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7.01 <텐텐 轉轉 Adrift in Tokyo> 미키 사토시 (2007) (1)
  2. 2013.01.10 <도쿄 스토리 > 오즈 야스지로 (1953)
Film2013.07.01 02:57

 

 

<텐텐 轉轉>

 

하얼빈에서 1년반정도 기숙사 생활을 한것말고는 혼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자취생활에 대한 로망같은게 있다.

자취생활을 무턱대고 동경하는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불가피했지만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이랄까?

갈 곳 없이 방황하다 얼떨결에 정착해버린듯한 <바그다드 카페>의 장기투숙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하숙생들이고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도 <천국보다 낯선>의 윌리도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도 근본적으로는 모두 자취생들이다.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이 누리는 특유의 자유로움과 고독에 익숙한 생활방식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짧은 시간 만끽했던 기숙사 생활과 간간히 떠났던 여행에서 머물던 싸구려 호스텔에서의 기억으로나마

그들과 1제곱미터만큼의 공통점이라도 가진것에 만족한다.

 

 

카뮈의 소설 <행복한 죽음>에서 메르소가 프라하의 싸구려 여인숙에 앉아있던 장면이 떠올라 책을 꺼내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그 한심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게 그의 유일한 재산인 셈이었으니 그 방을 넘어서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회색 바탕에 커다란 노란 꽃들이 그려진 구역질나는 양탄자에는 뗏국의 지도가 끈적거리는 가난의 세계를 그려놓고 있었다.'

자취라는 놈의 유전자 지도는 모르긴해도 그때 메르소가 독대한 양탄자속의 뗏국의 지도와 비슷한 놈일지도 모른다.

후미야(오다기리 죠)가 널부러져있는 다다미방 어딘가에 펼쳐져있을 곰팡이의 지도처럼.

 

 

<건축학 개론>의 압서방파 선배처럼 부모님이 얻어준 원룸에서 희희낙락하는 고급스러운 자취생활은 일종의 돌연변이이고

우리는 보통 이런 모습의 자취생들에 익숙하다.

독립의 개념이 아직은 미미한 우리나라에서 서울 출신학생들이 보통은 부모님과 함께 살며 통학하는것처럼

도쿄에 사는 도쿄 태생의 젊은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졸업을 앞둔 취업 준비생 후미야는 도쿄에서 나고 자랐지만 마땅히 의지할 사람없이 혼자서 살아간다.

 어릴때 놀이동산에 갔다거나 가족끼리 삥둘러서 저녁을 먹는다거나 하는 평범하고도 살가운 추억이 없는 후미야. 

그리고 빚을 돌려 받아야겠다고 갑자기 들이닥친 아버지 또래의 이 남자에게 양말을 입에 물린다.

 

 

이 남자는 밀린 빚을 대신 받으러 다니는 용역직원일까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인걸까.

호모 영감한테 40번만 몸을 팔면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위협처럼 후미야는 수단과 방법 안가리고 돈을 구하러 다녀야 할까?  

'삼색치약을 사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후미야의 독백.

후쿠하라 (미우라 토모카즈)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만해도 후미야는 이 삼색치약에라도 의지할 여유가 있었다.

 

 

엉덩이에 뭉개져 뿜어져나온 치약.

방금까지 삼색치약을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후미야는 궁지에 몰렸다.

이 첫 장면에서부터 미키 사토시라는 감독도 코엔 형제 만큼이나 재치있는 감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일안에 빚을 갚아야하는 최후의 통첩을 받았지만 고작 오락실에 가거나 학생들에게 모금함 수입이나 묻는 대책없는 후미야.

영화의 배경이 일본이 아닌 한국이었어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인것 같다.

대학 졸업생들에게 번번한 일자리도 보장하지 못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학교 못가는 아이들을 후원하는 정부와

학자금 대출로 궁지에 몰린 젊은이들의 취직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능력탓으로 돌리는 사회.

후미야는 늘상 어벙한 표정으로 웃고는 있지만 다리위에서 후쿠하라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장면에서

그의 불안한 미래와 암담한 현실을 느껴진다.

 

 

함께 팔짱끼고 다닐 여자친구도 최악의 상황에서 의지하고 손벌릴수 있는 부모도 없고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야하는 평범한 미래에 한발짝 내딪는것이 이렇게 어려울수가.

리어커 가득 파지를 싣고 경찰관들을 졸졸따라가는 구부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후미야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느낀다.

 

 

역 앞에서 우연히 주은 코인락커의 열쇠에 삼색치약에서 내동댕이쳐진 희망을 다시 걸어보는 후미야.

소원을 빌면서 한쪽 눈을 그려넣고 소원이 이루어졌을때 남은 한쪽 눈을 그려넣어야 한다는 달마인형.

후미야가 역무원의 눈치를 보며 코인락커의 열쇠를 돌릴때에

코엔 형제의 <그 남자 거기 없었다>의 에드 크레인의 대사가 떠올랐다.

'항상 마지막 열쇠를 돌리지 않아서 내 인생이 요모양 요꼴인걸까?'

그리고 열쇠를 돌리고 나서 에드 크레인의 인생은 꼬일대로 꼬이기 시작했다.

코인 락커의 열쇠를 돌리고 달마 인형이 가득 든 가방을 발견한 후미야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이 영화가 뻔한 스릴러물이라면 달마인형속에 누군가가 마약이라도 꽁꽁 숨겨놓았을지도.

 

 

하지만 후미야에게 닥칠 행운은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을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후쿠하라는 그와 함께 도쿄의 구석구석을 산책하며 목적지까지 함께 가주는 조건으로 후미야에게 백만엔을 제시하고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후미야는 장난같은 제안에 의아해 하면서도 후쿠하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자식이 없는 후쿠하라와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 밑에서 자란 후미야.

그들은 도쿄에서 각자에게 의미있는 장소들을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서로에 관해 조금씩 알아간다.

 

 

 '추억이 담긴 곳의 절반은 무인주차장으로 변해버렸어'

산책을 해야 성질이 풀리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시절 집에서 산책을 '성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후쿠하라.

후쿠하라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걷던 도쿄의 거리를 회상하고

후쿠하라 들려주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부모와 함께 화목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후미야에게는 낯설기만하다.

후쿠하라에게 도쿄는 나이가 들어서도 함께 걷기로 한 젊은시절 아내와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꿈꾸던것과는 다르게 변해버렸다.

자식이 있었더라면 많은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말하는 후쿠하라.

다 먹고난 꼬치를 후미야의 자켓에 던져 붙인다거나 신사에서 아무렇게나 물을 끼얹거나 엉덩이를 걷어차는등의 행동은 

어린 아들과 장난치는 아버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짧은시간 도쿄 곳곳을 걸으면서 후쿠하라와 후미야는 서로에게서 부모 자식간의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도쿄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 깨알같은 농담들과 에피소드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머러스한 이런저런 법칙들.

미키 사토시의 자전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났다.

 

 

특히 후미야가 자신과 호텔까지 같이 갔던 여자가 후쿠하라의 아내가 아니었단 사실을 알고 안도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장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계기가 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뭐랄까. 미키 사토시는 아주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자신의 기억과 습관들을 

마치 가장 친한친구에게 웃긴 이야기를 해주듯 자연스럽게 꺼낸다.

 

 

옷걸리를 머리에 끼면 머리가 자동적으로 돌아간다거나 

라코스떼 양말의 악어를 잘라서 폴로셔츠에 붙여 선물했는데 선물하자마자 떨어져서 망신을 당한 어린시절 기억이나  

 

 

'꿈이 뭐였니?'

'내각대신이요'

할때 다 익은 홍시가 민망하게 떨어진다거나

 

 

왜 여자 직장인들이 전부 지갑을 같은 방향으로 들고 신호를 기다리는지

 

 

왜 이런 아저씨들은 난로 옆에 모여서 전부 비슷한 자리를 만지고 있는지

 

 

이런 동네 시계방은 도대체 장사가 되는지 뭘 팔아서 먹고 사는지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했지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은 물음들을 실제 주인에게 물어보는 웃지못할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고지식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풍자하며 독특한 웃음거리를 만들어 내는데

후쿠하라가 거리를 걷다가 교회에서 라벨의 '죽은 왕비를 위한 파반느'가 흘러나오자 멈춰서서 지휘를 하는데

자전거를 타고가던 아주머니가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음악에 심취해 있는 그에게 경적을 울리며 비켜주길 기다리는 장면이다.

후쿠하라는 고지식한 아줌마에게 호통을 치고

결국 아주머니는 전용 도로에서 벗어나 자전거를 타고가다 자동차에 부딪혀 넘어지지만

정해진 규칙에 따라 운전한 자동차 운전자만 화를 낼 수 있을뿐.

엄격한 질서와 규칙에 익숙한 만큼 융통성없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뭘 먹어도 꼭 마요네즈를 뿌려먹는 사람이 있다니깐 하는 장면도 그렇고

 

 

며칠째 결근하는 직원집에 찾아가는길에 우연히 드라마 엑스트라를 하게 되는 후쿠하라 아내의 직장 동료들.

동료 걱정은 오간데없고 배우의 일거수 일투족에나 관심을 가지고

맛집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과 '신주쿠 엄마'라는 도사 앞에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손님 행렬.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데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나 맛집이나 유행에 민감한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가보다.  

 

 

가짜하객 노릇을 하다 알게된 여자집에 잠깐 그림을 봐러 가주는 장면도 그렇고

혈연으로 맺어진 끈끈한 유대감 대신 겉치레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는 도시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아내의 외도를 알고 홧김에 다투다 아내를 죽여버린 후쿠하라.

그의 도쿄산보의 최종목적은 카스미가세키의 경찰서로 자수를 하러가는것이다. 

추억을 공유하던 유일한 대상이었던 아내가 죽고 그는 마치 기억의 성지순례를 하듯 도쿄를 걷는다. 

 

 

후미야의 기억을 찾아 떠나는 부분에선 약간의 판타지가 가미된다.

이런부분에선 여러모로 <반칙왕>의 김지운식 유머가 떠올랐다.

 

 

코스프레에 연령제한은 없다는 할아버지가 사물함에서 물건을 훔치고 옥상에서 뛰어내려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난다거나

 

 

엠프를 가방처럼 메고 도시 한복판에서 전자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후미야가 따라가는 장면이나

 

 

피아노 분말 얘기가 나오는 만화를 읽으며 실없이 웃는다거나 

이 모든것은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대신 후미야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장치일 수도 있다.

 

 

가짜 하객으로 참여했을때 가짜 부인 역할을 했던 마키코의 집을 방문한 후쿠하라와 후미야.

후미야와 마키코가 장보러 간 사이 마루에 누워서 잠이 드는데

혼자가 된 후쿠하라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잠이 깨고 아무리 애를 써도 문은 닫히지 않고 벌어진다.

이것도 혼자 사는 마키코 집의 남편의 부재를 보여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후쿠하라와 후미야가 실제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부자지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해봤고

후쿠하라와 마키코가 실제 부부이고 후미야와 여동생을 낳은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정말 너무 행복해보이겠다라는 우리의 기대와 바램일뿐.

그들의 말처럼 현실과 이상은 다르니깐.

 

 

후쿠하라가 죽기전에 먹고 싶다고 한 요리는 카레였다.

카레를 끓이던 마키코는 처트니가 떨어진것을 알고 후미야에게 마트 심부름을 시키는데.

저녁에 카레를 먹는다는것을 알고부터 후미야는 우울해진다.

후쿠하라가 경찰서로 자수하러가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것을 눈치챈것.

가장 재밌는 프로도 끝나버린 일요일 저녁의 가장 우울한 시간. 그 이름모를 불안감.

후미야는 카레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대충 카레가 매워서 그렇다고 둘러댄다.

그리고 후쿠하라는 다 이해한다는듯한 표정으로 후미야를 쳐다본다.

나도 밥을 먹는데 슬픈 생각이 떠올라서 당황하며 눈물을 훔치며 밥을 먹었던적이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 눈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보통 보고도 못본척 먹던 밥을 계속 먹는다.

 

 

카레를 한번 만들면 보통 한 솥은 끓이는데 그렇게 끓인 카레를 먹을때마다 이 영화를 보았다. 

물론 아직 처트니는 한번도 안 넣어봤고 오늘 묽은 딸기잼을 넣어봤는데 달짝찌근한게 실제로 맛이 더 풍부해진것 같다.

카레를 하도 휘저었더니 손에서도 달콤한 카레 냄새가 난다.

후미야도 어쩌면 그 날 카레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으니 후미야의 기분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식이라도 있었으면 아내와의 관계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푸념하는 후쿠하라를 보고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들었다.

자식이 없는 부부의 삶은 정말 무료하고 허무해질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예전에 애기하마의 꿈을 꿨다.

 조그만 세숫대야에서 물을 마시며 고개를 돌려서 나를 처량하게 쳐다보고 있었던것.

나는 그 물고기들과 하마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야하는 상황이었는데

혹시라도 검역에 걸려서 동물 반입이 안되면 어쩌지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난 그때부터 동물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냐는 질문에 애기하마라고 대답한다.

그 하마랑 비행기를 같이 탔는지 미처 꿈을 꾸지 못해서 그냥 마음에 빚을 진 기분이다.

애기하마는 보통 3살이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고 큰 하마들처럼 몇십마리씩 무리를 지어 살기보다는

암컷과 수컷 한쌍씩 혹은 한마리씩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고 한다.

심히 내가 원하는 삶이다.

동물원에 앉아서 애기하마를 바라보며 마키코는 애기하마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애기하마의 삶은 후쿠하라와 후미야 마키코의 삶처럼 외롭고 적적한 삶일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여서 오늘 몹시 시시콜콜하게 텐텐일기를 썼다.

이곳의 일요일 저녁이 그다지 우울하지 않아 다행이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3.01.10 05:40

 

 

<도쿄 스토리>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서는 머리를 감았다. 갑자기 금새 졸음이 밀려올까봐 커피도 끓였다.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해의 운명이 결정된다고들 하는데 연말에 거의 잠을 자지 않아서일까 왠만큼 늦은시각이 아니어서는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년에 현빈 탕웨이 주연의 <만추>를 보고서는 (물론 전혀 다른 만추이지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진지하게 찾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가지고 있던 영화 말고 얼마전에 <안녕하세요>와 <도쿄 스토리>를 찾아 보는데 성공했다. <도쿄 스토리>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란것을 알기 전에 난 이 영화를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통해서 알게되었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에디가 경마장에 함께 가기위해 윌리의 집에 오는 장면이 있는데 에디는 윌리의 사촌동생 에바에게 호감을 느끼고 에바를 함께 데려가길 원하지만 놀러온 사촌이 귀찮기만한 윌리는 거절한다. 그때 그날 출전하는 경주마에 대한 정보를 에디가 읽어주는데 그때 등장하는 경주마 중 하나가 '도쿄 스토리'이다. <천국보다 낯선>을 워낙 여러번 봤기도했었지만 일상적이고 무미건조한 대화가 주를 이루는 그 영화에서 '도쿄 스토리'라는 이름의 경주마는 퍽이나 인상적이었는데 사실 그때는 짐자무쉬도 일본을 동경하는 서양인의 정서를 이런식으로 표현하는구나 지레 짐작했었지 그것이 어느 일본 감독의 영향을 받아서일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다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이 영화도 역시 담담하게 한 가족의 일상을 담아낸다. 자신의 여러 영화에서 개별적으로 다루던 소재들을 한데 모아놓은듯한 느낌도 준다. 결혼하지 않은 딸, 말썽피우는 아이들, 얄밉게 구는 딸, 자식에 대한 애환을 얘기하는 노년의 남자들 등등. 정말 이것이 영화의 소재가 될만한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다 싶은 일들을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갈등없이도 심지어는 미묘한 긴장감까지 주며 두시간 넘게 끌어갈 수 있는것, 그 '아무것도 아닌것'같은 일들에 대해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역량이 아닌가 싶다.

 


 

출가하지 않은 막내딸과 함께 오노미치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노부부는 도쿄에 사는 자식들을 방문할 생각에 들떠있다.

장남에게서 초등학생 손자가 있지만 도쿄에는 아직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가보다. 큰 아들과 큰 딸, 둘째 아들과 사별하고 혼자 살아가는 둘째 며느리가 도쿄에 산다. 자식들 대부분이 대도시에 자리 잡은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노부부 자신도 자랑스러워한다.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열심히 에어쿠션을 찾는다. 도쿄까지 가려면 장거리 열차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여행준비하는 부인 옆에서 무심한듯 앉아서 책을 읽는 남편도 설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싱크대부터 탁자까지는 세발자국, 현관부터 마루까지는 몇발자국이라고 동선을 계산하듯 지극히 절제된 동작으로 연기한다. 그 절제된 동작들은 흑백영화라는 틀속에서 더욱 최소화되고 정적으로 변한다. 카메라는 마치 게으름을 피우듯 고정되어있고 그런 제한된 프레임속에서 배우들은 그냥 조금씩 꿈틀거린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거리와 간판, 도시와 산들이 정물화가 되어 나타난다. 칠순에 가까운 나이의 아버지를 연기한 류 치슈는 다른 영화에서보다 훨씬 덜 가부장적인 모습이다. 조금은 뭉그러져서 동글동글해진 아버지들의 모습이랄까.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것 같아 마음 졸이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머물곳을 찾다 아내와 헤어져서 친구들을 만나지만 술에 취한 친구까지 데리고 인사불성이 되서 찾아오는곳은 다름 아닌 딸의 집이다.  미용실 의자에 고꾸라져서 딸이 중절모로 그의 머리를 때리는 장면에서는 우리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했다.


 


 

류 치슈의 큰 딸로 나오는 이 배우는 <안녕하세요>에서도 험담하기 좋아하고 친정 엄마조차  못마땅해하는 딸로 나왔었다. 남편이 장인장모를 위해 비싼 과자를 사와도 뭐하러 돈을 쓰냐고 면박을 주고 시내구경을 시켜줘야하는것 아니냐고 제안해도 오빠네가 알아서 할것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되려 무안을 준다. 남자 형제사이에서 자란 딸들은 약간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있는것 같고 그들의 남편들 또한 약간은 우유부단하다. 노부부는 딸이 결혼을 하고 나더니 이상해졌다고 말하고 막내 딸은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유품 생각만 하는 언니가 못마땅하기만하다. 그래도 또 둘째며느리는 출가한 여자의 입장에서 첫째 시누이를 두둔한다. 류 치슈와 함께 오즈 야스지로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하라 세츠코가 둘째 며느리역을 맡았다. 첫째 며느리를 연기한 배우가 정숙한 고전적인 여성상을 몇차례 연기했다면 하라 세츠코는 여성적이고 섬세하면서도 똑부러진 세련된 여성상을 연기했던것 같다. 

 

 


 영화 <만춘>에서 출가하지 않은 딸과 홀아버지를 연기했던 이 두배우는 남편과 사별한 며느리와 시아버지를 연기한다.

가장 극적인 스토리를 가진 등장인물로써 시부모와 죽은 남편의 형제들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아준다. 의사가 된 든든한 장남과 미용실을 하는 천덕꾸러기같은 딸, 오사카에사는 얼굴보기 힘든 막내아들, 그 어떤 자식보다도 생각할 수록 안타깝고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며느리이다. 노부부의 도쿄 여행에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은  노리코(하라 세츠코)의 집에서 사진속의 죽은 아들을 맞닥뜨렸을때.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위로같았다.


 

 


동네 의사인 큰 아들에게 갑자기 급한 환자가 생기는 바람에 도쿄 시내 구경은 둘째 며느리가 맡게된다. 이 장면에서도 여러모로 <천국보다 낯선>에서 에디와 윌리, 에바가 에리호수를 방문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에디와 윌리는 도박에서 번 돈을 들고 에바가 있는 클리블랜드로 떠나는데 그때 에바가 구경시켜주겠다고 데려가는곳이 바로 꽁꽁 언 에리호수이다. 두 영화의 비슷한 점을 찾는것은 무의미할 지 모르지만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 또 하나의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것은 경이롭지 않은가. 섣부르게 흉내낸 스타일과 철학으로 보는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어떤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말이다. 오노미치를 떠나 도쿄에 도착해 아타미에서 오사카 다시 오노미치로 돌아오는 노부부의 여행. 헝가리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클리블랜드와 플로리다를 거쳐 홀연히 헝가리로 돌아가는 에바의 여행. 다 큰 조카를 어린애다루듯 하느라 티격태격하는 에바와 롯데고모. 느닷없이 찾아온 사촌 동생이 못마땅해서 괜히 까칠하게 구는 윌리와 이 모든 헝가리 이민자들 사이에서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미국인 에디.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가장 어려운 관계이기도 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속에서 이들은 때로는 푸념하고 속상해하지만 결국은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것으로 스스로를 달랜다.


 

 


자식들과 함께있는것 자체에 행복감을 느끼는 노부부이야기일것만 같지만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이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삶을 사는것같아 속상하다. 장남의 집이 도쿄 시내에서 떨어진 교외라는것도 그냥 동네 이웃집 의사 선생님 같아 보여서도 실망한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자식이 잘되면 그것으로 보상심리를 느끼는걸지도 모르겠다. 자식덕을 보려는게 아니라 단지 당신이 항상 자식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을 하기때문인것 같다. 일본인들의 실제 성격인지는 모르지만 영화속의 부모 자식의 관계는 왜 그리 어렵고 대면대면해보이는지.  그나마 서로에게 부채질을 해줄때에나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하듯 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장례식을 계기로 이들은 도쿄가 아닌 오노미치에서 다시 한번 모인다. 큰 딸은 사실 엄마보다는 아빠가 먼저 돌아가시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혹시 모르니깐 상복을 챙겨가야겠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는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임종앞에 눈물은 흘리지만 그게 설마 부모의 죽음을 대하는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이 부모 생각처럼 자라주길 바라는것은 부모의 욕심이고 자식들이 변해가는 이유는 도쿄에 사람이 많아서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부모의 모습은 씁쓸하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고 스쳐지나쳤을 부모님의 수만가지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