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용서해줄래요?> https://ashland.tistory.com/m/870 와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 https://ashland.tistory.com/882 를 만든 마리엘 헬러의 신작 <나이트비치>를 보았다. 전작의 캐릭터들이 좋았기때문에 은근한 맑눈광 에이미 아담스에게도 감독이 드디어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주려나 조금 기대하며 보았다.
에이미 아담스는 엄마로 나온다. 엄마도 아빠도 극중 이름 따로 없이 엄마 그리고 아빠이다. 에이미아담스의 아이는 너무 어리고 귀엽지만 엄마는 잠도 직업도 자기 시간도 남편도 몽땅 빼앗긴다. 엄마는 매일 아침 냉동 해시 포테이토를 튀기며 내일이면 또 오고마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의 아침을 시작한다. 동네 문화센터에도 열심히 가고 공원에서도 잘 놀아주고 온 사방에 물감을 묻히는 물감 놀이도 열심히 해주고 아이가 잠을 죽어라 자지 않아도 절대 버럭하지 않는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번, 모든 육아 경험을 거세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나름의 몫을 다하려 노력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계속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엄마는 주변 엄마들과도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고 오랜만에 만난 직장동료들과도 쉽게 융화되지 못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엄마의 이가 날카로워지고 털이 자라나고 후각이 예민해지며 꼬리뼈 끝이 간질간질해지더니 급기야 동네 개들이 엄마 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나이트비치>는 여성의 입장에서의 영화이다. '육아영화'라는 장르가 있고 이 영화를 그 장르속의 소주제로 다시 분류해야한다면 이 영화는 죽을힘을 다해 아이를 상대하던 배우 샤를리즈 테론(툴리)과 틸다 스윈튼(케빈에 대하여), 정유미(82년생 김지영) 가 속한 '무너지는 엄마'의 색인을 붙여야겠지만 상대적으로 엉뚱하고 유쾌한 톤이다.
이 미국 중산층 엄마의 이야기를 요즘쓰는 말들로 표현한다면 '잘나가던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경력단절 여성이 급기야 정체성을 상실하고 인간성마저 빼앗긴채로 동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라고 적고서 왜 도대체 온 마을이 우리 아이를 키워주지 않느냐고 분노하고 공감해야겠지만 그러기엔 이 비현실적인 전개는 살짝 통쾌하다.
자신이 점점 소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인간이 동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설정은 물론 은유일뿐이지만 은근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주변의 누구와도 원하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동물이 되는 중의 엄마는 오히려 죽마고우를 얻은것처럼 평화로워 보인다. 물론 그 친구란 외부의 누군가가 아닌 온전한 날것이 된 자신이다.
더 이상 내려갈곳이 없는 밑바닥에서 바닥난 인내심만이 생성해낼 수 있는 높은 순도의 미친 여유로 경쾌하게 살아가는 자를 볼때의 흐뭇함, 잠못이뤘던 수많은 밤을 보내고 비로소 밤이 되면 다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던 단계에 도달했을때의 해방감을 맛보며 거의 사라질뻔했던 삶의 조각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다시금 형체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의 희열을 에이미 아담스도 느껴가는 중일거라 억지로 믿는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 희망하는 능력? 리차드 기어를 기다리던 강아지 하치를 보면 동물에게도 희망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싶지만 아마도 그 정도 수준의 희망은 인간의 것에는 명함도 못내미는 수준이라고 아르헨티나의 뇌과학분야 권위자에 의해 평가절하 되겠지.
우리는 대개 내일도 오늘처럼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을거라 되바라지게 가정하고 내일 아침의 알람을 놓치지 않고 내일 아침의 커피는 맛있을거라 기대하며 항상 그렇게 한 템포 앞선 서사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인간이기에 내일이 오늘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전개만을 상상하라고 강요받고 삶이 그것을 온전히 증명하는 형태로만 굴러간다면 아마 하루도 견디기 힘들거다. 그 희망이라는 티끌은 굉장히 모호하고 추상적이지만 모든것이 잘 될거야 라는 억지스런 낙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광석화의 속도로 머릿속에 나타나서 우리를 압도한다.
임신과 출산이 인간이라는 동물이 경험하는 가장 동물적인 경험이라면 출산후의 인간은 사실상 너무나 빠른시간내에 다시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도록 강요받고 적지않은 돈과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하고 동시에 모성을 학습시키는것이 아니라 모성이 선천적인 것이라는 것을 세뇌시키는 구조로 내던져진다.
하지만 그런 상황속에서 눈앞에 존재하는 난관을 초월하게 하는 힘은 어쩌면 모성 관념이 아닌 그냥 희망할 줄 아는 인간의 고유 능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 능력을 상실하고 동물이 되어간다는 은유는 동물에게도 모성이 있다는 관념과 은근슬쩍 동일시되는 동물로서의 여성이 보란듯이 발현하는 무시무시한 인간성이 아닐까.

내가 사는 곳에선 갓 태어난 핏덩이를 엄마의 가슴위에 바로 올려줬다. 그리고 억지로 짜낸 모유를 아이 입에 바르고 젖을 물렸다. 다른곳에서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으니 이런 관습이 신기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소 공격적이고 원시적인 이 행위는 그럼에도 일종의 결속감을 줬는데 따지고보면 그것은 학습된 관념에 불과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만약 조산사가 나에게 아직 태지가 남아있는 아이를 눕혀놓고 아직 씻겨내려가지 않은 피와 분비물들을 동물처럼 핥아서 걷어내도록 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상상했다. 그렇다면 내 인간성은 좀 더 단단해졌을까. 어쩌면 '이렇게 까지 해야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당당히 현실과 맞서는 체념 능력과 희망을 희망하는 막강한 능력이 생성되지 않았을까.
사실 육아로 인한 고초보다 더 악독한것은 그 고초가 도식화되는 것이다. 비단 육아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거다. 구체적이고도 섬세한 힘듬의 감정이 도식화되면 그런 사회에서는 힘듬이 경쟁이 되고 산업이 된다. 덜 힘들어지면 더 힘든 사람이 경쟁의 우위에 서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고 지친 평균의 사람'의 카테고리 떠밀려 들어가며 '보통의 번아웃'속에서 상대적인 안정과 만족을 강요받는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개인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건 어쩌면 결국 스스로 갈고 닦은 유머 감각뿐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착한 격언과 제도적 보완이 그런 유머 감각위에 우선할 수 있을것 같지 않다. 그 어떤 훌륭한 제도와 공감도 일정한 지점에 다다르면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앞에선 익숙해지고 무가치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키고 싶은 커리어가 있는 사람이라면 일과 육아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사 뿐이라는 극단적인 자조와 체념 능력 정도는 있어야 한다. 육아는 잘 할 필요가 없는 많은 것 중의 하나일뿐이다.

<나이트비치> 라는 영화제목은 굳이 번역하지 않는것이 낫겠지만,그리고 실제 영어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절로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밤의 야수, 밤의 암캐, 밤의 나쁜 지지배, 밤의 ㅆ년까지...그리고 어쩌면 이 단어들은 여성 자신뿐 아니라 힘들어하는 자 모두가 오로지 '스스로에게만' 던질 수 있는 일종의 주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육아 현장에서 광폭하게 무너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자세로 전환하려는 순간의 가장 극악한 자기 혐오이자 고도의 자기 긍정을 드러낼 수 있는 단어를 찾아야한다면 '밤의 ㅆ년'이 가장 적합하지 않으려나. 샤를리즈 테론과 틸다 스윈튼, 정유미가 이 영화를 봤으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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