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완소 달걀 영화들
매해 여름이 되면 자동적으로 꺼내 들게 되는 헤밍웨이의 수필이 있다. 2년 전 여름 빌니우스로 여행 오셨던 이웃님이 남겨 주고 가셨는데 작년이랑 올해 고작 다시 읽었을 뿐이라 매년 읽는 책이라고 하는 게 웃기지만 뭐 어제 막 크로스핏 시작한 사람이 '요즘 나 매일 크로스핏 하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거니깐...
책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가 연필 깎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마로니에가 만져질 것도 같고 파리의 책방과 카페를 들쑤시고 다니는 젊은 헤밍웨이의 100년 전 허기가 내 위장을 숙주로 리플레이되는 것도 같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선택되고 강화되며 생존한 청춘의 기억들에 그때는 없었을 통찰과 회한을 더해 끄적일 때 작가는 행복하면서도 슬펐을 것 같다.
사실 헤밍웨이를 통해 듣는 다른 작가들 이야기가 은근히 재밌는데 그렇게 알게 된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들도 매번 덩달아 같이 읽게 된다. 특히 '달걀'이라는 단편이 웃프고 귀엽다. 분량도 트롤리버스 대여섯 정거장 정도로 아주 군더더기 없다.
'달걀'은 어린 시절을 양계장에서 보내서 자신이 이토록 암울한 사람이 된 거라 생각하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운영했던 양계장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일들이 간략하고도 담담하게 묘사된다. 이쯤 되면 셔우드 앤더슨을 시대를 앞서간 동물 해방의 선구자이자 비건의 기수라고 해도 좋겠으나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엉뚱하게도 좋아하는 영화 속의 수많은 달걀들이었다는 것.
달걀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다면 영화 속의 달걀들은 얼마나 강력한 존재여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축가가 내용물을 비워낸 달걀 속에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우주를 유영한다거나 날아오는 날달걀을 피하다가 운 좋게 총알이 비껴나가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처럼 드라마틱한 전개에 달걀이 일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속 달걀들은 자신이 짊어지고 부화된 소명을 다하려 애쓸 명분을 깨닫기도 전에 인간에 의해 무참히 깨뜨려진 평범한 달걀들이었다. 하지만 냉장고 속에서 딱 하나 남은 달걀과 마주했을 때 미묘하게 안도했다거나 실수로 땅에 떨어뜨린 미끄덩한 달걀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달걀은 충분히 우리에게 인정받는 존재라는 것. 그들도 한때는 완전식품으로 추앙받으며 황금기를 누렸다는 것. 달걀들 자신은 그것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슬픈 숙명이지만.
셔우드 앤더슨이 묘사하는 비참한 닭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 와서 어떤 닭의 삶이 더 행복한지 어떤 닭의 알을 먹는 것이 더 도덕적인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싶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어떤 삶도 천국이고 한 발자국 들여놓으면 모든 것이 지옥이니 돈 몇 푼을 더 내고 무항생제 닭의 알을 먹는다고 우리가 친환경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달걀 맛이 나는 식물성 달걀을 먹는다고 켄터키의 방목된 닭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저 내 앞까지 용케 굴러온 달걀 한 알에 감사할 뿐.
그래서 오늘도 영화 속 주인공이 부엌 구석에서 달걀을 풀고 있지나 않을까 숨죽여 지켜본다. 어제만 해도 트란 안홍의 '프렌치 수프'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열심히 달걀을 풀어서 오믈렛을 만들었다. 나는 삶은 달걀을 깔 때마다 달걀 한 판을 사들고 친구집을 향하던 '소공녀' 이솜의 말간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하여 저물어가는 여름을 기념하며 나의 소중한 달걀 영화들을 추억해 보기로 했다. 대부분은 인생 영화이고 일부는 달걀 장면이 기억에 남아 소환했다.
01.Funny games (깨지는 달걀)
02.Rocky (날달걀 칵테일)
03.Tampopo (날 노른자 플러팅)
04.Munich- edge of war (영국 총리의 삶은 달걀)
05.Saltburn (영국 평민의 써니사이드업)
06.Big night (이탈리아 이민자의 프리타타)
07.Fargo (미국 남편의 오믈렛)
08.Phantom thread (아내의 독버섯 오믈렛)
09. 소공녀 (미소의 달걀장조림, 달걀말이, 백숙)
10.Bagdad cafe (달걀 마술)
1.Funny Games
처음 봤을 때 그 어떤 B급 호러보다 더 끔찍했던 명작. 독일어 원작도 할리우드 리메이크작도 똑같이 섬뜩하고 지금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달걀이 떨어져 단지 달걀 때문에 마트에 가는 게 귀찮을 때마다 늘 이 영화를 떠올린다.
달걀을 그저 옆집에서 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가 한 가구당 한 알의 달걀을 빌리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이웃집 초인종을 누른다면 내 이웃은 난처해할 것이고 그 망설임이 겉으로 드러나 쪼잔해 보일까 봐 불안해할 것이고 만약 그가 퍼니게임을 본 사람이라면 아마 공포에 질릴 것이다. 나는 그런 가여운 이웃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달걀은 빌릴 수 없다.
달걀을 빌리러 가서는 살인 게임을 벌이는 두 청년의 이야기. 삶은 한편으론 단단한 골프공처럼 그 어떤 장타에 휘둘려도 어떤 강력한 바람과 벙커도 다 뚫고 목적지에 도달할 듯 오직 내 의지와 욕망의 영향 아래에만 놓여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타인의 폭력과 혐오가 끼어들면 그 어떤 단단했던 삶도 그저 날달걀처럼 산산조각 부서질 뿐이다. 이 청년들이 달걀 대신 자전거 바퀴에 바람 넣는 펌프 같은 것을 빌리러 왔다면 영화 초반의 찝찝함과 치졸한 아우라는 결코 조성되지 않았을 거다. 손을 벗어나자마자 힘없이 깨지는 달걀은 평온한 일상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미미하면서도 완벽한 파괴이다.
2. Rocky
록키(https://ashland.tistory.com/m/287)의 처진 눈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가 아폴로 크리드를 제압할 때. 꽁꽁 언 고기에 펀치를 날릴 때. 퉁퉁 부은 눈으로 애드리안을 울부짖을 때. 모두 아니다. 바로 다섯 개의 날달걀을 깨뜨려서 원샷으로 흡입할 때이다.
어두운 방에 새벽 알람이 울린다. 냉장고 불빛이 방안을 환하게 비춘다. 록키의 냉장고 위에는 날달걀 전용컵이 놓여있다. 달걀 한 개를 깨어 넣을 때마다 록키의 눈은 커지고 급기야 세 알째쯤에선 잠에서 깨어나겠다는 의지로 처진 눈을 있는 힘껏 깜박거린다.
관찰 예능을 보면 라면 하나에 달걀 네 개를 깨뜨리거나 달걀 프라이 네 개를 김치볶음밥에 얹는 등 달걀 플렉스를 하는 남자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그곳이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이든 옥탑방이든 반지하이든 그 달걀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플렉스라는 것이 가진 자의 돈자랑만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을 때에도 우리를 지탱하고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존재를 지칭하기도 한다면 달걀 플렉스의 원조는 아마 록키의 실베스타 스탤론이 아닐까. 그가 가졌던 유일한 단백질과 깡의 원천. 혹은 그게 사실이라고 그가 믿어 의심치 않아 그를 앞으로만 나아가게 했던 존재이다.
3. Tampopo
록키의 날달걀 마시기 타이틀 방어전에 출전기회를 얻을 수 있는 날달걀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타미 주조의 '탐포포' 속 날달걀이 유일하지 싶다.
얼마 전에 본 빔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도쿄 공공 화장실 미화원으로 일하는 야쿠쇼 코지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야쿠쇼 코지가 여인의 볼뽀뽀를 받고 어쩔 줄 몰라 수줍어하는 장면에서도 탐포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공공 화장실을 구석구석 성실히 청소할 때도 방안의 식물에 건전한 분무질을 할 때에도 대중목욕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단골 식당에서 더할 나위 없이 서민적인 요기를 하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고급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시켜놓고 여성과 달걀노른자를 서로의 입에서 입으로 옮기던 젊은 야쿠쇼 코지였다.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그 배우의 과거 작품들을 떠올리게 된다. 상을 탄 천만 배우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길을 택한 인물의 여러 자아 중 하나가 계속 배역을 바꿔 변해가는 게 선명히 보인다. 나이가 들어가며 배우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것이 작품 선택에 영향을 준다면 배우의 필모그래피는 결국 하나의 자아가 변모하는 이야기와 다름 아니다. 그런 궤적이 보이는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들을 좋아한다. 탐포포의 퇴폐적인 야쿠쇼 코지는 쉘 위 댄스와 실낙원을 거쳐 퍼펙트 데이즈에 안착한 것일까.
탐포포에는 거지들이 식당 주방에 몰래 들어가서 후다닥 오므라이스를 만들어내는 명장면도 있지만 야쿠쇼 코지의 노른자 플러팅을 이겨내기란 힘들다.
4. Munich -The edge of War
2차 세계 대전 발발에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뮌헨 협정을 둘러싼 이야기. 1차 세계 대전에서 피를 본 유럽 국가들이 오스트리아를 먹고도 아직 배고파하는 나치 독일에게 체코의 일부를 무슨 스톡옵션처럼 내어주고 히틀러에게서 받아낸 일종의 평화 각서가 뮌헨 협정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반년만에 협정을 파기하고 남아있던 체코를 전부 차지함은 물론 폴란드까지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제레미 아이언즈는 당시 뮌헨 협정 체결의 중심에 있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으로 나온다. 경제 대공황과 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다시 전쟁을 시작하기 부담스러웠던 영국은 팽창 중인 히틀러와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평화 협정을 맺는다. 그러니 히틀러가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하고 끝냈으면 처칠이란 인물은 등판도 못해보고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저지하고 세계 평화를 이뤄낸 역사적인 인물로 남았겠지만 알다시피 역사는 전혀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뮌헨 협정으로 시간을 번 영국이 군사력을 키워 결국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보고 체임벌린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다. 히틀러 본인도 당시 바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뮌헨 협정에 서약한 것을 패배의 원인으로 보고 특히 체임벌린을 나치 멸망의 원흉으로 보았다고 한다.
평화에 대한 메타포로만 가득 찬 뮌헨 협정을 앞두고 체임벌린은 상기된 표정으로 아침을 먹는다. 여느 영국 국민들의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을 총리의 소박한 식사 장면이 클로즈업된다.
소금을 미리 따로 뿌려놓고 깐 달걀을 들고 찍어먹는 거라면 체임벌린의 달걀 취향은 완숙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에그스탠드에 놓인 달걀 위에 뿌릴 소금의 양까지 미세하게 조절하고 싶어서 미리 부어놓고 손으로 따로 집어서 뿌릴 생각인지도. 물론 1938년 9월의 어느 날 영국 총리의 달걀 취향까지 고증해서 이 장면을 찍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총리가 입맛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는 것.
체임벌린은 달걀을 까며 보좌관과 대화한다. 마치 달걀을 까며 어깨에 전화기를 끼고선 미용실에서 마주친 이웃집 여자를 험담하는 여자처럼. 히틀러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며 앞으로 맺어질 협정에 잔뜩 고무되어 있다.
역대 영국 총리 수행 평가에서 0점을 받았지만 그도 그저 이런 평범한 아침을 먹으며 최선의 결정을 내렸을 뿐이라며 이제는 좀 관대해지자고 얘기하려는 걸까. 세상의 많은 비극을 물론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 탓으로 돌릴 순 없다. 히틀러에 선동당한 수많은 군중들, 홀로코스트를 적극적으로 방조했던 이웃국들.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여전히 수많은 약소국을 분할하고 양도하는데 귀한 서명을 할애하는 국가들. 역사는 대중이 최선이라고 믿고 선택한 결정들이 모이고 모여서 움직이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지도자의 역량인 것이 맞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 시럽을 뿌린 팬케이크, 김과 김치를 곁들인 밥, 평양냉면 한 사발, 한 장의 난과 커리 등등. 회담장에 모여 단체 사진을 찍는 지도자들이 먹었을지 모를 아주 소박하고 평범한 아침식사들을 상상하게 된다.
5. Saltburn
야망에 불타는 옥스퍼드 대학생 배리 키오건. 영국 최상류 층 인기남과 의도적으로 친분을 다지고 그의 가족이 머무는 거대 영지에 초대된다. 그는 친구 가족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가고 결국 그들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배리 키오건이 저택에 초대되어 먹는 첫 아침 식사 장면이 재밌다.
아침으로 뭘 먹겠냐고 물어보니 망설이다 하는 대답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사실은 다른 음식들은 뒤에서 양껏 덜어서 먹으면 되고 그냥 달걀 취향을 물어본 것이다.
자신의 달걀 취향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게 두려웠던 걸까. 배리 키오건은 뭔가에 홀린 듯 덜 익힌 달걀을 주문한다. '노른자는 꼭 잘 익혀주세요'란 말을 간신히 참아낸 것 같다. 잠시 후 그 앞에 놓인 달걀은 덜 익은 흰자가 화면을 뚫고 흘러나올 것 같은 극단적인 써니사이드 업. 그는 결국 달걀을 먹지 않는다. 욕조에 남은 귀족 동창의 정액은 배수구 끝까지 핥았지만 자기 접시에 담긴 흐물거리는 단백질은 거부함으로써 일말의 자존심과 취향은 지키려고 한 걸까.
삶은 달걀이든 오믈렛이든 변수가 많아서 취향껏 요리하기 쉽지 않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섬세함은 요구된다. 돌솥밥을 짓는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을 예측하고 불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불도 뚜껑도 제때 끄고 적시에 열어야 한다. 물론 달걀이 흐물거리지 않을 때쯤 대충 뒤집고 밥상 다 차리고 와서 불 꺼도 충분히 맛있는 달걀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취향이 꼭 고급스럽지 않더라도 꼭 취향 부자가 아니더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관해 확고한 취향과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단단함이 느껴져서 좋다.
자기 앞에 놓인 달걀을 사양하는 배리 키오건은 빈껍데기만 남은 부자들의 일상에 큰 문제없이 잘 융화된다. 어차피 그곳은 타인의 취향 따윈 중요하지 않은 곳, 사람 간의 진심이 부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6. Big Night
이제 달걀을 푼다.
빅 나이트( https://ashland.tistory.com/m/804) 는 97년 영화 잡지 시사회에서 본 이후로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음식 영화이다.
그즈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음식(이 나오는) 영화들이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301 302'처럼 음식이 딱히 먹고 싶어지지 않는 영화들이었다면 빅 나이트를 계기로 '음식남녀', '바베트의 만찬' 같은 영화들을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탠리 투치의 음식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책 (https://ashland.tistory.com/m/1248) 에는 고맙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빅 나이트의 백미인 프리타타 엔딩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이 장면은 한 번의 끊김도 없이 실시간으로 촬영해야만 한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6분 정도의 프리타타 씬에 대화는 거의 없다. 배우들의 동선은 자로 잰 듯 정확해야 했고 무엇보다 프리타타는 절대 팬에 눌어붙지 않아야 했다. 책 중 일부를 옮기자면,
'리허설 때 사용한 팬은 다른 소품들과 마찬가지로 60년대에 제품이거나 그 당시 물건처럼 보이는 소품들이었다. 테플론을 입힌 팬처럼 그 팬에 프리타타가 눌어붙지 않아 내가 이 장면을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란 희망 따윈 애당초 없었다. 역시나 프리타타는 바닥에 달라붙기 시작했고 난 당황해서 허둥됐다. 계획대로 촬영되지 않아 결국 편집을 해야 하면 장면의 흐름이 끊기고 긴장감도 잡아낼 수 없다는 걸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큰 알루미늄팬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 매 촬영마다 그 팬에서 프리타타가 잘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장면을 7번 촬영했고 2번의 촬영분은 버려졌고 남은 다섯 개 중 하나가 최종적으로 영화에 쓰였다. 5.5분간 진행되는 이 장면을 우리는 카메라의 멈춤 없이 한 번에 찍었다. 그게 너무 기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장면이 그렇게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장면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지금도 여전히 프리타타를 만들지만 눌어붙을 때가 많다. 촬영 마지막 날 그 기적의 알루미늄팬을 챙겨 오지 않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전날 밤 테이블에 오르던 화려한 음식들을 생각하면 포크로 풀어 소금 몇 꼬집 집어넣고 설렁설렁 만들어내는 세콘도의 프리타타는 아는 맛, 일상성의 극치이다.
치고받고 싸우고 나서도 어깨를 감싸고 아침을 나눠먹는 형제들을 보고 있으면 우습게도 가까운 미래에 또 갈등할 그들이 보인다. 또 실수하고 또 뭔가를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또 반성하고 또 미래를 긍정하고 또다시 일어서서 또 달걀을 풀고 팬을 달구는 삶의 무한 사이클이 보인다. 그래서 이 장면이 좋다. 마디마디의 해피엔딩에 질척거리지 않는 남자들의 우직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맛있는 오믈렛의 필수 조건은 좋은 팬인 거 맞다. 그리고 제일 맛있는 오믈렛은 첫 번째 오믈렛이 헌신적으로 달궈준 팬이 두 번째로 만들어주는 오믈렛이다.
7. Fargo
어떤 장면에서 멈춰도 거의 재밌는 영화 파고(https://ashland.tistory.com/m/611)에서 오믈렛을 먹는 장면은 사실 너무나 평범하여 대부분에게 잊힐지 모른다. 하지만 설원, 청부 납치, 살인, 피 등등 차갑고 잔혹하기만 한 이미지들 사이에서 따뜻하고 인간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이 장면이다.
이른 새벽 호출을 받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 만삭의 프랜시스 맥도만드. 남편은 오믈렛을 만들어줄 테니 아침을 먹고 나가라고 하고 아내는 괜찮으니깐 더 자라고 하고. 하지만 남편의 고집으로 이 둘은 결국 식탁 앞에 나란히 앉는다. 짧고도 평범한 이 장면을 참 좋아한다.
남편은 먹지 않고 커피만 마신다.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내렸을 테니 두 잔에 나눠 담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거다. 아내가 출근하고 남편은 다시 자러 갔거나 그 연한 커피로도 잠이 다 달아났다면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결국 자신을 위한 오믈렛을 만들러 부엌에 갔을지도 모른다.
파고에는 두 남자가 나온다. 돈이 필요해지자 아내를 청부 납치해서 돈 많은 장인어른으로부터 몸값을 뜯어낼 계획을 세우는 자동차 세일즈맨과 새벽에 출근하는 아내에게 오믈렛을 만들어주는 남자.
오믈렛 한 접시 만들어줬다고 이 남편을 개념남으로 치켜세울 일도 아니고 아내를 잠깐 납치했다가 돈만 받고 반띵 하겠다는 생각을 한 순진한 남자를 천하의 악질로 얘기할 것도 아니다. 전자는 조만간 육아 스트레스로 인해 오믈렛은커녕 향후 10년간 부엌에 얼씬조차 안 할지도 모르고 후자도 소싯적엔 하루가 멀다 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오믈렛을 만들어 받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모두의 시작은 비슷비슷하게 야무지고 상냥하지만 그 결말은 제각각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량한 우리는 결코 갈 때까지 가지 못한다. 그러니 변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버린 사람은 동정하고 아직 순수한 시작의 상태에 머물러있는 사람은 응원하고 관조할 뿐이다.
8. Phantom thread
날이 따뜻해져서 노란 꾀꼬리버섯을 비롯해 직접 캐낸 야생버섯들을 내다 놓고 파는 시장 앞 할머니들을 볼 때면 숲에서 캐낸 독버섯을 정성스레 손질하여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독버섯을 곁들인 오믈렛을 대접하던 이 여인이 늘 떠오른다.
팬텀 스레드 (https://ashland.tistory.com/m/1172)
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비키 크리엡스를 식당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렇다고 너무 흐물거리지 않을' 수란 취향을 넌지시 강조한다. 확실히 영국인들은 노른자 익힘에 대한 강박이 있거나 자신들의 그 강박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강박 또한 지닌 것도 같다.
먹고 나면 몸이 아플걸 알고도 독버섯 오믈렛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순순히 삼키는 사람. 전자는 죽지않을 만큼만 무력해진 사람을 자신의 영향력 안에 놔두고 통제하고 구원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고 후자는 통제 불가능한 자신의 독버섯 같은 성정을 그렇게라도 잠재우고 잠시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어 완벽하게 타인에게 보살핌 받는데서 만족을 느낀다. 그러니 음식을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먹이는 행위 자체가 가장 고양된 통제 행위가 아닌가 싶다.
9. 소공녀
가사도우미로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미소는 끽연과 위스키 한잔을 포기할 수 없어 월셋집을 나온다. 그리고 옛 친구들을 찾아가 하룻밤을 부탁한다.
소공녀 (http://ashland.tistory.com/m/1025)
는 어찌 보면 퍼니게임과는 대척점에 있는 영화이다. 미소(이솜)는 달걀을 빌리는 대신 달걀을 사들고 친구들을 찾아간다. 미소의 여행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열정적이었던 시절로의 짧은 회귀이자 인생의 화양연화가 우리의 남은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달걀 한 판. 30구.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야 하는 서른 즈음의 나이. 달걀을 들고 찾아간 친구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들은 어떻게든 자리를 잡았다.
그럴싸한 직장을 가진 친구는 휴게실에서 포도당 주사를 맞다가 상사의 호출을 받고 불려 가고 결혼에 성공한 친구는 고시공부하는 남편과 시부모님과 부대낀다. 부자 남편과 결혼해서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언니는 밥 먹는 남편에게 코 앞에 놓인 물컵도 대령해야 한다. 이혼한 후배는 아직도 30년 동안 빚을 갚아야 하는 아파트에 홀로 남았다. 미소의 삶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려니 조금은 부정적이고 삐그덕 거리는 그들을 묘사한다. '다 가진' 삶은 더더욱 나열하지 않는다. 동시에 '다 가진'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얼마 전에 유튜브 숏츠에 소공녀의 한 장면이 멈춰져 있길래 눌러보았다. 선배 언니가 미소를 염치없다고 나무라는 장면이었다. 영상은 제대로 된 직업도 구하지 않고 사사로운 욕망을 충족하는데 만족하며 타인에게 빌붙는 삶을 비판한다. 언젠가 소확행과 욜로를 외쳤던 사람들조차도 미소의 극단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두둔하긴 힘들 거다. 자신의 욕망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고 가족을 돌보며 몇 분량의 노력을 더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소의 삶은 이기적으로 비칠 수 있다.
이것은 최소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발적으로 선택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 그런대로 직면하고 모두들 다른 형태의 어려움을 감내하며 살고 있다고 인정하면 미소의 삶도 그 친구들의 삶도 이해가 된다.
미소는 친구들을 위한 요리를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그들을 힐난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잘 들어주려고 노력하며 함께 밥을 먹는다. 이혼 후유증으로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후배를 식탁 앞으로 불러내어 달걀말이에 아침 한 끼를 선물하고 요리 못하는 친구를 위해 달걀 장조림 한 냄비를 끓여놓고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가진 술집 여자와는 함께 백숙을 먹는다. 달걀을 빌리러 가서 사람이나 때려죽이고 나오는 퍼니게임의 나쁜 놈들을 생각하면 미소의 달걀은 그런대로 전인류적이며 박애로 충만한 달걀이 아닐까.
10. Bagdad cafe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에서 아버지는 결국 양계장을 닫고 소도시의 역전에 식당을 연다.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하지만 기차들이 도착할 때마다 손님이 몰릴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달걀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진 못한다. 그는 양계장을 하면서 모은 기형 병아리들을 유리병에 넣어 식당 카운터에 전시해 둔다. 이것들이 손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서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기를 기대한다. 닭으로 인한 성공신화를 아버지는 차마 포기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달걀 마술까지 생각해 내서 손님들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넘어지는 달걀을 세우고 또 세우고 달걀을 뜨거운 식초에 담갔다가 병 안에 집어넣기도 한다. 하지만 병 속으로 들어가던 중의 달걀은 무참히 깨지고 손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흘리고 유유히 식당을 떠난다. 미국 아버지는 좌절한다.
좌절하는 미국인 아버지의 등을 토닥이기라도 하듯 독일인 감독 퍼시 애들론은 황량한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에 억척스러우면서도 상냥한 독일인 쟈스민을 데려와 달걀 마술을 성공시킨다.
바그다드 카페(https://ashland.tistory.com/m/138)를 정말 좋아해서 여러 번 봤지만 카페를 일으켜 세우며 화해하고 화합하는 쟈스민과 브랜다는 나에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곳이 끝없이 황량했을 때, 모두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삶 속에서 배회했을 때가 더 좋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단지 '달걀'을 읽고 나니 흥겨워진 바그다드 카페와 생기 넘치는 쟈스민의 표정이 떠올랐다. 쟈스민이 남자 얼굴 옆으로 손을 뻗자 손에서 달걀이 나타난다. 각종 마술, 공연, 커피, 라이브 피아노 연주까지 가미된다. 입소문을 타고 화물 트럭 기사들이 집결하고 바그다드 카페는 점점 분주해진다. 퍼시 애들론이 구현해 낸 이 장면은 '달걀'의 미국 아버지가 그토록 바랬던 아메리칸드림이 아니었을까.
길고 긴 글은 파베르제의 달걀로 마무리해야겠다. '달걀'의 미국 아버지가 이런 럭셔리한 달걀을 식당 카운터에 진열해 놓았더라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까. 어쩌면 이 보석 달걀들을 애지중지하며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황제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쇠락의 과정은 물론 보다 소시민적이었을 거다. 식당이 손님으로 미어터져서 과로사했을지도 모르고 달걀을 탐한 동네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런 휘황찬란한 달걀을 놔뒀음에도 손님이 끝끝내 오지 않아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미국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도 많이 하고 대대손손 화목하게 잘 살았을 거라는 장밋빛 미래는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셔우드 앤더슨도 결코 그런 식의 결말은 원치 않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