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들 2
기대를 많이 하고 보았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좋아하고 '인투 더 와일드'나 '와일드' 같은 느낌의 영화를 좋아해서 분명 접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보는 동안 재미있었고 촬영도 음악도 아름다웠고 뭉클해서 눈물이 나오는 부분도 있었는데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에 잠겨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강요받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다시 한번 강하고 자주적인 캐릭터를 창조하고 싶었던 프랜시스 맥도만드의 개인적 욕심 같은 것도 느껴졌다. '파고'도 너무 좋아하고 '쓰리 빌보드'에서의 연기는 정말 너무 멋있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어떤 캐릭터이길 원하는지가 너무 분명히 보인다. 그런데 개척자적 느낌을 주기에는 좀 덜 억척스러웠고, 자유롭고 거침없고 싶었지만 뭔가 가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실존 인물들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가 접목된 드라마를 만든것이라면 차라리 단단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자연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관조적인 캐릭터였더라면 더 몰입이 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보는 내내 '인투 더 와일드'의 캐서린 키너와 '와일드'의 리즈 위더스푼을 떠올렸다. 하지만 '노매드는 현시대의 개척자와도 같아'라는 극 중 결연한 대사에 걸맞으려면 두 배우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을 거다.
감독은 절대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뭉클하고 싶었던 영화는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보면 은근히 아주 흡족해할 만한 영화이다. 정말 나쁜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더러 나쁘다고 해도 그것에 죄의식을 느끼거나 하지 않을 거다.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힘든 가운데서도 서로 의지하며 살길을 찾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함을 느낀다면 나쁜 사람들은 이때다 하고 더 많은 나쁜 짓을 신나게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의미를 부여한 듯 무슨 소용이야. 우린 저 사람들에 비하면 가진 것이 많아. 물질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그것 말고도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많지. 지금 우리의 삶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 우리가 얽매인 것들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회귀해서 최소한의 삶을 사는 것만이 우리를 이런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자유롭게 할 거야'. 이런 생각에 물론 공감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행복을 재정의하고 포기할 것과 가져갈 것의 기준을 재정립하며 오히려 더 많이 원하는 스스로를 탓하도록 하고 빈곤과 불평등을 내면화하게 하는 것이 결국 그들이 끈질기에 때리고 또 때리면서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하는 방식은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
노매드 랜드에서 프랜시스 맥도만드가 '난 홈리스가 아니라 하우스리스야'라는 대사를 한다. 그 대사를 듣고 떠오른 사람 둘이 있으니 '소공녀'의 미소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이다. 미소는 가계부에서 담배값과 위스키 한 잔을 지우는 대신 월세를 지우고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텐트를 친다. 바퀴 네개가 달린 움직이는 집에서 사는 노매드랜드의 유목민들을 생각하면 소공녀의 미소야 말로 천막을 치는 진정한 유목민이 아닌가.
귀엽고도 잔혹한 블랙 코미디 속의 영원 불멸 캐릭터들. 미소는 나에게는 '천국보다 낯선'의 에바와 '영원한 휴가'의 앨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이고 이런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참신했던 캐릭터이며 잘 까지지 않는 삶은 달걀을 마주할 때에 생각나는 사람이기도 하다. 만추의 탕웨이 코트만큼 미소의 코트도 좋아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차라리 없는 게 좋을 달콤 씁쓰름한 환영이다. 이런 캐릭터의 이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는 불우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다 상징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보는 것이 마음 편하다. 당장 그 많은 짐을 짊어지고 또 어딘가로 여행할 내일의 그녀를 걱정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녀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자면 더 불안하다.
미소가 남의 집을 열심히 청소하고 잠시 발을 뻗고 앉아서 햇살을 쏘이는 순간에만 감정이입을 한다. 여유롭게 위스키 한 잔에 담배 한대를 문 그녀의 머릿속도 별수없이 내일의 삶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차 있을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포기할 것 들이 많이 생기는데 포기하더라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 않아 그냥 함께 가기로 결정하는 것들이 있다. 내 곁의 누군가가 미소식의 자유와 품위 유지권을 추구한다면 난 결코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미소는 단 한번뿐인 인생이라는 생각으로 저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속 보이는 행복론을 펼치지도 않는다. 어쩌면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뭔가를 가진다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 발아하기 직전의 상태인지도 모른다.
오래 전에 봐서 디테일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너무 불쌍한데 너무 웃기기도 하고 미안하고 슬프고 복잡한 감정이 스쳤던 영화. 가장 기억에 남는건 오토바이 타면서 명함 꽂아 넣는 스킬로 빵에 들어있는 스티커 같은 거 꽂아서 사람을 죽이거나 굉장히 멀리 뭔가를 던져서 불내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이 연상호의 '염력'을 엄청 욕하지만 류승룡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설정을 하고 그걸 장면으로 결국 구현해내고 마는 것은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내가 약간 그런 식의 유머를 좋아하는 것 같다.
수남은 모든 불행의 집합체이다. 그렇게 원하던 집을 달동네에 겨우겨우 얻었는데 남편은 자살을 시도하다 식물인간이 되고 혼자서 대출금과 병원비를 벌어야 하니 몸이 부서저라 일한다. 심지어 힘들게 마련한 자기 집에 살지도 못하고 세를 주고 고시원에서 산다. 수남은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점점 더 불행해지고 불행을 탓할 여력도 없다. 그러니 하우스푸어라는 단어도 사치다. 단지 가난하다는 말로는 그녀의 인생은 설명이 안된다. 세입자한테 월세를 올려달라는 갑질을 하지만 수남은 결국 홈리스이자 마음의 집조차없는 하우스리스일뿐이다. 미소 같은 친구가 있었더라면 대출 서류를 작성 중인 수남의 뒤통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수남의 인생은 좀 나아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