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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

[리투아니아생활] 김치 얻어 온 남편



집에 돌아 온 남편이 싱글벙글하며 내민 봉지 꾸러미. 무엇인지 맞춰보라해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별 냄새가 없고 (나중에 남편은 어떻게 아무 냄새를 못 맡을 수 있느냐고 의아해함. 자신은 단번에 알아차렸다고. 난 미각은 물론 후각도 퇴보하고 있는 듯 -.-)




봉지를 열어 젖히니 뭔가 감이 오기 시작.




바로 김치였다. 그 순간 며칠 전의 대화가 뇌리를 스친다. '남편: 집에 김치 있으면 먹을거야?' '나: 설마 안먹겠다고 떼쓰진 않겠지' 그리고 지퍼락을 개봉하는 동시에 순식간에 코를 덮치는 익숙하고도 감칠맛 나는 김치 냄새와 함께 그 간의 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제부터인지 남편과 항상 같은 정거장에서 내리던 리투아니아 여자가 있었는데 가끔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시아 남성과 내리곤 해서 남편은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는 버스 안에서 수첩에 그림을 그리는 남편을 보고 역시나 자주 보는 남자이니 친근함에 무슨 그림을 그리냐고 물어보며 겸사겸사 말을 걸어왔고. 그렇게 가끔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은 여자가 가끔 한국으로 출장을 가는 회사에서 일 한다는것을 알게됐고 여자로써는 자신의 한국 경험담을 공유할 수 있는 이 리투아니아 남자가 한국인과 결혼했음을 알게 된것이다. 우리가 한국을 갔을때 여러번 방문했던 피규어 가게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게다가 이 리투아니아 여인은 김치를 담그면 한번에 20포기씩이나 만든다는 김치광...




한국에서는 저런 김치 한포기쯤 대수롭지 않게 다져서 부침개를 해먹거나 김치 볶음밥 같은 간식거리에 투척할 수 있겠지만...나는 이 희귀 식물을 <마션>의 와트니 대원이 감자를 세는 마음으로 자르고 또 잘라서 코딱지 만큼 덜어 먹는다. 그런데 난 왜 화성에 남겨진 와트니 대원처럼 감자를 재배할 생각을, 김치를 담궈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걸까. 화성의 열악한 재배조건과 싸우는 와트니 대원과 비교하면 난 김치 생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구비했는데 말이다...빌니우스에서 우리는 따로 김치를 담궈먹지 않는다. 한국 음식 먹기 정말 쉬운 중국에서도 일년 반동안 난 따로 김치를 먹지 않았는데 먹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한것도 아니고 단지 언젠가 떠날 그곳에서 중국 음식을 먹는 횟수가 줄어드는것이 슬플 정도로 중국 음식이 정말 너무 맛있었기 때문에. 새벽 6시에 학생 식당이 문을 열자 마자 난 마파두부를 먹으러 달려가곤 했다. 그땐 신기하게 잠도 안와서 수업 전에 새벽 시장에 가서 우육면을 사발로 들이키고 만두 사냥에 나서는 날도 많았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일년에 한 두번 정도 식당의 식자재를 네덜란드에서 주문하면서 신라면 이나 종갓집 포장 김치를 세네봉지 정도 시켜먹곤 하는데 먹으면 참 맛있는 김치이지만, 남편은 김치와 막걸리와 냉면을 사랑하지만 그냥 귀찮기도 하고 이곳의 식재료로 이곳의 음식을 만들어먹는게 편하기도 하고. 그런데 리투아니아인이 담근 김치를 먹고보니 자라나는 아기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소울 푸드 김치 제조에 들어가야 하는건지 고민하기 시작함...




리투아니아인이 담근 내 나라의 가장 '내 나라적인' 음식을 맛보는 느낌은 참으로 생소했다. 김치의 맛은 서둘지 않고 성실하게 정갈하게 정말 잘 익은 묵은 김치 맛이었다. 무나 파와 같은 김치속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김치를 먹고 외국인이 만든 김치라고 생각했을 한국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보존 용기에서 지퍼락에 담긴 김치를 꺼낼때의 기분은 엄마가 김치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마지막 남은 김치 통을 열어서 마지막 배추를 꺼내 꽁지를 자르고 국물까지 싹싹 부어서 비닐을 돌돌말아 쓰레기통에 버릴때의 그런 느낌. (실제로 이런 장면을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럴법한 장면 아닌가...)




김치를 잘 잘라서 나의 보존 용기에 옮겨 담았다. 마침 흰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에 살짝 김칫 국물이 튀었다. 점심 먹고 교복 하복 상의에 김칫 국물 튄것 마냥. 밥 다 먹었으니 빨리 매점가서 달달한거 먹고 싶다는 욕망을 하늘로 치솟게 했던 김칫 국물의 흔적.




이 리투아니아인은 빌니우스가 아닌 인근 도시 카우나스에서 기차로 출퇴근을 해서 시간을 내어 만나고 싶어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언젠가 리투아니아 여인이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음 좋겠다. 김치 기술도 전수 받고. -.- 저 빈 용기에 답례로 무슨 음식을 넣어줘야 할까. 양념에 잰 불고기?




김치를 마지막으로 먹어 본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구만. 오랜만의 사첩반상...하지만 밥의 모양새가 좋지 않다. 한국쌀과 거의 가까운 숏 그레인 쌀을 보통 먹지만 다 떨어져서 집에 있던 롱 그레인을 삶았는데 이 쌀은 필라프나 동남아시아 볶음밥 같은거에 더 적합한 쌀. 게다가 한국밥 짓듯 물을 넣으면 저 꼴이 된다. 차라리 뜨거운 물을 부어 김치를 걸쳐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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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좀좀이 2016.02.11 00:50 신고

    한국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가 다 없었을텐데 한국 김치와 같은 맛을 만들어냈다니 놀라워요. 그 리투아니아인이 어떻게 김치를 담그고 있는지 저도 궁금해지네요!^^
    영원한 휴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oulSky 2016.02.11 06:52 신고

    오 대단하네요. 저도 해외에 거주하다 보니까 특히 김치 생각이 많이 나요

    • 영원한 휴가 2016.02.13 00:37 신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계시네요. 종종 놀러갈게요. ㅋㅋ캐나다에 교포들 많아서 한국 식품 구하기 어렵지 않을것 같아요. 꼭 맛있는 김치 발견하시길 ㅋㅋ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02.12 18:59

    리투아니아인이 담근 묵은김치라니 와ㅎㅎ 김치 얻어오신 남편분도 센스 좋으시구, 정말 희한하고 멋진 경험이네요^^! 서구권분들이 김치 좋아하고 잘 드시는 경우를 보면 정말 신기해요.

    • 영원한 휴가 2016.02.13 00:38 신고

      남편에게 친절하게 김치가 대구식이라고 알려줬다고 합니다. 서울식이 아니구요...서울김치랑 대구김치가 뭐가 다른진 모르겠지만요. 서울식은 고춧가루 양념이 적어 좀 산뜻한가..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02.13 03:47

    와우...그냥 김치사진만 봤을땐 외국인이 담은 김치인줄 전혀 모르겠어요.
    김치찌개 해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 묵은 김치입니다.

  • 체리양네Enid 2016.02.18 12:41 신고

    버스-김치로 연결된 인연이라니, 리투아니아인이 담근 김치가 저토록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을 갖췄다니, 게다가 맛있다니!!!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친정 엄마의 김치를 얻어다 먹을 뿐, 아직 제대로 된 김치를 담가 본 적이 없는지라 좀 부끄럽기도 하구요. ^^;

  • 김치에 대해서 2016.02.18 21:30

    제 여자친구를 같이 만든 김치를 좋아하셔서 다행입니다. ㅎㅎ

  • 익명 2016.02.18 21:39

    비밀댓글입니다

  • soniuke 2016.03.20 18:06

    리투아니아 남자친구를 만나고 일년에 2번정도 빌뉴스를 방문합니다. 언제 한 번 갈때 김치 가져다 드리고싶네요 :) 산후조리 잘하시길 바라요!

    • 영원한 휴가 2016.03.20 20:02 신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빌니우스에 가끔 오시는 분이라니 반갑네요. 빌니우스도 이젠 한국과 그다지 멀지 않은곳 처럼 느껴집니다..

  • liontamer 2016.04.17 16:00 신고

    김치 맛있어보여요 :) 해외에서 살게 되면 정말 김치 담기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예전에 러시아에 있을때 큰맘먹고 비싼 무 한 개 비싼 배추 한포기 사다가 김치를 담았는데 물이 달라서 그런지 확실히 우리나라에서 담은 것만큼 맛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더라고요. 그런데 러시아에서 산 무는 너무 늘씬하고 가느다랗고 배추도 얄팍해서 채소마저 그 나라 사람들 체형을 닮은건가 하고 슬퍼했던 기억이 나요. 리투아니아 무랑 배추는 어떨지 궁금해요 :)

    • 영원한 휴가 2016.04.18 15:25 신고

      저는 배추 겉절이만 한두번 담아봤네요. 무 얘기 나오면 친구들한테 다리 굵으면 한국에선 무다리라고 한다고 재미삼아 얘기해주는데...그 비유를 별로 실감할 수 없는 무들이죠. 배추도 그래요. 러시아랑 비슷할듯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