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에 빌니우스에서 한 시간 거리의 쉬벤치오넬리아이(Švenčionėliai)라는 도시로 당일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 2명과 가기로 했는데 그나마 좀 아는 사람이 고양이가 아파서 못 가는 바람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가게 됐다.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오히려 할 말이 많아서 사실 편하다. 물 한 병과 읽을 책 한 권을 가져갔다. 물은 다 마셨고 책은 별로 읽지 못했고.
갑자기 이 여행을 회상하는 이유는 바르샤바-빌니우스 구간 기차가 12월 11일 재개통한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고 지난 주말에 연극을 보면서 백치의 므이시킨 공작이 타고 오는 기차가 아마 이 구간을 지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 사진을 찍었던 순간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기차역 1층에 위치한 카페 벽에 바르샤바 뻬쩨르부르그 구간 열차가 개통된 1862년의 순간이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 바르샤바에서 기차 타고 빌니우스에 돌아온 적이 두 번 있는데 이번에 바르샤바 갈 때 보니 이 구간 기차 운행은 언제부터인지 중단된 상태였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들어 유럽행 버스 노선이 다양해지고 외국 버스 회사들도 들어오고 그랬나 보다. 서유럽으로도 러시아까지도 동일한 궤도에서 기차가 움직이면 좋을 텐데 지금 상황 같아선 어느 세월에 그게 가능해질지 모르겠다.
바르샤바행 기차는 8시간 걸려서 저녁에 도착하는 스케줄이고 심지어 Mockava(모스크바랑 너무 비슷함)라는 폴란드 도시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하니 바르샤바에 가야 하면 난 결국 야간 버스를 선택할 것 같다. 물론 8시간 내내 창 밖 풍경을 보여주며 바르샤바 중앙역으로 바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멈추는 기차에서 내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편으론 든다.
기차 이용객이 많지 않으니 매표소도 안 열린다. 망치 들고 낫 들고 추수 중인 소련의 일꾼들이 벽에 남아있다. 이런 거 없애버리지 않는 거 정말 좋다. 기다리는 사람도 역시 없고 개 한 마리만 덩그러니. 들개처럼 으르렁거리다가 자기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잠잠해졌다. 개 뒤로 보이는 문을 열면 카페이다. 요즘 리투아니아의 기차역들이 여러 방면으로 생존하기 위해 고심인데 이 도시의 역사 2층은 리노베이션을 해서 공유 오피스로 사용하고 있고 1층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이 여행은 다 함께 공유 오피스 무료 이용권을 사용하고 자전거로 도시를 둘러보고 1층에서 커피도 마시자는 취지로 급조된 여행이었다. 얼마 전에 지인이 필요하면 고쳐서 쓰라고 회생 불가능해 보이는 자전거 4개를 던져놓고 갔다. 그중 유일하게 고쳐서 요즘 아이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 이게 약간 묘기(?) 부리는데 쓰이는 특수 자전거 같은 거라 의자를 가장 높여도 나한텐 좀 낮다.
아직 카페가 문을 열기 전이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신발 벗고 들어오라는 곳이 좋다. 바닥이 심각할 정도로 더럽지 않다는 뜻. 겨울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춥지는 않다는 뜻. 슬리퍼나 덧신 같은거 준비물에 쓰여있었는데 어차피 여름이니깐 안 챙겼다. 사람들이 놔두고 신고 다니는 직접 짠 털양말들이 많이 보였다.
개가 나를 안내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주인 찾아가는 것일 뿐. 책상이 12개 정도 있고 부엌 사용할 수 있고 캡슐 커피 머신 제공되는 곳.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공유 오피스에 월 사용료를 내고 일하고 있는 아는 사람을 만났다. 친구의 동창이자 친구가 작년 초에 잠깐 살았던 집의 딴 방에 살았던 남자애가 알고 보니 이 도시에 부분적으로 정착해서 이 공유 오피스와 카페 등등의 사업을 계획하고 확장시키는 공동체의 준구성원이 된 상태에서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
사실 친구 집 부엌에서 키친타월 수선하며 만두와 찐빵을 빚다가 두어 번 마주쳐서 말을 섞었던 적이 있을 뿐이지만 나야 워낙에 아는 사람이 적어서 일단 한 번 알게 된 사람은 잊기 쉽지 않고 얘는 약간 빌니우스를 떠나서 자기를 아무도 모르는 이 도시에 숨어들다 시 피한 상태에서 아는 사람을 그것도 친구의 친구인 외국인을 만나니 너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깥 풍경이 단조롭기 그지없다. 19세기 말에 구멍 숭숭 뚫려서 바람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기차 타고 먼길 떠나는 사람들이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여기 2층까지 올라와서 쉬었으려나?
들어가니깐 여기저기 보여주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수리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단다. 마룻바닥도 살리고 벽돌도 전부 놔뒀으니 알만하다. 남겨둬야 할 이유로 충만한 뭔가를 보존하며 수리하는 것이 사실 다 걷어내고 부수고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걸 안다. 선풍기가 반가울 정도로 조금 더운 날씨였다. 그런데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탁자 위에 화병과 초콜릿이 있었다. 여름 내내 녹았다가 가을까지 남아있다가 다시 굳었을 것 같다.
기차 정비공의 사무실로 보이는 곳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정비공들이 끽연을 하며 방금 뱉어 놓은 듯한 침을 외면하며 저기 건물 뒤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수를 세었다.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에 보면 저런 모퉁이에서 고무인간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뛰어나오면서 다 쓰러지면서 죽는다. 먼저 앞서가던 사람이 공격받아서 죽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라마 같은 표정으로 계속 뒤따라 나와서 도미노처럼 죽어나가는 장면이 얼마나 어이없고 웃겼던지. 고무 인간들보다는 한참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역사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저 건물 뒤에서 온화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 7시 기차를 타고 왔기에 카페 문 열 때까지 2층에서 캡슐 커피를 마시고 문을 열자마자 바로 내려가서 케이크와 커피를 먹었다. 동행은 메뉴에 없던 오믈렛을 주방에 특별 부탁해서 먹었고 아침부터 케이크에 단 것을 먹는 나를 정말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난 집에서 나오기 전에 사실 밥을 먹었기 때문에 디저트 타임을.
여름 이후로 저 꽃이 한국말로 수레국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레국화 꽃잎이 들어간 얼그레이를 좋아해서 자주 마셨는데 그 꽃이 이 꽃인 줄은 10년 만에 알았다.
도시는 정말 작았다. 좀 더 멀리 가볼까 해면 다른 도시 이정표가 보인다. 돌때마다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저 나무 아래에서 저 햇살을 피하는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8월이었는데 어느새 12월이 되었고 여백으로 가득했던 저 도시의 눈 내린 모습은 어떨까 좀 궁금해진다.
점심 먹고 공유 오피스 주인에게 혹시 더 둘러볼 곳이 있냐고 물었더니 알려줬던 곳. 자전거로 좀 더 갔더니 문화 예술 공간으로 변신하려는 중인 거대한 면적의 옛 목공소가 있었다. 여름에 축제도 열고 작가들 초빙해서 벽화도 그리고 캠핑도 하고 이런저런 구상 중이라고 담당자가 자두나무의 자두를 따서 슥슥 닦아 건네주며 이야기해줬다.
이 사람들은 기차역 근처의 부속 건물을 사서 주거 공간으로 바꾸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자신들이 대출받아 구입한 건물의 일부를 이제 되팔거나 임대하면서 새로운 구성원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역시 그 건물을 고치는데 들어간 노력과 에피소드들을 늘어놓았다. 안 봐도 어떤 모습이었는지 눈앞에 그려졌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느꼈을 희열도 전해졌다.
아직 작동 중인 기계들도 보여줬다. 마치 지하 감옥 지기처럼 거대한 열쇠 꾸러미를 들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보여주는데 견학 온 느낌이 들어서 재밌었다. 저기 밑에 내려가면 굉음을 내며 기계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데 일련의 호러 영화들이 떠올라서 여차하면 달리려고 최대한 계단 가까이 서있었다.
애들이랑 놀기 딱이다. 나무 토막을 굴리고 해먹에 매달리고.
멀리 코무날카를 바라보며 내 기분만은 토스카나의 태양 아래. 으흐흐
더위에 지쳐서 누워있는 당나귀 같은 자전거.
가재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가재가 상징인 도시. 5분만 달리면 쩬트라스이다.
문 닫을 준비를 하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으면서 저녁의 마지막 기차를 기다렸다. 자전거를 올리고 적당히 빈자리에 앉는다. 내 앞자리에는 고향집에서 빌니우스로 돌아가는 듯 보이는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엄마가 넣어줬을 오이며 병조림이 가득 든 마트 가방이 발아래에 놓여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에 갔다가 돌아가는 학생이었을 거다. 9월 신학기를 생각하면 지난 8월은 그간의 8월과는 좀 다른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가을은 또 늘 같은 기분으로 흘러갔다. 막 추워지기 시작할 때와 달리 12월도 이제 아늑한 시기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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