의 눈에만 보이는 여인이고 그녀가 톰에게 건넨 명함도 톰 하나만을 위한 메세지일지 모른다.

그녀 자신이 그녀의 남편에게 그랬던것처럼 궁지에 몰린 톰의 뮤즈였던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톰은 외형적으로는 가족을 잃은 한 남자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창작의 한계에 부딪친 소설가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마르짓이 이미 예전에 자살한 여인으로 밝혀지면서 톰은 헤어나올 수 없는 혼란에 갇히고 마는데

분명한것은 마르짓과의 대화를 통해서

딸을 다시 만나려하는 톰의 욕망과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현실과의 괴리감이 좁혀지고 있다는것.

톰은 여전히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마치 숲속에서 점차 또렷해지는 딸의 실루엣처럼

그는 그가 보고자하는 현실과 그가 처해있는 현실의 차이를 점차적으로 인정해간다.

마르짓은 톰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더욱 처절하게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과거의 실수를 돌이키려 발버둥치는 사람들 눈에만 보이는 죽음의 전령사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슬픔과 불행을 초월해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야하는 예술가의 번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걸까?

 -넌 그들이 나에게 어떤짓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못할거야.

-너도 너 자신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하지.

    

 

이런 종류의 색감은 아마도 톰이 밤새도록 경비를 서고 새벽이 되어 호텔로 돌아올때쯤의 모습같다.

거리에는 신호등만이 쓸쓸하게 깜박이고 새벽녘에 건물 창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은 불꺼진 도시를 더욱 도시답게 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 밤기차를 타고 이동할때가 많아서 아침이 되기 전에 새로이 도착한 도시는 텅 비어있기 마련이었다.

항상 따뜻한 커피를 마실곳을 찾아 헤매곤 했는데 이번 여름에도 텅 빈 파리의 골목을 걷게 될 기회가 있을까.

그러려면 아마 <영원한 휴가>속의 앨리처럼 밤을 새서 파리 거리를 걸어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톰처럼 어디 한구석에 처박혀서 나와 누군가를 위한 둘만의 장소를 갈망해야할지도.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3.05.27 07:31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다시 쌀쌀해진 날씨. 주말 오후 집에 틀어박혀 론니 플래닛을 뒤적여본다. 비행기표를 워낙에 일찍 사놓아서 여행까지 반년 정도면 기초 프랑스어를 배워도 남겠다고 생각했는데 밍그적거리는 사이에 여행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살 방을 구해 놓은것 말고는 해놓은것도 없다. 지도위에 표시된 축척을 따라 손가락으로 아무리 에펠탑과 개선문 사이의 거리를 재어 보아도 쉽게 와닿지 않지만 이렇게 백지상태에서 내멋대로 상상할 수 있는것이 어쩌면 현재의 나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여행을 하고나면 지금 머릿속으로 그리는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테니깐. 부록으로 딸린 지하철 노선도를 뜯어서 펼쳐놓고 보니 그나마 방향 감각이 생긴다. 예를 들면 라데팡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3호선 대화역방면의 일산쪽이고 몽마르뜨는 저기 삼청터널이나 효자동 쯤, 엘리제 궁은 경복궁 정도가 될것이고  파리의 10구와 19구의 사이쯤에 내가 어릴적 살던 동네가 있고 마라지구를 지나 라틴지구로 가는 관문인 생 미쉘 노트르담역은 왠지 지하철 3호선 옥수역같은 느낌이다. 최소한 우리가 지내게 될 5구쪽에서 에펠탑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탔을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구나 정도의 감은 오겠지.  사실 프랑스어 철자와 실제 발음 사이의 괴리감도 어느정도 줄였고 뚜레쥬르가 '매일매일' 이란 뜻이란것도 알게됐다. 이런 느낌들이 너무 좋다. 원한다면 끊임없이 새로운것들에 노출 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파리에 관한 상상에 기름을 부어줄 수 있는것은 어쩌면 사실에 기반한 론니플래닛보다는  낭만과 낭만과 낭만의! 파리를 배경으로한 허구에 기반한 영화와 소설들일지도 모른다. 그 중에는 정말 작정하고 찍은것같은 <파리, 쥬뗌므>같은 영화들이 있을것이고, 위조된 여권으로 파리에 숨어든 비밀요원들에 관한 피튀기는 총격전 가득한 영화들이 있고,

또 다시 작가가 되어서 돌아온 에단 호크의 <파리, 5구의 여인> 같은 미스틱한 최신작부터, 내가 봐놓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영화들까지 전부 깡그리 몽땅 합해서 정말 많고도 많은 영화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파리를 이야기 하고 있다. 파리는 영화속에서 어느정도 낭만과 고급스러움으로 정형화된 도시인것이 사실이다. 물론 <테이큰>같은 영화를 보면 소름이 끼치지만 사람들은 <아멜리아>속의 파리를 기억하는데 보다 익숙할테니. 3년전, 피렌체에 가기전에 일부러 <냉정과 열정사이>를 찾아보았는데 감독이 피렌체 구석구석을 샅샅이 알고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장소 섭외가 자연스럽고 완벽했던 영화였다. 우연히 골목을 걷다가 영화의 배경이 된 몇몇 장소들을 맞닥뜨리고는 얼마나 기뻤던지. 예를 들어서 준세이가 자전거에서 내려서 들어가는 두오모 근처의 화방이나 준세이의 자취방이 위치한 언덕 같은 곳. 그런 애틋한 장소들을 파리에서도 맞닥뜨릴 수 있을까. 우연히 찾아갔는데 무슨무슨 영화가 촬영된 곳이라고 붙어있으면 정말 김샐것 같지만 말이다.


 

 


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서점에서 제시(에단 호크)의 책 'This time'의 출판 기념으로 저자와의 대화 행사가 열린다.

실제 이 서점은 론니플래닛에도 사진까지 첨부되어있어서 바로 지도에서 찾아보았는데 생 미쉘 노트르담 역 근처 5구의 번화가에 위치해있다. 우리가 살게 될 5구의 rue poliveau 에서는 걸어서 일킬로가 넘는 거리지만 노트르담 대 성당이 가까우니깐 같은 날 둘러보면 될 듯. 영화 내내 제시와 셀린느가 대화하며 걷는 곳은 전부 5구가 배경인지 아님 마치 가까운듯 편집만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제시와 셀린느(줄리 델피)의 연대기라 이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비포 시리즈의 <비포 미드나잇>이 개봉했다고 하니 영화를 보기에 앞서 다시 한번 전작들을 찾아봐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비포 선셋>의 배경은 셀린느가 살고있던 파리였었고 제시와 셀린느가 나란히 걷는 파리의 모습도 다시 궁금해졌다.  <비포 선셋>이 개봉했을때는 왠지 전작의 느낌을 망칠것 같아 보기를 망설이다 꽤나 이후에 쭈뼛거리며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면 내가 지레 겁을 먹고 망칠것같다는 두려움에서 지키고자 했던 그 기분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영화 속의 허구를 현실속에서 끊임없이 갈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의 이상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같은 것. 제시와 셀린느가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은것과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셀린느가 반년후에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로부터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실제로 에단 호크는 그 사이에 책을 몇권이나 냈고 줄리델피는 각본에 감독까지 영화도 몇편을 찍었다. 제시와 셀린느가 나이를 먹은것 만큼 우리 모두도 나이를 먹었다.  젊은 남녀가 낯선곳에서 만나 하루를 함께 보내는 이야기. 보통 그렇게 만난 연인들의 이년 후, 칠년 후를 보여주면서 마치 확인 사살을 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영화들이 많지만  <비포 선라이즈>는 그 짧았던 시간과 감정을 용감하게 타임캡슐에 묻어버리고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영화였다. 그리고 그 보다도 열배는 짧아진 한시간 반의 여정을 담은 한시간 반짜리 이 영화를 플랫폼에서 이별하는 젊었던 그들을 상기시키며 불안한 마음에 봐야했던 이유는 이미 한번 헤어진 전력이 있는 모험심 충만했던 그들이 전만큼 젊고 이상적이지 않을지 모른다는 노파심때문이었다.  오랜시간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은 그들의 미세한 감정에 애틋해지기에는 나도 이미 나이가 들은걸까 하는 자괴감같은거. 마치 옛일이 기억나지 않는척 어물쩡 넘겨버리고 상대보다 솔직해 지는것을 경계하고 온갖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잡다한 이야기들을 촉박한 시간속의 대화속으로 애써 밀어넣으며 진심을 얘기할 기회를 호시탐탐노리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영리하게 변해버린 그들을 마주하는것이 어색했다고 해야할까.  9년전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모자르다는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속마음을 말하길 주저한다. '내가 여전히 너를 좋아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필요이상으로 현실을 푸념해야하고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악몽 이야기를 해야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그들.


 


 

제시와 셀린느가 서점을 나와 커피를 마시러 걸어가는 카페. 실제로 서점을 나와 카페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아서 라틴지구의 지도를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다. 카페목록을 보니 엉뚱하게도 바스티유 지역의 11구에 위치해있는데 절대로 십분만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닌듯. 다행히 론니플래닛에 '비포 선셋을 촬영했었음'  따위의 설명은 어디에도 없으니 관광객으로 붐빌 가능성은 적을듯.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제시는 미국에도 이런 카페가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하고 감탄을 하고 뉴욕에서 공부를 했던 셀린느는  미국인들은 프랑스인들보다 훨씬 행복해보인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누리고 있는 일부를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면서 뭔가를 갈망하고 만족하는것은 그 욕망의 힘을 빌어 현실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인것 같다.


 


 

오랜시간 떨어져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대를 갈망했던 몇년의 시간. 하지만 내가 내 자신의 열쇠구멍을 통해서 바라보는 나의 인생속에서 나와 함께 부대꼈던 수많은 인간관계들이 내가 현실을 등지고 전혀 다른것을 갈망하는 사이에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제시의 부인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혼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행복하지 않은 현실을 등지고 각자의 길을 가는것은 자신의 감정을 희생하고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보다 훨씬 솔직하고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누가 누굴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문제가 아닌 앞으로 사랑해야하고 지금 현재 갈망하는것에 대한 진실함의 문제일지도.


 

 


부인이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임신을 해버렸고 그래서 결국은 결혼을 하게됐다고 마른 빵 씹듯 설명하는 제시의 모습은

결혼을 한 사람의 입장으로써 여전히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로맨틱한 남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9년의 사랑을 간직한 제시와 셀린느의 모습에서 정말 로맨틱한 변치 않는 사랑의 감정만을 느낄까? 또 다른 9년이 흐른 후 <비포 미드나잇>에서 그들이 나눌 이야기가 궁금한 이유는 바로 그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야하는 어른으로 남을까.

아니면 9년전의 솔직한 감정을 겁내지 않으며 하루보다 한시간보다 더 긴 여정을 공유하는 어른이 되어갈까. 


 

 


출판된 소설이 자전적인것이냐는 질문에 제시는 선뜻 긍정하기를 망설이면서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열쇠구멍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본다고 둘러말하며 자신의 이야기임을 인정하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너무 드라마틱하고 이상적으로 써내려간것이 아니냐는 셀린느의 말에는 이건 문학작품인데 그럴 수 밖에 없다며 망설임없이 반박한다. 살면서 과거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추억만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이 언제든지 꺼내놓고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들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보통의 현실에서 아름다운 추억은 전부 과거가 되어버리니 오늘이라는 현상만으로 살아간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서점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눈을 마주친 그 짧은 순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든가와 상관없이 그들은 결국 빈의 음반가게와 공원 속 같은 그들만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밖에는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지만 이미 아무도 다른곳으로 서두르지 않는다. 제시가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출발했다고 해도 9년전처럼 대책없이 헤어져버리기는 이미 불가능해보인다. 그저 가슴속에 묻어놓고 생각날때마다 꺼내보면 아름다운 추억임이 분명한 과거이지만 그런 기억을 둘만 아는곳에 묻어놓고 무작정 현실을 위로하며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하루보다 한시간보다 훨씬 더 짧은 놈이니깐.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