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15.03.19 00:23






가끔 기웃거리는 아이스크림 코너. 리투아니아에는 한국만큼 과즙을 사용한 맛있는 빙과류가 적어서 새 하드를 보면 한번쯤은 먹어 본다.  그런데 어제 사먹은 이 라즈베리맛 하드는 영화 속 아담과 이브가 먹던 오 마이너스 혈액형 하드와 정말 너무 닮지 않았는가. 모로코의 탕헤르에 머물던 이브(틸다 스윈튼)와 디트로이트에 사는 아담(톰 히들스턴)이 오랜만에 만나 온갖 악기들로 가득찬 지저분하고도 로맨틱한 아담의 거실 소파에 앉아 나눠먹는 O형 피 맛 하드말이다. 이렇게 단순히 과일맛 하드를 먹으며 떠올릴 영화가 있다는것도 참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걸어놓고 작년에 본 영화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담의 디트로이트와 이브의 탕헤르. 언젠가 가볼 수 있을까? 골목골목을 누비는 많은 여행자들덕에 아프리카 특유의 햇살과 그 태양 아래의 각양각색의 건물 외벽들. 그 건물들과 자갈길이 만들어낸 꼬불꼬불한 골목사이를 거니는 사람들과 그들의 무지개빛 옷차림에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 하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최소한의 조명에 기대어 있는 밤의 아프리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내 스스로 여행하지 않는다면, 여행을 하더라도 마음 급한 여행자의 카메라로는 쉽게 담기 힘든 밤의 풍경. 저녁 무렵 가까스로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숙소를 나왔을때 이미 어둑어둑해진 밤 길을 걸을때의 그 기분. 그런 기분을 이브도 공감할 수 있을까? 다시 와보지 못 할 장소라는 생각에 골목의 자갈조차 가슴에 품고싶은 그 느낌말이다.  영원한 시간을 보장받은 뱀파이어의 삶은 진정 우리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일까. 삶을 통해 느끼는 희열과 아름다움은 역설적이게도 한정된 시간과 제약된 장소에서 오는 소중함에 기반할때가 많다.  그토록 돈과 시간에서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우리들이지만 알고보면 좌절과 갈망 사이의 좁다란 틈을 메우고 있는  잘디 잔 기쁨의 언저리를 디딛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지속하려는 노력으로 살고 있는것이다. 훨씬 짧고 역동적인 우리의 일생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추억을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기록의 수단은 다양해지고 제때 소화해내지 못하는 책과 음악과 영화 그리고 장소에 대한 아쉬움은 커져만 간다. 영화속에서 묘사하는 뱀파이어의 삶은 대부분의 우리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삶과는 달리 적적하고 폐쇄적일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항상 그렇게 일분일초에 충실하고 간절하기만 한것도 아니다. 우리가 멍한 눈, 축 늘어진 어깨로 흘려보내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어진 수명에서 백분율로 따져본다면  그 명상을 가장한 게으름과 탐닉으로 둔갑한 허무의 시간은 뱀파이어들이 여가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것이다. 단지 사회에서 학습되어진 우리의 양심이 그러한 시간들을 고귀하게 여기길 허락치 않는것일뿐.  








몹시 다른 이브와 아담.  마치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차가운 밀라노와 따스한 피렌체의 아오이와 준세이처럼 탕헤르와 디트로이트도 그들의 다른 온도를 표현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처럼 보인다.  아담은 이브보다 기록과 창작에 능숙하며 옛것에 심취하고 타인의 시선과 세상의 명성을 대단치 여기지 않는다. 새것을 동경할 수 있고 누군가의 창작물에 매료될 수 있는 이브는 냉소적인 아담에 비해 한없이 따뜻하다. 그들이 오랜기간 함께 일 수 있었던 것. 그들의 감정이 적정 체온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브가 자신의 트렁크에 각종 언어로 쓰여진 동서고금을 가득 채워 담으며 여행을 준비하는동안  아담은 오래된 기타를 수집하고 음악을 만들며 변질된 세상에 허무함을 느낀다. 그들을 살아있게 하는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여러 현상들에 지닌 서로 다른 방식의 애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니깐 좋은 의미에서 가끔 짐 자무쉬가 딜레탕트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그가 이 영화에서 늘어놓는 수많은 작가들과 위인들 그리고 이미지들.  그들의 많은 작품들과 세상에 미친 영향 따위를 이해하고 영화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는 감독의 방대한 지식이 부럽다가도  어쩌면 자무쉬 자신도 내가 자무쉬를 안다고 착각하고 좋아하며 만족하듯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 그저 선망하고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4.01.29 09:41



<I am love>


제목을 보고 일부러 찾아 보았고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케빈에 대하여>를 찾아보게 되었다. 

격조있는 이탈리아 명문가의 분주한 저녁 만찬 준비로 영화는 시작되고 

만찬을 총 지휘하는 안주인, 이탈리아어를 하는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다소 낯설었다.

몸에 딱 떨어지는 각 잡힌 바지 정장을 입고 절도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이었다면 

시중드는 사람 입장에선 옮기던 접시도 떨어뜨리게 하는 카리스마 였겠지만

 틸다 스윈튼은 자신이 지금까지 지어오던 모든 표정의 역사를 삭제한 듯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온전히 사랑하기는 힘든 색깔의 실들로 전혀 다른 감정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 머릿속에 서로 다른 두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것은 신기하고도 복잡한 감정이다.

가끔은 생각을 멈추고 내가 방금전에 어떤 언어로 생각을 했는지 되새김질 할 때가 있다.

내가 방금 전 맛있다고 느꼈다면 그 찰나의 순간 내가 머릿속에서 어떤 언어의 '맛있다'를 내뱉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미묘한 순간들이 가끔 있다.

머릿속에는 각기 다른 언어의 방이 있고 시시각각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지만 아직 적합한 단어를 습득하지 못했다면

어떤 미묘하고 구체적인 감정들은 미처 방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히고 만다. 

그럴때면 내 감정은 가장 간략하고 가장 포괄적이고도 원시적인 형태로 남는다. 

실제 영국인인 틸다 스윈튼은 영화 속에서 이탈리아 인과 결혼한 '영어를 잘 못하는' 러시아 여인을 연기했다. 

만찬장에서 인도계 미국인과 영어를 해야 할 상황에서 그녀가 '언어의 섬'에 고립되는 장면이 있다. 

물론 그 고립은 가끔 유용하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흥분하고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 한없이 관조적이 될 수 있다.

엠마가 그 고립을 어떤식으로 받아 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것은 이 영화에서 엠마는 혼자일때 오히려 가장 덜 고독해 보인다는 것.

러시아를 떠나온지 이미 3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이미 많은 감정을 잊었고 그것에 익숙해진 상태이다.

그리고 잊혀진 감정으로 꼭꼭 채워 진 그 방 문이 열렸을때 그녀는 더 이상 이성적이기를 포기한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보고 난 후로 밀라노의 두오모는 나에게 이성과 합리의 상징이 되었지만 

밀라노 두오모를 처음 봤을때의 실제 인상은 이 성당이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는 것.

여름의 밀라노의 온도가 38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모두가 휴가를 떠난 밀라노는 텅빈 유령 도시가 된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수세기에 걸쳐 서서히 녹아 내린 촛농이 굳어 버린듯한 모양의 

이 성당은 섬세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고 심지어 자극적 이기까지 했다.



너무나 많은것을 보여 주려다 결국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한 그런 중구난방격의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 만큼 많은이들의 생각과 꿈이 집약된 이 성당이 그나마 밀라노라는 차갑고 냉정한 도시를 호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성당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에서 멀리 고독하게 걸어가는 엠마의 모습을 비출때

성당은 그녀가 마음껏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마음속의 기둥처럼 보였다.



엠마는 얘기를 나눌 친구가 없었던게 아니라 친구를 찾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를 싹둑 자른 딸 엘리자베타의 새로운 사랑은 엠마 자신에게 사랑에 대한 의미를 묻는 계기가 된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수십년을 살아 온 엠마가 모든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녀는 모든것을 가져 봤기 때문에 그 본질과 의미를 알고 그것을 두려움 없이 포기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고 우리를 구속하는것들은 우리가 한번도 가져본 적 없기때문에 항상 열망하는것들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풍경과 마주치며 서서히 굳어가던 감정의 근육은 조금씩 유연해진다.

산 레모를 방문한 엠마가 멀리서 마주치는 러시아 정교회. 

마치 밀라노 두오모와 대치를 이루던 <냉정과 열정사이> 속의 피렌체 두오모의 솔직함처럼

그리고 그 교회 앞으로 지나가는 안토니오의 모습을 보고 엠마의 감정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멀리서 교회 가까이로 다가오는 엠마의 모습이 보인다.



이탈리아의 휴양 도시에 러시아 정교회라니 좀 생뚱맞다. 

어떤 경로로 러시아 교회가 세워지게 됐을까.

혹시 엠마가 그 사실을 몰랐던거라면 그녀는 이 장면에서 부터 이 모든 우연을 운명과 동일시하기 시작했을거다.

  


절친한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와 산 레모에서 레스토랑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는 큰 아들 에두아르도.

결혼을 앞뒀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고 아버지는 그가 정말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것처럼 보이냐며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진다.

여행에서 돌아 온 엠마가 보는 티비 속에 톰 행크스가 동성연애자를 연기했던 <필라델피아>가 방영된다.

에바와 결혼을 앞둔 아들 에두아르도와 안토니오 역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쉽게 인정되지 않는 사랑들.

엘리자베타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이 아닌 '이해하려 들지 않으려 하는' 사랑

엠마와 가장 가깝게 교감하던 아들 에두아르도.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엄마.

모든 이들의 사랑이 조금씩 엇갈린다.

그 사랑을 지키려는 사람과 그냥 묵인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뒤엉키고 만다.



영화 속의 음식들은 엠마와 에두아르도의 언어이자 엠마와 안토니오 그리고 안토니오와 에두아르도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잃었던 미각을 되찾듯이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안토니오는 언젠가 에두아르도가 자신에게 얘기한 러시아 스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안토니오에게 그 러시아 스프를 끓여주는 엠마.



엠마가 에두아르도에게 가끔 끓여줬다는 러시아 수프 보르쉬치는 내가 아는 보르쉬치와는 정말 다르다.

아니면 리투아니아 자막이 잘못된것일수도 있다.

보르쉬치는 절인 비트무와 고기를 넣고 끓인 붉은 빛이 나는 슾인데 국물 자체가 저렇게 맑은 보르쉬치는 본적이 없다.

각종 생선을 넣고 맑은 국물이 우러나올 때까지 잘 끓여야 한다는 엠마의 그 스프가 

보르쉬치 보다는 우하라는 맑은 수프에 가까워보인다.

산 레모에서 엠마가 끓여준 스프를 안토니오는 밀라노의 만찬에서 끓인다.

그것이 엠마를 위한 요리였는지 엄마와의 추억을 회상하던 친구 에두아르도를 위한것인지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었는지 에두아르도에 대한 원망의 표현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모든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인지도.



<케빈에 대하여>를 촬영하던 틸다 스윈튼은 이 장면을 떠올리고 데자뷰 따위를 경험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탈하게 앉아 있는 엠마.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눈 내리던 밀라노. 햇볓이 쨍쨍 내리 쬐던 산 레모. 그리고 에두아르도의 장례식이 있던 날에는 비가 내린다.



마치 지금까지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다는 표정으로 빗속에 서있는 엠마. 

<투스카니의 태양>에서 브레마솔레를 사려고 온 다이앤 레인에게 비둘기가 똥을 싸고 날아가자 

집주인은 비둘기가 날아들다니 이것은 길조라며 다이앤 레인에게 망설임없이 집을 판다.

이 비둘기도 그 비둘기와 같은 맥락일까. 장례식을 치룬 후 마주친 비둘기라니. 

엠마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장례식을 끝난 후 엠마는 남편에게 안토니오를 사랑한다고 말해버리고  

맨발의 운동복 차림으로 도망치듯 떠나는 엠마가 엘리자베타와 마주 친 짧은 순간.

'사랑'이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단어라고 했던 엘리자베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을 갈구하는 댓가로 우리가 얻는것이 매순간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가장 나 다워 지기 위해서는 혼자가 되어 버리는 편이 낫지만 그 사실을 모른척 배반하고 우리가 선택한 사랑이라는것. 

엠마와 엘리자베타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4.01.27 07:04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처럼 지극히 상대적임에도 그만큼 엄격한 잣대를 가진 가치도 드물다.

틸다 스윈튼은 여배우는 물론 남자 배우를 통틀어서도 비교 불가능한 독특한 아우라를 지녔고 

여배우의 아름다운 얼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항상 상대적인 미를 거론해야 하는 단순치 않은 얼굴을 가졌다.

너무 다르기때문에 비교의 대상을 찾는것 자체가 어려운것이 그녀의 강점이지만 약점인것.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화장기 없는 얼굴과 설탕 같은 따스한 감정은 쏙 빠진 듯 삐죽하게 솟은 큰 키. 

언젠가는 합리적이었고 이성적이었던 한 인간이 마치 그동안 추구해 왔던 모든 의미를 잃고 난 뒤 갈팡질팡 하는 듯한 표정.  

천국을 꿈꾸며 어딘가로부터 탈출했지만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갇히고 마는 인간들 속에서 

천국이라는 이상을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천국의 이데올로기 위에 누구보다 냉정하게 군림했던 <비치>속의 그녀.  

여배우로써의 그녀의 여성성에 굳이 만족감을 느껴야한다면 몇몇 영화에서 그녀는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으니 찾아보자.

동화 속 공주에 목말라 하는 우리는 성별을 막론하고 모두가 기형적인 마초 근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외모에 대한 토론 자체가 그녀에게 퍽이나 고리타분한 테마 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미안. 틸다. 마틸다.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생김새가 만들어낸 편견을 무너뜨리고 관중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성장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영국인 유부녀를 연기했던 틸다 스윈튼.

젊어서는 영국 해협을 헤엄쳐 횡단하는 꿈을 가졌던 모험심 있고 자립적인 여자였지만 

현재는 부유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과 타협한 채 살아가는 유부녀를 연기했다는것은

그나마 내가 이 배우에게 가져왔던 선입견에 나름 힘을 실어주는 설득력 있는 설정이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아 틸다 스윈튼도 누군가의 아내가 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놀란것은

그녀가 그런 역을 맡아서가 아니라 내가 이 배우에게 그런 편견을 가졌다는게 너무 어처구니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쌍둥이 엄마라는 틸다 스윈튼이 누군가의 엄마를 연기하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결코 전형적이지 않은 누군가의 엄마를 연기하는 동시에 엄마 이전의 여자, 여자 이전의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면서

관객이 그녀에게 부여한 역할 기대 따위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연속적으로 본 <케빈에 대하여>와 <아이 엠 러브>에서의 그녀 말이다.

 


틸다 스윈튼이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시고니 위버 대신 <에일리언>의 리플리 역도 어울렸을거다.

그녀가 리플리를 연기했더라면 <케빈에 대하여>를 보면서 더 깊은 감정 이입이 가능했을지도.

하얀 유리관 속에 꽁꽁 언 듯 웅크리고 누워있는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오랜만에 시고니 위버 얼굴을 떠올리고 나니 덩달아 수잔 서랜든이 떠오르고 

비슷한 세대의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연기한 엄마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들 아름다운 금발 미녀는 아니지만 몇몇 배역을 거쳐서 결국은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던.

 예쁜 딸과 합세해서 돈 많은 남자를 등쳐먹는 엄마 (하트 브레이커스) 

어려서 잃어버린 딸 때문에 평생을 트라우마속에 살아가는 엄마 (The girl in the park)

남성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여성 (델마와 루이스) 수잔 서랜든은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위해 기적의 약을 찾는 엄마 (로렌조 오일) 이자

전 남편의 여자 친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병들어 가는 엄마 (스텝맘) 였으며

오랜 세월동안 신분을 감추고 살다가 자수하는 급진적인 반체제 인사 (The company you keep) 였지만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른 후 자수 할 생각을 하셨나요' 라고 기자가 묻자

평화로운 엄마의 얼굴로 '자식이 생기면 그들이 모든것을 변화 시키지'라고 말한다.

엄마이지만 이들이 연기하는 엄마들은 우연히도 조금은 다른 엄마들이었던것 같다.

근데 우리는 엄마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것은 아닐까. 

우리가 먼 훗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고 우리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엄마라는 역할은 어떤 개인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 아닌 인류의 산파 같은 공통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까.



자신이 언젠가 사랑했고 열정을 쏟았던 것들을 상자안에 닫아두고 현실과 타협하며 행복해지기란 힘들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와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의 엘리자베스는 그런 의미에서 흡사하다.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변과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주고 받은 상처로 단련되며 성장하는것이 

모든 인간이 지닌 공격 본능이라면 

현실에 순응하고 충돌을 회피하며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것은 인간의 방어 본능에서 기인하는지도.

나는 정직하게 내 행복을 위해 진정 투쟁하며 살고 있는것일까?

불행을 밥 먹듯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정직한것이 아닐까. 

잃는것이 있으면 얻는것이 있는데 그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고 한 쪽 저울에만 시선이 간다면 물론 삶의 균형은 깨져 버린다. 

하지만 그 균형이 깨질까 두려워 기울어진 저울을 들어 올리는것은 한편으로는 자기기만이 아닐까.



여행을 업으로 삼고 지도 안에서 자유로웠던 에바가 결혼과 출산의 댓가로 콘크리트 바닥위에 정착해야 했을때.

그나마 뉴욕이라는 도시의 자유분방함에 대리만족을 느끼던 그녀에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교외로 이사가야 한다고 남편이 제안해왔을때.

상자속에 가둬놓은 이상과 현실의 갭이 실제적으로 다가왔을때 그녀가 느꼈을 당혹감이 이해가 간다.



유아시절 엄마와의 교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케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애를 먹고 엄마의 관심에 집착한다.

에바와 케빈은 모자관계라기 보다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개인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만큼 서먹하고 불편하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도 궁금해서라도 혹은 마음에 들면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지는게 사람 마음이지만

넓고 텅빈 공간에 남겨진 엄마와 아들은 마치 아주 협소한 공간에서 

처음 본 사람의 꼬르륵 소리를 들을때만큼 난처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에바는 케빈에게 다가가서 '새로운 집에 이사 온 기분이 어때'라고 살갑게 껴안고 말을 걸어야 했을까?

모성애라던가 보호본능 같은것이 과연 아이를 가지는 순간부터 모든 여성들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기질인걸까?

그것은 여성에게 지닌 선천성이 아닌 후천적으로 학습되어지는 역할 같은게 아닐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에바는 엄마 없이 자란 여성인가? 엄마 없이 자란 여성이 모두 에바와 같은 여성이 되지 않는다면 

에바와 같은 엄마를 가진 아이가 모두 케빈과 같이 된다는것도 아주 희박한 경우가 아닌가.

에바를 탓하는것은 에바에게 인간 이전에 엄마라는 덫을 씌우는 오류가 아닐까.

 아니면 미국에서 벌어지는 학교 내 총기 사건 같은것을 사회적 책임이 아닌 

가정 내부의 문제로 교묘하게 책임을 전가 시키려는게 아닐까.



옛 지도들로 정성스럽게 방을 도배하면서 에바는 방을 꾸미는것이 개인의 특성을 나타내어 줄 수 있다고 케빈에게 말하고

에바가 공들여 표현한 그녀의 아이덴티티에 흡사 잭슨 플록처럼 물감을 발사하는 케빈은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케빈은 에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엄마로써의 정체성을 요구하며 도발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른다.

에바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서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것일지도.

하지만 이 영화는 진정 에바가 과도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욕망했기 때문에 

케빈이 케빈과 같은 아이로 자라날 수 밖에 없었다고 얘기하고 싶을걸까? 

과연 이 영화에서 케빈과 에바의 정체성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는것이 가능한 것일까?


 


서점 앞 자신의 책 광고앞에 서있는 아들을 보고 에바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에바가 모든것을 잃은 후 여행사 면접에 갔을때 그녀의 이력서를 본 보스는 

네가 이전에 무슨 일을 했건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복사하고 돈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에바는 순응한다.

에바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상처를 되새기는 흔적들을 매일 마주하면서도 살던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이상 잃을 수 있는것은 아들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낀 에바는 케빈의 남은 인생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엄마로서의 남은 책임을 다하려는 것일까.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강렬한 이 장면. 

남편과의 만남. 원치 않았던 아이의 탄생. 그로 인해 뺏겨버렸다고 믿는 그녀의 인생. 

집에 칠해진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는 장면도 그렇고 자식의 손에서 묻어난 핏물을 평생 닦으며 

자식의 죄를 십자가 처럼 짊어 지고 가야하는 자식 잘못 기른 부모로써의 원죄 같은것을 보여주려 하는것일지도.

아니 어쩌면 결정적인 원인은 에바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은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먹는 토마토 가지고 장난 치는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의 행태도 정말 처단받아야 마땅하다..)



(이 장면에선 정말 <Bothersome man> 에 나온 스칸디나비아 남자를 너무나 닮아서 놀랐다. 미안. 틸다)

케빈이 동생의 눈을 찌르고 열대 과일 리치를 먹는 장면도 그렇고

토마토 캔 가득한 선반이라니. 정말 한없이 무겁고 힘든 영화가 될 수 있었지만 곳곳의 감독의 재치가 돋보인다.

이 선반의 토마토를 모두 쏟아 붓는다고 해도 저 토마토 축제 속 토마토 만큼은 안될거다.

모든 불행의 시작. 에바에게 지워진 짊. 평생 먹어도 다 못먹을 토마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인지도 모른다.



가장 궁금한것은 케빈이 정상 생활로 돌아왔을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케빈과 에바를 받아 들여줄까이다.

그들은 살던곳을 떠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전과는 달리 서로를 의지하며 평범한 모자관계를 성립하게 될까.

언젠가 돌아 올 그의 방을 정리하고 그의 옷을 다림질하는 에바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하는 엄마의 모습에 가깝지만 에바 자신은 자신이 기대하는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Posted by 영원한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