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01.13 <만춘> 오즈 야스지로 (1949)
  2. 2013.01.10 <도쿄 스토리 > 오즈 야스지로 (1953)
  3. 2013.01.06 <생활의 발견> 홍상수 (2002)
  4. 2012.06.23 <만추> 김태용 (2010)
Film2013.01.13 09:44

 

 

<만춘>

 

6년전인가 이 영화를 하얼빈의 기숙사에서 처음 보았다.

복제디비디를 쌓아놓고 파는 가게들이 몇군데 있었는데 단속이 뜨면 며칠이고 장사를 안해서

혹시라도 문을 닫을까봐 진심으로 걱정하곤 했다.

영화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었지만 대략 6위안이면 고화질의 영화 DVD 를 살 수 있었는데

그때 운좋게 구입한것이 바로 크라이테리언 콜렉션의 이클립스 시리즈중 '오즈 야스지로' 시리즈였다.

<이른 봄>,<가을 햇살,<여름의 끝>,<피안화> 그리고 <만춘>

예술 영화관에서 회고전이라도 열지 않으면 볼 기회가 없는 이런 영화들을

'아 너 또 왔구나'라는 표정으로 까먹던 해바라기씨를 기계적으로 쓱 밀어내고는  검은봉지에 주섬주섬 싸주시던 아줌마.

산더미처럼 싸인 비닐 포장된 디비디들을 계속 넘기다보면 어느새 손가락이 새카매졌다.

이미 누군가가 공들여서 골라놓은것이라는것,누군가가 그 희소성에 값을 매긴다는것이 난 오히려 다소 찝찝하지만

크라이테리언 콜렉션이 매력적인 놈들인것은 분명하다.

해적판이긴 하지만 이미 13편이 내 손안에 있다. 음 한번 마음먹고 찾아봐야하는건가?

물론 특정 영화들이 콜렉션 마크를 달고 다시 릴리즈되는것 뿐이지

일부러 cc(criterion collection)마크가 달린 수백편의 영화를 수집하는것은 수집벽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미친짓같다. 으흠

물론 크라이테리언 콜렉션에서가 아니면 보기힘든 영화들이 대부분이긴하지만

예를 들어서 <아마겟돈>이나 <첩혈쌍웅>처럼 그냥도 구할 수 있는 영화를

단지 크라이테리온 마크 때문에 수집하는것은 무의미하다 소리.

 

<만춘>은 첫번째로 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였는데 마음에 들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떤 시적인 지루함이랄까.

영화의 산문성에 길들여져있던 우리에게 오즈는 영화라는 시를 읽는 즐거움을 가르쳐준다.

 

 

별로 안 친한 사람이랑 단 둘이 남겨졌을때 보통은 난처해한다.

사람들은 정적을 두려워하고 대화의 단절을 피하려 무던히도 애쓴다.

의미없는 농담과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이 오간다.

운이 좋으면 그런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은 공감을 얻고 가까워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서로에게 잊혀지는 존재로 남는다.

우리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을때도 가끔은 침묵의 순간이 온다.

결코 깨뜨려버리고 싶지 않은 정적,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을 대신 전달해주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같은것.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오즈의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은 한정되어 있다.

상점의 간판이라던가 자연 경관. 등장인물들이 앉아 있는 식탁씬.

그 모든 장면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오즈 야스지로 답다고 느끼는 장면은 바로 이런 복도씬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침묵중에서도 가장 견고하고 순수한 침묵.

인물들이 함께 있다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후 혼자가 될때 그들의 머릿속에 점점 차들어가는 공기 같은것.

복도는 장소와 장소를 분할하는 공간이면서 인물들이 헤어지고 만나고 교차하는 감정의 섬 같은곳이다.

 

 

딸에게 자신의 허전한 속마음을 숨긴채 창밖을 내다보며 '오늘도 날씨가 좋겠구나'라고 딴소리하는 아버지와

외동딸을 시집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타월을 정리하며 이제 혼자가 됐음을 실감하는 아버지.

상대에게 자신의 진심을 들키고 싶지 않을때에도  인물이 관객에게 가장 솔직해지려 할때에도

감독은 그들을 복도 한 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그 침묵속에서 관객과 인물들은 홀연히 마주하고 그곳에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공통의 정서같은것이 있다.

 

 

<도쿄 스토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치슈 류와 세츠코 하라는 홀아버지와 외동딸을 연기한다.

일찍부터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했던건지 외동딸 노리코는 때로는 깍쟁이 부인이 남편을 대하듯 아버지를 뒷바라지 하고

아버지에게도 딸은 이미 보살펴야 할 존재가 아니며 딸의 관심과 간섭은 그에게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다.

<도쿄 스토리>를 보고 나서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여러가지 재밌는 부분들이 있다.

부인을 떠나보내고 출가하지 않은 외동딸과 남게되는 도쿄 스토리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시집가면 남은 아버지는 누가 돌보냐며 그래서 엄마가 더 오래 살기를 바랬다고 말하는 큰 딸.

 그런 큰 딸의 현실적인 고민이 바로 <만춘>의 기본적인 뼈대가 된다.

나이가 찬 딸을 시집 보내려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은 딸.

그런 딸의 심정을 알기에 자신도 재혼을 할거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묘한 질투와 상실감을 느끼는 딸.

 

 

마치 토라진 연인처럼 돌아서서 저만치 멀어져가는 딸의 뒷모습을 묵묵히 감내하는 아버지.

결혼을 하고 나서 다시 영화를 보니 이런 장면에서는 울컥했다.

시집을 가고 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이라면 노리코는 아버지의 재혼에 관대해질 수 있었을까.

아마 그때는 아내처럼 아버지를 돌본 아내같은 입장에서가 아니라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향수때문에라도

재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것 같다.

 

 

딸이 자신의 제자와 결혼하기를 기대하는 아버지이기에 그와 자전거를 탔다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뛸듯이 기뻐하지만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몹시 실망한다.

노리코가 결혼을 망설였던 이유가 단지 홀아버지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스스로 질투심이 많은 여자라고 말하는 노리코에게 있어 호감을 느꼈던 남자가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은 상처였을것 같다.

질투에 관한 노리코와 하토리의 대화는 서로의 감정에 솔직해 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의 말장난 같아 인상깊었다.

 

-넌 내가 어떤 여자라고 생각해?

-질투가 많은 여자일것 같지는 않아.

-반대야. 내가 피클을 자를땐 항상 두개가 달라 붙어서 안떨어진다구. 그건 내가 질투심이 많다는 소리야

-그건 너가 칼을 쓰는 방법과 도마의 문제이지 피클과 질투심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

-그래서 너는 피클이 달라붙어 있는게 더 좋아?

-난 내 피클이 달라붙어있어도 상관없어.

 

자기가 관심도 없는 남자에게 여자는 자신이 어떤 여자같아 보이냐고 묻지도 않을것이며

남자 역시 자기가 관심없는 여자라면 굳이 왜 질투심에 대해 언급했는지 궁금하다.

남자에게는 이미 정해진 결혼상대가 있었던것 같고 하토리 역시 노리코를 좋아했을지 모른다.

마치 내가 질투를 하더라도 내가 곁에 있는게 좋겠어? 어 나는 그래도 상관없어.라고 말하는것 같다. 

나의 억측인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노리코는 똑같은 상황에 놓여있다.

달라붙은 피클처럼 아버지를 떠나고 싶지 않은것.

결혼을 하려는 남자와 재혼을 생각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노리코는 딸이 아닌 여자로써 자존심이 상했을것이다.

 

 

혼기에 찬 당시 여성들의 결혼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노리코는 결혼에 무관심한척하지만 동창생들의 결혼소식에 민감하고

이미 이혼을 한 아야는 노리코에게 일단 결혼을 하고 싫으면 이혼을 하라는 조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있지만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거라고 말하는 타이피스트 아야.

야구로치면 일회말을 끝냈을뿐 이혼했다고 내 인생이 끝난것은 아니라고 말할정도로 당당하다.

반면에 노리코는 재혼을 한 삼촌을 불결하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재혼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합리화한다.

 

 

결혼을 결심하고 아버지와 교토로 여행을 떠나는 노리코.

결혼을 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남겨지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다.

아직 결혼에 확신이 없는 딸에게 아버지는 결혼과 인생에 대한 생각을 담담하게 얘기한다.

결혼에서의 행복이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서 꾸려나가는 그 과정에 있는것이지 일시적인 감정같은게 아니며

행복은 기대하고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오즈의 영화속에서도 인물들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지만 그 갈등들은 신경질적인 불행의 뉘앙스를 주지 않으며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과 기쁨 역시 결코 해피엔드라는 인공적인 결말의 동의어는 아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행복은 어떤 말초적인 기쁨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부딪쳐서 경험 해야 할 현상의 일부인 것인가?

행복이 불행의 반의어가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이 될 수도 없을것이다.

그것은 불행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험해야 할 또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때가 되면 변하는 계절처럼 우리가 부딪쳐야 할 인생의 여러가지 모습중 한 부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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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3.01.10 05:40

 

 

<도쿄 스토리>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서는 머리를 감았다. 갑자기 금새 졸음이 밀려올까봐 커피도 끓였다.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해의 운명이 결정된다고들 하는데 연말에 거의 잠을 자지 않아서일까 왠만큼 늦은시각이 아니어서는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년에 현빈 탕웨이 주연의 <만추>를 보고서는 (물론 전혀 다른 만추이지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진지하게 찾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가지고 있던 영화 말고 얼마전에 <안녕하세요>와 <도쿄 스토리>를 찾아 보는데 성공했다. <도쿄 스토리>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란것을 알기 전에 난 이 영화를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통해서 알게되었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에디가 경마장에 함께 가기위해 윌리의 집에 오는 장면이 있는데 에디는 윌리의 사촌동생 에바에게 호감을 느끼고 에바를 함께 데려가길 원하지만 놀러온 사촌이 귀찮기만한 윌리는 거절한다. 그때 그날 출전하는 경주마에 대한 정보를 에디가 읽어주는데 그때 등장하는 경주마 중 하나가 '도쿄 스토리'이다. <천국보다 낯선>을 워낙 여러번 봤기도했었지만 일상적이고 무미건조한 대화가 주를 이루는 그 영화에서 '도쿄 스토리'라는 이름의 경주마는 퍽이나 인상적이었는데 사실 그때는 짐자무쉬도 일본을 동경하는 서양인의 정서를 이런식으로 표현하는구나 지레 짐작했었지 그것이 어느 일본 감독의 영향을 받아서일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다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이 영화도 역시 담담하게 한 가족의 일상을 담아낸다. 자신의 여러 영화에서 개별적으로 다루던 소재들을 한데 모아놓은듯한 느낌도 준다. 결혼하지 않은 딸, 말썽피우는 아이들, 얄밉게 구는 딸, 자식에 대한 애환을 얘기하는 노년의 남자들 등등. 정말 이것이 영화의 소재가 될만한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다 싶은 일들을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갈등없이도 심지어는 미묘한 긴장감까지 주며 두시간 넘게 끌어갈 수 있는것, 그 '아무것도 아닌것'같은 일들에 대해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역량이 아닌가 싶다.

 


 

출가하지 않은 막내딸과 함께 오노미치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노부부는 도쿄에 사는 자식들을 방문할 생각에 들떠있다.

장남에게서 초등학생 손자가 있지만 도쿄에는 아직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가보다. 큰 아들과 큰 딸, 둘째 아들과 사별하고 혼자 살아가는 둘째 며느리가 도쿄에 산다. 자식들 대부분이 대도시에 자리 잡은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노부부 자신도 자랑스러워한다.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열심히 에어쿠션을 찾는다. 도쿄까지 가려면 장거리 열차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여행준비하는 부인 옆에서 무심한듯 앉아서 책을 읽는 남편도 설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싱크대부터 탁자까지는 세발자국, 현관부터 마루까지는 몇발자국이라고 동선을 계산하듯 지극히 절제된 동작으로 연기한다. 그 절제된 동작들은 흑백영화라는 틀속에서 더욱 최소화되고 정적으로 변한다. 카메라는 마치 게으름을 피우듯 고정되어있고 그런 제한된 프레임속에서 배우들은 그냥 조금씩 꿈틀거린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거리와 간판, 도시와 산들이 정물화가 되어 나타난다. 칠순에 가까운 나이의 아버지를 연기한 류 치슈는 다른 영화에서보다 훨씬 덜 가부장적인 모습이다. 조금은 뭉그러져서 동글동글해진 아버지들의 모습이랄까.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것 같아 마음 졸이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머물곳을 찾다 아내와 헤어져서 친구들을 만나지만 술에 취한 친구까지 데리고 인사불성이 되서 찾아오는곳은 다름 아닌 딸의 집이다.  미용실 의자에 고꾸라져서 딸이 중절모로 그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에서는 우리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했다.


 


 

류 치슈의 큰 딸로 나오는 이 배우는 <안녕하세요>에서도 험담하기 좋아하고 친정 엄마조차  못마땅해하는 딸로 나왔었다. 남편이 장인장모를 위해 비싼 과자를 사와도 뭐하러 돈을 쓰냐고 면박을 주고 시내구경을 시켜줘야하는것 아니냐고 제안해도 오빠네가 알아서 할것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되려 무안을 준다. 남자 형제사이에서 자란 딸들은 약간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있는것 같고 그들의 남편들 또한 약간은 우유부단하다. 노부부는 딸이 결혼을 하고 나더니 이상해졌다고 말하고 막내 딸은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유품 생각만 하는 언니가 못마땅하기만하다. 그래도 또 둘째며느리는 출가한 여자의 입장에서 첫째 시누이를 두둔한다. 류 치슈와 함께 오즈 야스지로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하라 세츠코가 둘째 며느리역을 맡았다. 첫째 며느리를 연기한 배우가 정숙한 고전적인 여성상을 몇차례 연기했다면 하라 세츠코는 여성적이고 섬세하면서도 똑부러진 세련된 여성상을 연기했던것 같다. 

 

 


 영화 <만춘>에서 출가하지 않은 딸과 홀아버지를 연기했던 이 두배우는 남편과 사별한 며느리와 시아버지를 연기한다.

가장 극적인 스토리를 가진 등장인물로써 시부모와 죽은 남편의 형제들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아준다. 의사가 된 든든한 장남과 미용실을 하는 천덕꾸러기같은 딸, 오사카에사는 얼굴보기 힘든 막내아들, 그 어떤 자식보다도 생각할 수록 안타깝고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며느리이다. 노부부의 도쿄 여행에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은  노리코(하라 세츠코)의 집에서 사진속의 죽은 아들을 맞닥뜨렸을때.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위로같았다.


 

 


동네 의사인 큰 아들에게 갑자기 급한 환자가 생기는 바람에 도쿄 시내 구경은 둘째 며느리가 맡게된다. 이 장면에서도 여러모로 <천국보다 낯선>에서 에디와 윌리, 에바가 에리호수를 방문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에디와 윌리는 도박에서 번 돈을 들고 에바가 있는 클리블랜드로 떠나는데 그때 에바가 구경시켜주겠다고 데려가는곳이 바로 꽁꽁 언 에리호수이다. 두 영화의 비슷한 점을 찾는것은 무의미할 지 모르지만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 또 하나의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것은 경이롭지 않은가. 섣부르게 흉내낸 스타일과 철학으로 보는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어떤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말이다. 오노미치를 떠나 도쿄에 도착해 아타미에서 오사카 다시 오노미치로 돌아오는 노부부의 여행. 헝가리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클리블랜드와 플로리다를 거쳐 홀연히 헝가리로 돌아가는 에바의 여행. 다 큰 조카를 어린애다루듯 하느라 티격태격하는 에바와 롯데고모. 느닷없이 찾아온 사촌 동생이 못마땅해서 괜히 까칠하게 구는 윌리와 이 모든 헝가리 이민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미국인 에디.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가장 어려운 관계이기도 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속에서 이들은 때로는 푸념하고 속상해하지만 결국은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것으로 스스로를 달랜다.


 

 


자식들과 함께있는것 자체에 행복감을 느끼는 노부부이야기일것만 같지만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이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삶을 사는것같아 속상하다. 장남의 집이 도쿄 시내에서 떨어진 교외라는것도 그냥 동네 이웃집 의사 선생님 같아 보여서도 실망한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자식이 잘되면 그것으로 보상심리를 느끼는걸지도 모르겠다. 자식덕을 보려는게 아니라 단지 당신이 항상 자식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을 하기때문인것 같다. 일본인들의 실제 성격인지는 모르지만 영화속의 부모 자식의 관계는 왜 그리 어렵고 대면대면해보이는지.  그나마 서로에게 부채질을 해줄때에나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하듯 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장례식을 계기로 이들은 도쿄가 아닌 오노미치에서 다시 한번 모인다. 큰 딸은 사실 엄마보다는 아빠가 먼저 돌아가시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혹시 모르니깐 상복을 챙겨가야겠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는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임종앞에 눈물은 흘리지만 그게 설마 부모의 죽음을 대하는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이 부모 생각처럼 자라주길 바라는것은 부모의 욕심이고 자식들이 변해가는 이유는 도쿄에 사람이 많아서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부모의 모습은 씁쓸하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고 스쳐지나쳤을 부모님의 수만가지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3.01.06 08:54

 

 

<생활의 발견>

 

무릎팍도사에 김상경이 출연했다.

김상경이 게스트로 출연했던 개그콘서트의 <생활의 발견>편을 떠올려보면 토크쇼 출연이 그렇게 뜬금없는것 같진 않다.

단지 <생활의 발견>속의 김상경은 속된말로 찌질했어도 수다스럽진 않았는데.

김상경의 입담에서 박중훈의 위트를 기대했던것이 사뭇 민망해졌다.

김상경 스스로는 자기가 정우성과 송강호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배우같지 않냐고 되물었는데

물론 도사들은 그 중간에 이병헌이 있지 않나요 하고 받아쳤지만. 하하하.

김상경은 자신이 가진 평범하고 생활 밀착적인 캐릭터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했던것 같다.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거나 살인을 할 만한 극적인 캐릭터가 사실 그에겐 없다.

송강호는 정우성보다 분명 못생겼지만 <뱐칙왕>의 무능력한 회사원을 연기해도 그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김상경은 검사에 의사까지 엘리트를 연기해도 그냥 그런 좋은 직업을 가진 평범한 남자 같다.

아마도 <생활의 발견> 출연후에 결정적으로 그런 캐릭터가 생겨난것 같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도 분명 아무나 가질 수 있는것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가 모든 배우들의 로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배우들에게 궁금한 감독인것은 분명한 사실같다.

배우들은 왜 홍상수의 영화에 출연하는것일까.

이미 연기했던 배우들이 그의 독창성과 실험성을 칭찬해서?

찍기만 하면 해외영화제에 초청되는것이 분명하니깐?

그의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배우들은 촬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감독은 그 배우들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고

자신의 모습을 일부 그들에게 투영하면서 보편성을 추출해내고 관객의 공감을 얻어낸다.

하나의 영화에서 다음 영화를 예고하는 동시에 그 이전의 또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게끔 하는 그의 영화는

어찌보면 단 한번의 결말도 없이 지금도 계속해서 방영되는 무슨 연말 연속극 비슷한것 같다.

배우들은 두세편의 터울을 두고 바뀐다.

마치 하나의 자아에 사형선고를 내리듯 첫번째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결국은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모두 공통된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고만고만한 등장인물들 사이에도 성숙의 정도에 따른 차이가 분명 있다.

마치 유충과 성충, 그들이 벗어놓고 떠나는 빈 껍데기 사이의 차이만큼 말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몇개의 굵직한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로드무비이다.

근데 그 로드무비는 마치 기록영화같다.

대개 영화를 찍거나 연기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작업을 끝냈거나 또 다른 작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여행을 계획한다.

마치 산란기를 맞은 물고기들을 따라 이동하는 낚시꾼들처럼, 어쩌면 등장인물 자신이 교미기에 처한 물고기들 인지도 모른다.

 갈등이나 전개 결말같은 극적인 요소가 결핍된 이 영화들은 연말 연속극이라기 보다는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같은 프로그램이나 <마이크로 코스모스>같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는 거대한 곤충을 통해서 감독이 얘기하고 싶은것은 혹시 배설의 미학이 아닐까.

 

 

이런 장면은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컷처럼 소주컷으로 불러도 문제가 없을것 같다.

의도된 만남과 술자리속에서 고기에 양파에 고추장에 이것저것 얹어져 입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상추쌈은

마치 배설직전의 의식같다.

게임에 질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는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달콤한 로맨스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조그만 체구에 초록색니트를 매끈하게 빼입은 선영의 모습은 혹시? 하는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혹시는 귀까지 빨개져서 호텔에서 카드에 서명을 하는 유부녀의 모습을 통해 역시로 바뀌지만.

유부녀의 잠자리 상대가 되었다는 열등감과 춘천에서 딴 여자와 놀아나는 그 유부녀의 교수남편에 대한 열등감까지 합해져서

경수의 집착은 극에 달하고 그 집착은 치밀하다 못해 찌질하다.

마치 달밤에 체조하듯 대낮에 술에취해서는 감까지 첨부해서 선영의 남편에게 협박편지를 쓰는것.

여주인공들이 남기는 유치한 편지들이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명숙의 말도 또 다른 집착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하며 쾌감을 느끼는 속물들.

그럼에도 경수는 선영과의 관계에 있어서 잠자리 이상의 어느정도의 의미부여를 원했던것 같다.

선영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자신의 학창시절과 그가 기억났다고 말했으나 실제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그의 기억속의 선영에

감상적으로 집착한다.

 

 

 

경수의 선배가 청평사로 가는 배속에서 들려주는 회전문에 얽힌 설화는 사실 좀 웃기다.

당태종의 딸을 짝사랑한 남자를 당태종이 죽였는데 그 남자가 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을 꽁꽁 감쌌단다.

도사가 그 뱀을 떨쳐버리려면 조선의 청평사로 가라고 해서 청평사로 오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쳐서 뱀이 놀라서 도망가는데 그때 뱀이 돌아간문이 회전문이라는.

영화의 영어 제목도 'turning gate'이다.

보통 설화들은 애절하다못해 가슴 아프지만 뱀으로 까지 환생한 짝사랑남도 그렇고

그 뱀을 떨쳐버리려고 청평사까지 오는 공주도 웃기다.

웃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는 순간의 연속이다.

마치 오래된 연인들이 결혼 전에 그러듯 경수는 선영을 끌고 보살의 집으로 들어간다.

보살은 굳이 점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선영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구실을 찾아보려는 경수의 의도가 눈물겹다,

마치 공주의 몸을 칭칭감고 떨어질줄 모르는 그 뱀처럼.

결국 경수는 보살에게 좋은 소리 못듣고 선영과의 관계의 어떤 당위성도 부여받지 못한다.

지갑을 가지러 간 선영은 돌아오지 않고 갑자기 천둥번개까지 치기시작한다.

그리고 선영의 집앞에서 경수는 씁쓸히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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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2.06.23 06:40

 

 

휴일. 오후 12시까지 늘어지게 자도 자도 뭔가 모자른 것 같은 잠이다.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는데 사실 리투아니아에는 많은이들로 하여금 동시에 두통을 느끼게 하는 그런 날씨가 있다.

몹시 흐려서 하늘이 8층 건물 바로 코 앞까지 내려 와있는 듯한 그런 날씨.

구름이 모든이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나무들은 일제히 차라리 비를 내려줘 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은 그런 날씨이다.

<만추>는 지난달 쯤에 본것 같은데 영화 파일들이 자리는 차지하는데 그렇다고 지우기에는 아쉬운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내가 배우라면 이런 영화에 출연할 수 있어서 행복했을것 같다.

오로지 그 배역과 그 배역을 선택한 그 배우를 위한 영화.

관객은 영화를 비평하고 비판할 선택권도 없이 옅지만 진득하게 채색된 누군가의 이야기를 눈으로 듣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한번 보고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애써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 주인공에게 미안해진다고 해야할까?

예를들어서 <영원한 휴가> 혹은 <파니핑크>같은 영화도 그렇고,

심지어 <히트>의 알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 역시 잊기 힘든 배우 그리고 등장인물들 중 하나이다.

그러니깐 계속해서 자꾸자꾸 반복해서 보게 된다.

혹시라도 내가 놓친 그들의 또 다른 표정이 있지 않을까 해서. 

원작인 이만희의 <만추>는 보지 못했지만 김혜자와 정동환의 <만추>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혹시 마더에서 김혜자가 들판에서 혼자 춤추는 장면을 보고 오그라들었던 사람들에게 <만추>속의 그녀를 만나 보기를 권한다.

굳이 오그라 들 필요가 없었다는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드라마가 아닌 영화속의 김혜자는 항상 그런 원시적인 모습이었던것 같다.

혹시 그녀는 드라마와 다시다 광고에서 형성된 어머니의 모습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제목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즈 야스지로의 계절 시리즈도 계속 머리에 맴돈다.

그 절제와 여백의 미 같은것은 닮은 구석이 있는것 같다.

다시 한번 찾아서 봐야겠다.

 

 

나는 탕웨이가 좋더라.

영화 줄거리 상 탕웨이 역은 중국어와 영어를 하는 탕웨이가 했어야 했겠지만 습관처럼 다른 배우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저런 느낌을 주는 바바리코트를 찾다 찾다 못찾아서 직접 제작했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는데

저 바바리코트가 저만큼 어울리는 배우를 한국에서 찾는다면 누가 있을까.

자기에게 맞는 배역을 못찾아 아직 크게 뜨지 못한것 같은 도가니의 정유미?

추상미는 요새 뭐하지?  장진영이 살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등등등

아니 어쩌면 우리가 탕웨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것이 적어서 감정이입이 더 잘된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탕웨이의 감정이입을 도운것은 시애틀의 날씨와 저 바바리코트가 아니었을까.

버스로 변하는 시애틀의 유람선도

뜬금없이 찾아들어가는 그리스 레스토랑도

관광코스로 변하는 상가도

남은 인생에서 확실한 것이라곤 이틀 후에 돌아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것뿐인 여자와

낯선 여자에게 시계를 채워주고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기약하는 남자에게는

그저 낯선 풍경일 뿐 추억이 되지는 못한다.

모든 배경과 대사와 등장인물들이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과거사를 무덤덤하게 풀어내는 탕웨이를 앞에두고 장난인지 진심일지 모를 말투와 표정으로 

부정과 긍정의 중국어로 응수하는 현빈.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현실을 직시하고싶은 탕웨이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현빈의 영어에 대해서 뭐라고 말들을 많이 했을것 같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극중 현빈은 영어를 굳이 잘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나름의 자기 영어로 투박하게 한 연기는 너무 좋았던것 같다.

한국내에서 워낙에 자연스럽게 영어를 들을 기회가 없는 한국인에게

미국인처럼 영어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되는 현실은 사실 좀 불행하다.

사실 얼마나 많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국어의 억양을 바닥에 깔고 자신있게 자기 영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삼순이도 시크린 가든도 제대로 보지 않아서 아직까지는 만추 한편이 현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란 드라마도 한번 보고 싶다.

배우들은 자기들이 가진 이전의 이미지를 어떤식으로든 깨어버리고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길 원하지만

관객은 오히려 배우의 이전 캐릭터의 도움으로 그 배우가 연기하고자 하는 새로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는 그 배우가 연기한 배역만을 보고 살아왔으니깐.

 

 

마치 저녁식사를 주관하고 있기라도 한듯 식탁 정중앙에 떡하고 버티고 앉아있는 현빈이다.

모두가 평소에 입지 않는 옷을 차려입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엄숙해져야만하는 장례식 저녁식사.

애나와 왕징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과

임신한 아내와 옛사랑 애나를 동일한 시야에 둬야하는 왕징.

발꿈치에 굳은살도 없을것 같은 캐릭터. <에이 아이>의 쥬드 로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한 현빈에게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이다. 

 모두 자기자리에 앉아서 아슬아슬하게나마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인데

남자 둘 만 남게되자 마치 시소가 가라앉듯 균형이 깨진다.

 

 

네가 그리고 내가 괜히 남의 포크를 써서 (내 인생만 결국 이렇게 된것 아니야)

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다.

그렇게 나마 애나는 왕징을 원망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는 대답을 얻어내고자 함은 아니었을것이다.

어쩌면 이미 아주 오래전 남편에게서도 왕징에게서도 자신의 과거에서 떠나버린 애나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회상은 더이상 살아 갈 삶이 남아있지 않을 경우에만 의미있는것 같다.

남은 인생을 의미있게 살아가려면

돌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야하고

떠나가는것을 붙잡지 말아야하나보다.

익숙하지 않은 귀걸이에 귓볼이 가려우면 그냥 귀걸이를 빼버려야 하는것처럼.

 

 

계절은 우리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같은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남은 계절의 햇수를 바보처럼 헤아려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자리에서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그런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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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