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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정거장 카페에서 자주 가는 카페의 좋아하는 자리. 딱히 아늑하지 않은지 거의 항상 비어있다. 우유 거품 가득 올라간 커피잔을 들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는 사람들, 반쯤 시작된 수다와 함께 카페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따뜻하게 포옹한 채로 주문 차례를 기다리는 연인들, 빈자리를 못 찾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모든 주문을 처리하고 숨을 돌리는 바리스타까지. 그 모두로부터의 각기 다른 호흡과 생명력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자리이다. 한 달에 두어 번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고 이곳에서 시작을 읽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반쯤은 고정된 일상이 있다. 이제는 짧은 시간에 작은 커피와 고밀도의 휴식을 취한 후 가볍게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푹 늘어지고 싶은 구석진 곳의 포근한 자리보단 이런 자리가 편하..
Past lives 와 After sun 킬리언 머피의 BAFTA 수상 소감 중에 화면에 잡힌 배우 유태오가 반가워서 잠시 써 내려가는 글. 지난 12월에 카페에 갔는데 게시판에 꽂힌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가 보였다. 이 영화는 지난가을에 빌니우스에서 개봉을 해서 가서 보았는데 극장 상영이 끝나고 꽤 지난 최근까지도 영화 포스터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해성(유태오)과 노라(그레타리)가 테이블 지지대를 사이에 두고 오묘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것이 그들이 떨어져 있었던 시간과 공간 같아 묘했다. 늘 이 영화를 생각하면 덩달아 떠오르는 것은 샤를롯 웰스의 애프터 선이다. 얼추 1년의 차이를 두고 등장한 이 두 편의 영화가 함께 생각나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것. 굳이 더 들어가면 여성 감독이라는 것. 그리고 20년..
리투아니아어 119_당절임과일 Cukatos 이 색감은 가히 팬톤의 올해의 색상 담당 부서직원들이 철야를 해도 구현해 낼 수 없을 영롱함과 말끔함이다. 초록 자몽을 좋아하는데 아쉽게도 잘 안 판다. 껍질 두께도 적당하고 포멜로와 주홍 자몽의 바람직함만 딱 섞어놓은 맛이다. 오랜만에 눈에 띄어 설탕에 절이려고 비슷한 놈들을 하나씩 전부 들고 왔던 어떤 겨울날. 여러색을 섞으면 훨씬 예쁘고 맛있다. 설탕물에 끓여서 굳힌 과일 껍질이나 과육들을 가리켜 리투아니아에서는 쭈카토스(Cukatos)라고 부른다. 절인 귤류의 껍질이면 간혹 캔디드 필 Cukuruotos žievelės라고도 쓰지만 쭈카토스라고 하면 대체로 통한다. 특히 겨울이 되면 su cukatomis라는 설명이 붙은 빵들이 많이 나온다. su는 '~와 함께', '~ 을 포함한'에 쓰이는 5 ..
Vilnius 176_계단에서 화양연화(花樣年華). 하얼빈의 대학 신입생 환영회를 장식한 현수막에 또렷하게 적혀있던 네 글자. 눈물겹게 아름다운 치파오들을 입은 장만옥과 공허한 눈빛의 양조위가 애잔하게 스치던 어두운 골목길이 이 성어에 대한 이전의 반사적 인상이었다면 언젠가부터는 똘망똘망 총기어린 중국인 동기들의 눈초리가 더해져서 몇 가지 참 다르면서도 공통된 묘한 감상들에 사로잡히곤 한다. 꽃 같이 아름다워 타오르는 시절, 거짓이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가장 완전한 순수함으로 충만했던 한 때, 손에 잡힐 듯 말 듯 일시적인 꿈같지만 아주 깊게 뿌리내려 역설적으로 남은 인생을 전부 지탱하고도 남는 시간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다. 지나고 나면 마디마디 채워가는 이 삶도 그저 하나의 덩어리 진 시간으로 남을 뿐이겠지만 삶의 어떤 한 토막에..
지난 시즌의 테킬라. 올해 볼 연극 공연들을 예매하고 나니 지난 시즌의 테킬라들이 떠올라서 회상한다. 작년 2월에 구시가의 청년 극장에서 연극 '아연' (https://ashland.tistory.com/1258)을 봤었다. 손님이 몰리기 직전의 한산한 멕시코 식당에서 공연에 대한 설렘을 안고 간단한 타코 한 조각에 테킬라 한 잔을 마셨다. 그날의 테킬라가 진정 너무 맛있었기에 그 이후로 일종의 테킬라 한 잔의 전통이 생겼다. 어떤 테킬라를 마주하든 친구와 그날의 테킬라를 회상하고 분석하며 감탄했다. 딸려 나온 자몽에는 시나몬과 케이언페퍼를 비롯한 각종 매콤한 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호세 페르난도 알레한드로가 할머니 찬장에서 꺼내준 듯한 저 호리호리한 잔은 밀집된 향에 코를 박고 작은 양을 나눠마시기에 완벽한 구조였다. 무엇보..
리투아니아어 118_비율과 관계 Santykis 마들렌의 핵심은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들어간다는 것. 적어도 내가 가진 레시피에서는 그렇다. 물론 반죽에 이것저것 추가하고 위에 부어서 바르고 뿌리고 한다면 그런 단순한 공식은 성립되지 않겠지만 그저 수더분한 마들렌을 원한다면 모든 재료의 양은 1이란 숫자로 통일된다. 홍두깨 선생님이 하니한테 지어주던 흰 밥도 쌀과 물의 비율은 아마 1이었을 거다. 리투아니아어 단어 Santykis는 비율의 뜻도 있지만 재밌게도 '관계'의 의미도 가진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노사관계 등등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관계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이상이라면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이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합쳐져서 달콤한 마들렌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며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는 좀 벅차오르는 지점이 ..
리투아니아어 117_고기분쇄기 Mėsmalė 그런 물건들이 있다. 딱히 실용적이지 않지만 버리기엔 무척 애매해진 것, 꺼낼 때마다 오래된 이웃들과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 카다시안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것,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편리하게 잊는 것, 그 생애와 본적을 알고 싶어 절로 거꾸로 들어 밑바닥을 보게 하는 것, 한때는 모두에게 새로웠던 것,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별안간 폄하되는 것, 잊으려고 마음먹으면 걷잡을 수 없이 소멸되는 것. 그게 뭐 물건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동안 파네베지에 있으면서 소련 시절의 오래된 고기분쇄기로 커피를 갈아 마셨다. 바닥에 쓰여진 대로라면 러시아어로 먀싸루프까Мясорувка, 리투아니아어로는 메스말레 Mėsmalė 라고 한다. 탁자에 고정시키고 손수 돌..
리투아니아어 116_목록 Sąrašas 마트에 가서 바구니를 집으려고 보니 옆바구니에 남겨진 쪽지 한 장이 보인다. 그래서 그 바구니를 집었다. 이 쇼핑 리스트의 주인은 이 식품들을 전부 샀을까. 필기체를 썼고 복수를 잘 썼고 찍어야 할 곳에 점을 잘 찍었다. 긴 단어는 적당히 줄였고 파프리카에서는 망설였다. 대체로 자주 반복되는 기본 식품들을 사러 아주 일상적으로 마트에 왔다. 냉장고에 항시 있어야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목록을 작성했을거다. 가령 이것은 어른 아이 다같이 오랜만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 토요일 오전을 위한 리스트 같다. Pirkinių sąrašas - 쇼핑 리스트 Pienas 2 vnt - 우유 두개 Graik.jogurtas - 그릭 요거트 Užtepėlė - 스프레드 Duona Batonas - 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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