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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사용 설명서를 읽으며.

 


주말에 옷장 정리를 하다가 5년 전에 산 세탁기 사용 설명서를 발견해서 읽어보았다. 주기적으로 해줘야 할 필터 청소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좀 찔끔했다. 설명서에 다양한 외국어들이 들어가 있어서 분량이 꽤 두꺼운데 이 세탁기 책은 특히 정말 너무 책처럼 생겨서 그리고 워싱 머신이란 단어에 대한 개인적 집착으로 남겨 놨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닉 유스의 워싱 머신 앨범과 그 앨범 커버를 좋아하는 건데 사실 이 앨범 커버가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순간이라면 예전에 피씨통신의 브릿 동의 시샵이 푸른색의 워싱 머신 앨범 커버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음감회에 나왔을 때였다. 중키의 마른 남자들이 한국에서 잘 구하기 힘든 외국 밴드 티셔츠 같은 것을 입었을 때의 특유의 핏과 소울 같은 게 있는데 또 이런 분들은 영혼의 고혈을 쥐어짜 내며 밤새 자료실에 희귀 앨범 들을 대량 올려놓는데 마지막 앨범을 업로드한 시간이 아침 6시 47분 막 이렇다거나 공연장에 가면 이상한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은 시디 플레이어에서 연결된 이어폰을 얄상하게 늘어뜨린 채 한쪽 구석에 서있다거나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면 미친 듯이 공연에 열광한다. 약간 영화 '사랑도 리콜되나요' 에 나왔던 음악광 스타일이랄까. 그런데 난 시샵님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우리 집 세탁 종료음은 슈베르트의 송어이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발랄한 송어가 울릴 때마다 까무러치게 놀란다. 몇 번 꺼놔도 봤지만 그러면 세탁물 꺼내는 걸 잊게 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전화 벨소리로 해놨다가 전화받는 일이 너무 싫어서 전화가 올 때마다 그 음악이 공포로 다가오지만 막상 음악 바꾸기는 계속 망설이게 되는 경우와 비슷한데 선택의 여지없이 단 한곡뿐인 종료음을 무슨 수로 바꾼단 말인가. 아무튼 세탁기에 세탁물을 구겨 넣어 세탁 바구니가 비어버리는 상태에는 희열을 느끼면서 정작 깨끗하게 세탁된 옷들을 다시 꺼내어 건조대에 얹는 상쾌한 행위는 세상 귀찮은 일로 생각하니 참으로 속이 보인다. 그러나 세탁 버튼을 눌러놓고 다른 일에 정신을 빼놓다가 갑자기 울리는 그 음악이 마냥 반갑지는 않은데 또 송어는 얼마나 흥겹게 팔딱거리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그런데 세탁물을 널고 마른 빨래를 개는 일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송어를 꺼내는 일은 양반에 가깝다. 그런데 빨래를 개는 것이 왜 그렇게 귀찮았던 건지 요즘 새삼 깨달았다. 빨래는 한꺼번에 건조대에서 다 꺼내서 산처럼 쌓아놓고 앉아서 개면 되는데 난 오랜 세월 선채로 건조대에서 하나씩 빼서 하나씩 개 왔던 것이다. 이젠 뭔가를 어깨 높이 정도까지만 드는 행위에도 척추가 유감을 표시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워싱 머신 앨범을 들으면서 추억에 잠긴다. 30년 전 음악인데 지금 들어도 실험적이다. 이건 뭐 내가 요새 음악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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