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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공장 소녀 (1990)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핀란드 여인 이리스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산다. 다 마시고 세척한 것으로 보이는 보드카병이 물병과 꽃병으로 변신하여 여기저기 널려있고 의미 있는 말 한마디 오고 가지 않는 그 차가운 집안을 채우는 것은 긴박한 국제뉴스들이다. 러시아에선 가스 폭발로 열차가 전복되어 사람들이 죽고 이란에선 이슬람 지도자가 죽고 천안문 사태로 비무장 상태의 학생들이 죽는 뉴스들이 계속 흘러나오지만 원한다면 그 티브이를 꺼버릴 수 있는 이쪽은 엄연히 다른 세상이다. 세상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과는 상관없이 이리스의 일상은 표면적으론 평화로워 보인다. 공장에서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고 저녁이면 퇴근해서 모두를 위한 밥상을 차리고 자기 전에 대중 소설을 읽고 주말이면 댄스장에 가서 남자를 기다린다. 쓸쓸하고 생명..
타티야나, 당신의 스카프를 조심하세요 (1994) 독서에 침대용책과 화장실용 책이 있는 것처럼 영화에도 프로젝터용 영화와 식사용 영화가 있다... 어떤 영화를 식사용 영화로 분류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한 영화에 던지는 최대의 찬사이자 가장 진솔한 우정의 표시 같은 게 아니려나. 짐 자무쉬, 아키 카우리스마키, 홍상수, 오즈 야스지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고 그 외에도 무수한 영화들이 있다. 식사용 영화 클럽에 들어오는 기준은 사실 간단한 듯 간단치 않다. 또 봐도 재밌다는 게 소름 끼칠 만큼 여러 번 본 영화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플롯이 단순하고 대사가 적고 흑백이면 더 좋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해선 안되며 주인공들의 은근한 속웃음과 수줍은 좌절감 같은 게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밥을..
그린카드 (1990) - 조지의 모카포트와 커피 뭔가를 많이 기억해야 할 때, 외워도 유독 잘 안외워지는 것이 있을때, 그렇게 기억하려고 했던 그게 결국 기억나지 않을것 같은 불길한 순간을 상상할 때 생각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에서 이민국 직원과 분리 면담을 하는 조지 (제라르 드 파르디유)와 브론테(앤디 맥도웰)의 모습이다. 식물원이 딸린 집에서 살고 싶은 미국인 브론테(앤디 맥도웰)는 남편이 필요했고 미국 영주권이 필요한 조지는 아내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위장결혼을 하고 각각 원하는 것을 얻고 남남이 된다. 그런데 갑자기 이민국에서 단속을 나오면서 개별 인터뷰가 잡히고 상대에 관한 자잘한 사항들을 외워야 하는 상황이 된다. 각자의 인생에 관한 디테일들을 암기하며 서로를 알아가지만 인터뷰 끝무렵에 조지는 브론테가 쓰는 크림 이름을 잘못..
렌탈 패밀리 (2025) 를 보았다. 지하철 안에 일본인들과 함께 앉아 있는 브랜든 프레이져가 시선을 끌었다. 필립(브랜든 프레이져)은 도쿄 생활 7년 차의 무명 배우이다. 간간이 오디션을 보고 광고를 찍고 단역울 맡는 아직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듯한 이방인이다. 미국 배우가 일본에 와서 고독을 느낀다는 설정에서 https://ashland.tistory.com/139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소피아 코폴라의 섬세한 드라마에서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도쿄로 온 빌 머레이가 정체된 결혼 생활과 커리어의 정점에서 공허를 느끼는 남자였다면 필립은 아직 하고 싶은 연기를 하지 못한듯 보이고 여전히 혼자이다. 그는 매일 밤 발코니에 서서 맞은편 아파트에서 펼쳐지는 삶을 관조한다. 혼자서 집을 지키는 할아버지, 아이를..
파리, 13구 (2021) 오래전 파리여행 때엔 파리 5구에서 지냈었다. 자연사 박물관이 있었던 집에서 나와 작은 구멍가게 같았던 카르푸와 꽤 삼엄한 모스크, 바그다드 카페를 지나 아랍 인스티튜트가 나오던 길과 팡테옹과 소르본에서 뤽상부르 공원으로 이어지던 길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지하철 5호선이 지나가는 생마르셀역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었지만 마침 공사 중이어서 버스를 타거나 두 정거장 떨어진 플라스 디탈리역을 꽤나 자주 이용했는데 아마 이 역이 환승역이어서 그랬을 거다. 버스를 타기 싫거나 조금 걷고 싶으면 보통 이 이탈리아 광장 쪽으로 걷곤 했다. 그렇게 걷다가 13구의 고층 건물들을 지나 우연히 미테랑 도서관을 발견했고 센강변에 다다랐다. 숫자로 구가 표시된 파리의 시티맵은 참 재밌는 지도였다. 지도를 보기 ..
가솔린 레인보우 (2023) 로스 브라더스의 는 여러 로드무비를 떠올리게 한다. https://ashland.tistory.com/559005와 그리고 , 바다를 보러 간다는 데에서 어쩌면 까지. 외형이 닮지 않아도 왠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내밀함이 이들 사이에는 있다. 정서적인 염기서열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여정들은 다른 듯 비슷하게 대체로 허무하고 쓸쓸하다. 의 윌리와 에디가 황량한 기차선로 위에서 나누는 클래식한 대화를 보자. "이상하지 않아? 새로운 곳에 왔는데도 어딜 가나 똑같잖아."."닥쳐". 뉴욕을 떠나 클리블랜드를 거쳐 플로리다를 향하는 그들의 여정이 그랬다. 여행은 늘 그 길에 발을 들여놔야 그제야 무엇을 꿈꾸며 떠나왔는지를 다시 되묻게 하는 아주 고약한 버릇을 가진 놈이니깐...
화이트 갓 (2014) 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의 최신작 가 어제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개됐단다. 나중에 베를린에 가면 반드시 영화제 기간에 한번 가봐야겠다. 은 https://ashland.tistory.com/559062 의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의 더 이전 작품. 널찍널찍한 부다페스트의 거리를 구경하는 재미와 넘사벽 헝가리어를 듣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영어권 감독들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하면 아예 미국에 가서 영화를 찍는다는 게 좀 아쉽다. 트럼펫을 부는 이혼 가정의 열두 살 소녀 릴리(Zsófia Psotta)와 그녀의 개 하겐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배경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잡종견에게 특별세가 부과되는 이상한 정책이 시행되는 곳이다. 사람들은 잡종견은 물론 견주조차도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현실적..
뉘른베르크 (2025) 독일 독수리(https://ashland.tistory.com/559076) 하면 사실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가 생각나고 루프트바페 하면 창설자이자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무시무시한 일을 벌인 전범에 불과하고 사형을 선고받고 자살하지만 이 약쟁이 사령관 자체는 솔직히 말해서 재밌다고 말하면 안 되지만 재밌는 게 사실이다. 나치 전범들은 세상에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 일을 저지르는 과정들을 기록해 놓은 많은 글들 속에서의 그들은 출근해서 자기들끼리 꽁냥꽁냥 열내며 일하다가 퇴근하고 다음날 또 출근해서는 어제 하던 나쁜 짓을 이어서 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집단에 소속되어 어떤 신념에 완전히 종속당했을 때 그 정당성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