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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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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63_버터 Sviestas 타향살이, 외국생활, 이민 등등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의 생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내뱉는 순간에는 왠지 회한, 설움, 고생, 외로움 같은 안타까운 뉘앙스의 이미지들이 뒤따른다. 실상은 별거 없다. 쟁여놓아야 하는 식품들과 사용하는 속담들이 달라지는 것,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버터위에 버터를 바른 격이라는 속담이 먼저 떠오르고 일이 순조롭다고 생각할 땐 순풍에 돛을 다는 대신 버터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택하는 것, 그뿐이다. 쟁여놓는 식품 1순위는 아무래도 버터이다. 간장이 먹고 싶다고 해서 집에 있는 간장을 순식간에 마셔버릴 수 없듯이 버터가 아무리 많아도 다 먹어치워 낭비할 일은 없다. 그러니 세일을 하면 좋은 버터를 미리 사놓게 된다. 마트에 파는 버터의 성분은 천차만별이다. 무염..
리투아니아어 61_사랑 Meilė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는 어린이 도서관 창가 풍경. Meilė iš pirmo sakinio '첫 문장에 반하다. 첫 문장에 반한 사랑'이라는 뜻의 문장이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책 위에 책의 일부 문장이 적혀있었다. 이것을 집어서 직원에게 가져가면 포장이 안된 상태의 책을 따로 꺼내어주는 줄 알았는데 그냥 포장된 채로 대출을 해서 가져가는 거였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누군가는 가장 짧은 문장이 적힌 책을 골랐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뭔가를 고심 끝에 고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겠지.
리투아니아어 60_형제들 Broliai 도서관 입구에 책 교환 수레가 있다. 매 번 갈때마다 빈 손이어서 쉽게 다른 책을 들고 올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어떤 날에 수레에 놔두고 올 책 한 권을 챙겨서 도서관에 갔는데 이 책이 보였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리투아니아어 번역본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굵직한 장편들은 한국어든 리투아니아어든 여러 다른 번역으로 읽고 싶다.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쓸 수 없는 작가를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복잡한 번역이 있고 또 좀 수월한 번역이 있기도 하니깐. 살짝 집어 든 책은 몹시 가벼웠고 정갈했고 게다가 한 권짜리. 하지만 첫 잔상이 사라지고 몇 초후에 선명하게 포착한 O 자 위의 사선. 내가 읽을 수 없는 노르웨이어였다. 하지만 어쨌든 들고 왔다. 집에 돌아와서 러시아 찻 잔에 차를 담고 ..
리투아니아어 59_무지개 Vaivorykštė 어제 트롤리버스에서 내리니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지개. 이번 주에 갑자기 기온이 크게 떨어졌고 봄가을 코트를 다시 꺼내 입었다. 비도 자주 온다. 보통은 지나가는 비라 우산을 챙길 필요는 없다. 비가 오고 해가 나고 해가 난 상태에서 비가 오는 경우도 많으니 무지개도 자주 보인다. 리투아니아어로 무지개를 Vaivorykštė 바이보릭싀테 라고 한다. Vaivas 는 현지인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단어이고 그만큼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 우선 빛이라는 뜻이 있단다. Rykštė 는 채찍까지는 아니지만 무지개와 같은 구부러짐을 보이며 찰싹찰싹 거리면서 때릴 수 있는 회초리를 칭할때 쓰인다. 그런데 빛의 채찍이라니. 채찍이라는 단어도 빛이라는 단어와 합성하니 퍽이나 시적이다. 들판에서 들꽃을 꺽어서..
리투아니아어 57_ 백야 Baltosios naktys 지난번 빌니우스 도서 박람회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백야가 묶인 도스토예프스키 책 한 권을 샀다. 현금도 없었고 현금 지급기도 없는데 카드를 받지 않는 부스가 많아서 그나마 한 권 유일하게 사 온 책이었는데. 얼마 전에 책장 아래칸에 잡다한 책들과 섞여있는 것을 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책들 근처로 옮기려고 보니 위칸에 터줏대감처럼 꽂혀있는 책. 책을 잘 사지도 않는데 같은 책을 두 번 사다니 황당했다. 내가 이들을 몹시 좋아하던가 아니면 기억력이 이제 다 했던가 공부하라는 계시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50권 남짓되는 주니어용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신동우 화백이었나 그가 그린 삽화 속의 인물들 얼굴이 꽤나 특색 있었다. 1번은 부활, 2번은 로미오와 줄리엣 3번은 좁은 문 4번이 가난한 사람들 그런 식으..
리투아니아어 56_Mugė 박람회 매년 2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빌니우스의 큰 행사. 지난 주 빌니우스에서는 4일 동안 도서 박람회가 열렸다. 전광판에 도서 박람회 광고가 지나가길래 책을 뜻하는 리투아니아 단어 Knyga 를 포착하려고 사진을 찍는데 정작 찍고 나니 광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라는 단어. '20년이나 됐으니 광고할 필요도 없지요' 가 광고 컨셉이라서 '빌니우스'와 '박람회' 단어만 남기고 정작 '도서' 자리에 다른 문구들을 채운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다른 단어 쓰기. 전시장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회들, 노천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장터들을 리투아니아에서는 보통 '무게 Mugė' 라고 부른다. 봄은 이미 만져질듯 성큼 다가왔다. 2월의 마지막 주부터 연달아 열리는 도서 박람회와 3월 첫째주의 카지우코 무게는 빌니우스..
리투아니아어 55_전당포 Lombardas 항상 이 단어를 보면 이탈리아의 롬바디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를 떠올리곤 괜히 따스해지고 뭔가 넉넉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들 단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롬바르다스는 전당포이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구시가를 걷는다면 옷가게든 빵집이든 한 번에 알아봄직한 상점들 사이에 별다른 간판도 없이 영업하고 있는 전당포들을 간혹 마주칠 수 있다. 특히나 부엌 찬장 속의 마지막 남은 싸구려 숟가락 마저 전부 저당잡히고 영혼이라도 꽁꽁 싸매서 가져다 줘야 할 것 같은 후미진 전당포가 구시가의 트라카이 거리에 하나 남아 있다. 바사나비치어스 거리에서 주욱 내려와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들어설 수 있는 거리이다. 건너편 상점들의 조명이 반사된 탓에 속이 쉽사리 들여다보이지 않는 이곳은 ..
리투아니아어 54_Gyvenimas 인생 제목을 쓰기 전에 검색을 해보았다. 이 단어에 대해 과연 아직도 쓰지 않았을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습관적인 단어이고 그 단어를 쓰는 우리의 자세는 단어 자체의 울림에 비하면 오히려 한없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 볼레벤이라는 독일 작가가 쓴 이 책은 한국에서는 '나무 수업'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리투아니아어로는 '신비로운 나무의 일생'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다. 뭔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가히 수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어 최종 제목을 두고 출판사 직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판매 부수에 좀 더 영향을 줄 수 있는 단어를 궁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숲을 거닐며 이 나무 저 나무에 청진기를 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상상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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