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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시간

결혼하고 리투아니아에 올 땐 가방 하나에 당장 입을 겨울 옷과 겨울 신발, 아끼는 음반과 책들을 주로 담았다. 조금 무게 초과해도 뭔가 이민 가는 느낌인데 좀 봐주겠지 하는 이상하고도 안일한 생각으로 갔는데 아에로쁠롯이 의외로 강경하여 고등학생 때 헌책방에서 사다 모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들은 그냥 공항에 놔두고 와야 했다. 아마 새 번역본으로 다시 사서 모으고 싶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아까웠다. 그때 항공사 직원이 직원 도서관에서 읽겠습니다 했는데 실제로 그 책들은 어디로 갔었을지 궁금하다. 그때 간신히 가져온 책 두 권이 토마스 만의 중편집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아마 열린 책들의 새로 산 책이어서 버리진 못했던 것 같다.



토마스 만의 중편 모음 집중에서 '힘든 시간'은 내가 이맘때면 정말 매해 (초가을이지만 급 겨울의 향기를 내뿜으며 지난여름의 기억을 급속 냉각시키는 난방 시작 전의 마법 같은 시기) 키득키득거리며 책장 앞에 선채로 읽는 작품이다. 엄청 짧기도 하고 소설 초반의 묘사가 너무나 리얼하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힘든 시간의 느낌으로 읽히진 않는다. 그냥 사실에 대한 유머감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품 속은 12월 초반을 묘사하곤 있지만 감기에 시달리는 증상과 작가가 머무르고 있는 방에 음산한 차가움과 방을 관능적으로 만든다는 커튼에 대한 예찬까지 너무나 공감한다. 우리 집에 그런 커튼은 없지만 추움이 깃든 어디에나 마음 둘 곳은 분명히 있다. 일단 추워지면 그것만큼 아늑한 것이 없다. 하지만 여름은 일정상 내년에나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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