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의 봉지쌀
여행 다닐 때 이런 쌀이 세상 방방곡곡에 있었더라면 혹은 마트 어딘가에 있었을지 모르는 이들을 발견했더라면 그 여행들은 어떤 면에서는 편했을 것이다. 뻬쩨르에서는 대학 기숙사의 법랑 냄비를 홀랑 태워먹고 동행과 깔깔거리며 한밤중에 새까맣게 탄 냄비 바닥을 씻기도 했고 지은 밥을 락앤락에 넣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도 했으니 냄비에 쌀밥을 짓는 것은 새로운 여행지를 탐색하는 것만큼의 일상이었다. 간장과 버터에만 비빈 밥이어도 껍질을 벗긴 프랑크 소시지 하나만 곁들여도 맛있었던 소박하고도 풍요로웠던 어떤 여행지의 끼니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빌니우스를 여행하던 첫날 지금은 사라진 우주피스의 호스텔 부엌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냄비에서 물이 팔팔 끓고 있었다. 뒤이어 나타난 여인이 이상한 봉지를 통째로 집어넣는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 햇반 정도의 발명품은 아니지만 물에 넣기만 하면 봉지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쌀들이 당연하면서도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2006년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이동할 때엔 15명이 넘는 북한 아저씨들이 기차에 우르르 올라타셨다. 약간 뭉클하면서도 낯설고 두렵기도 했던 순간. 기차로 며칠을 이동하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우린 딱히 배를 채울 만한 음식들을 준비하지 않았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삐로그며 맛있는 것을 많이 판다는 소릴 들어서 그랬는지 하지만 정차할 땐 귀찮기도 하고 추우니 잘 나가게 되지도 않았고 겨울엔 음식 장수들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준비성이 부족한 사람들에겐 또 나름대로의 구세주들이 생긴다. 아저씨들은 김치며 라면이며 밥 등을 나눠주셨다. 저 밥이 따뜻하진 않았던 것 같다. 차갑고 딱딱했지만 열차에 늘 펄펄 끓는 온수가 있었으므로 도시락 라면과 함께 무리 없이 맛있게 먹었다.
저때는 내가 저런 소련제 법랑 냄비를 지척에 두고 살게 될 줄 몰랐었다. 뻬쩨르 어느 컬리지 기숙사의 공동주방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냄비를 골라 그나마 가장 동글동글했던 쌀을 씻어 밥을 지어 오이피클과 소시지와 먹었다. 뻬쩨르의 우니베르막에서 저 간장을 집었던 순간, 올리브를 좋아하던 언니, 김치가 되어준 오이피클, 아마도 테플론이 다 벗겨진 프라이팬에서 계란 프라이가 되지 못해 스크램블이 되었을 어떤 계란의 운명. 무게를 재서 살 수 있었던 웨하스를 보고 기뻐한 일. 프린트해온 지도를 넘겨보던 순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스매싱 펌킨스의 음악 등 이 적나라한 식사의 현장이 기록된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해 준다. 하지만 밥은 의심할 여지없이 태웠다.
뻬쩨르에서 밤 버스를 타고 이동한 헬싱키에는 뻬쩨르에서 남은 밥을 아예 담아갔다. 일본 식재료를 파는 가게에서 3분 마파두부를 사서 부어 먹었었다. 뻬쩨르산 소시지도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빌니우스의 마트에서 사 온 이런저런 식품들과 뻬쩨르 간장을 부어서 먹던 밥. 아마 이렇게 먹고 있던 순간. 여유롭게 봉지쌀을 집어넣던 여행객과 조우했다. 실제로 이 여행들을 끝으로 난 밥은 더 이상 해 먹지 않았던 것 같다. 호스텔에서 외국 아이들이 바로 이게 고향이 맛이라며 감탄하면 먹던 일련의 음식들을 눈동냥으로 따라먹었고 각국의 조악한 인스턴트 라면들을 맛보는 재미로 여행을 다녔다. 봉지쌀이 있었더라면 간혹 밥을 지어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봉지쌀을 집에 저렇게 한 상자 정도는 늘 사놓는다. 쌀을 씻고 불리고 취사 버튼을 누르고 뜸 들이고 기다리기 싫을 때. 딱 한 봉지 정도만 따뜻한 밥이 먹고 싶을 때 보통 사용한다. 물론 밥의 질은 밥통에 지은 쌀밥에는 한참 못 미친다. 밥통으로 지은 쌀밥에서도 사실 한국의 집밥처럼 반질반질한 윤기를 기대하긴 힘들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이 봉지쌀을 여름 별장에 갈 때 잘 들고 간다. 여름휴가의 꽃 샤슬릭을 정성스레 만들어서 진한 토마토소스를 얹고 봉지쌀로 지은 밥을 함께 먹는다.
쌀의 세배 정도 되는 물이 끓으면 넣고 15분 정도 더 끓이면 물이 줄어들면서 봉지도 점점 통통해진다. 이것을 포크로 잘 건진다. 물이 너무 적으면 봉지쌀마저도 냄비 바닥을 태울 수 있으므로 충분히 넣는 것이 좋다.
상당히 뜨거우므로 좀 기다렸다가 가위로 잘라서 잘 뜯는다. 초기에는 이 쌀이 너무 재밌어서 풍요로운 쌀의 나라인 한국으로 이 봉지쌀을 선물처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한국인들에게는 참 맛없는 쌀이 아니었을까. 이 쌀로 해 먹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하고도 맛있는 요리라면 아마 쁠롭일 것이다. 우즈벡 볶음밥이라고 하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할 민족들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그냥 쁠롭. 볶음밥과 리조토의 오묘한 중간 지점 같은 쁠롭. 고슬고슬함과 질퍽함에 두 다리를 다 걸치고 있는 참 맛있는 쁠롭. 오랜만에 한 번 만들어봐야겠다.
뭐라도 넣지 않으면 한없이 볼품없는 우리 동네의 라면이지만 가끔 정성들여 끓여 먹으면 그 또한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