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어 112_Tūris 함량
세상에 여러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 꼭 해야 하는 일을 굳이 안 하는 것. 굳이 안 해도 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 그리고 1) 평일 2) 대낮에 3) 마트의 독주코너를 4) 말끔한 정신으로 5) 어슬렁거리다 6) 구매의 목적을 창조하고 7) 세상과 나를 설득하는 것.
이들 중 제일 까다로운 즐거움은 단연 가장 후자가 아닐까 싶은데 그것이 즐거운 행위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조건이 성립되어야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복잡 미묘한 즐거움을 만끽하기 시작하면 대체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질척이다 결국 모두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마치 정도를 넘겨 근본 없이 희석된 독주처럼. 꽁꽁 언 바닥에 엉겨 붙은 지난밤으로부터의 토사물처럼.
술을 선물하는것을 좋아하는데 술이든 뭐든 딱히 유익하지 않은 것을 선물하는데서 오는 특유의 쾌감이 있다. 유익함의 개념은 상대적이겠지만 스스로 사기엔 망설여지는 것을 타인이 부러 가져다주었다는 것에 대한 상대의 희열을 술병을 건네는 순간 즉각적으로 전달받는 즐거움도 있다. 술 주변을 배회하는 또 다른 인물들과 슬며시 스치는 것도 알게 모르게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대낮에 술 고르는 사람들을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어제부터 취해있으며 그런 상태에서 술을 고르는 것은 사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불온한 감상을 혼자 키득거리며 나열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마 술 마시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받은 경험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때를 놓쳐버리는 행위들이 있다. 때맞춰서 뒤집지 못한 팬 위의 토스트용 빵, 반숙하려 했으나 완숙이 되어버린 달걀, 망설이다 아는 체하지 못하고 5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만나게 되는 지인, 두 발짝 늦게 걷는 바람에 낙엽을 날려 모으는 기계와 발맞춰 걷는다거나 최소한 반년은 묵혀두고픈 바닐라 익스트랙트는 보통 바닥을 보일 무렵에야 새로 만들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바닐라 익스트랙트 제조를 위하여 핀란디아 보드카 최소량을 산다. 딱히 개성 있는 보드카는 아니지만 모든 보드카들이 힙플라스크 형태의 유리병에 담긴 작은 용량을 만들진 않는다. 집어넣어야 하는 바닐라빈의 양과 가격을 생각하면 700밀리나 되는 그레이 구스를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세 줄기의 바닐라빈엔 200ml도 많은 양이므로 50 그람 정도는 덜어내어 공손하게 마신다.
드라마 '킬링이브'속 중년의 킬러가 동료 요원의 아들 장례식에서 보드카 두 잔을 동시에 주문하면서 그런다. '내가 러시아인이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마시는 거야'라고. 자신의 삶에 도움 되는 것들을 탁월하게 선별해 내는 우리는 모두 능력자이다.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괜히 돕는 게 아닌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