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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12.03 Le Havre (2011)
  3. 2019.11.14 Saint amour (2016) (3)
  4. 2019.11.11 A Better life (2011)
  5. 2019.11.10 Winter sleep (2014)
Film2019. 12. 4. 21:51


추운 영화 좋다. 누가 나왔어도 봤겠지만 매즈 미켈슨이 나와서 더욱 기다렸다 봤다. 사실 그가 이 영화에 몹시 잘 어울릴것이라는 예감 자체가 영화의 첫인상이다. 이 배우가 어떤식으로 처절하게 고생하는지 보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즈음에서 재난 구조 영화 한 편 찍으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요' 라는 제안을 받은 매즈 미켈슨이 현장에 도착해서는 산악용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빨간 패딩을 입혀주는 스텝을 향해 팔을 벌린채 몇 문장 안되는 대사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영화 내내 대사없이 누워있는 여배우를 제외하면 유일한 등장인물인 그는 단 한 벌의 의상을 입고(심지어 나중에는 그마저도 손수 불태우며)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짧은 대사를 내뱉으며 북극의 설원을 고독하게 누빈다. 북극에 조난당해서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남자와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을 이렇다할 상대 배우도 없이 혼자서 영화를 끌고 나가야하는 배우. 영화보는 내내 촬영 현장의 유일한 배우로서 수많은 스탭들에 에워싸인 그의 모습을 생각했는데 내가 영화에 이입된건지 저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에 이입한건지 생각해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재난 영화의 문법대로 처절하게 고생하지는 않았다. 그런고로 손에 땀을 쥐게하는 흥미진진함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영화들에 익숙해져서 결국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야 말것이라 생각하며 봤기 때문인지 하루 온 종일 좌절과 희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을 인물의 심리에 철저하게 몰입되었던건지 결국은 시종일관 긴장을 하면서 보았다.

캐스트어웨이나 마션, 그래비티, 문, 127시간,식스빌로우 등등등 기후도 상황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극한 상황,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에 맞서는 고독에 대한 서사,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적극적인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조난 당한 인물의 이야기는 사실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대부분은 조난 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며 복선을 깔아놓는 동시에 그 역경을 감당해내야하는 인물의 성격에 대해 조금 훑어주고 구조된 이후의 이야기로 훈훈하게 끝을 맺고 실화를 토대로 한 경우라면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실존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저런 악몽을 겪은 사람에게 힘겹게 쟁취한 새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다시금 가늠하게하면서 드라마를 극대화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 모든것이 생략되어있다. 북극판 캐스트 어웨이인가 라고 생각하고 싶다가도 주인공이 낯선 상황속에서 적응해가는 과정들을 지켜보며 심지어 재미를 느끼고 대리만족을 경험하게하는 생존 에피소드는 턱없이 부족하고 톰 행크스의 배구공 윌슨처럼 조금 오그라들지만 나라도 저런 상황에선 별반 다르지 않았을거야 라고 타협하게 되는 장치들은 더더욱 없다. 화성에서 감자를 키우다 돌아와서 후배들에게 우주 생존기를 설파하는 맷데이먼처럼 북극에서 송어를 잡아 먹고 살아남은 그의 북극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물론 제발 저 북극곰과 온 몸으로 맞서서 혈투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길 바랬고 다행히 북극곰에게 그 정도 분량을 주진 않았지만 북극곰 카드는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드라마와 서사를 시도한 흔적은 역력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히려 사색적이다.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희망적인 자세로 현실에 맞서는 것에 이미 피로한 인간의 모습이 나에게는 오히려 더 눈에 들어온다. 하얀 설원을 마주하고 철저하게 혼자임을 인식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어떤것일까. 그의 하루는 도대체 얼마나 길었을까. 인간은 정말 저런 상황속에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정도면 됐어라고 미련없이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결국 살아남는 것이 인간이며 우리는 그토록 강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학습된 결과가 아닐까. 영화는 사실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영화 속의 남자가 조난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영화가 <인투더와일드>식으로 끝이난것이라면 더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할 수 있는 모든것을 했다는 생각이 목적지에 도착한 그에게 안식과 평온온함 주었을거다. 나에게는 그것이 좀 더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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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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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19. 12. 3. 18:51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은 가끔 이렇게 의외의 일러스트를 타이틀 커버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자체제작한 커버들이 대부분 개성있고 인상적이지만 이렇게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 귀엽기까지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소장하고 싶어진다. 사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전부를 갖고 싶다. 소품 같은 영화, 마치 일요일 오후 2시경의 EBS 세계의 영화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어 이 영화 심상치 않은데 하면서 부랴부랴 공비디오(라니 어느 시절 이야기인가)를 집어 넣고 녹화 버튼을 누르게 했던 영화들처럼, 다소 무거운 주제들도 무덤덤한 유머로 살짝 스치고 건드리며 가볍게 풀어내는 감독 특유의 재주, 사연이 많은 주인공들이지만 스스로를 향한 연민으로부터 자유롭고 관객에게도 그런 인물들을 향한 편파적이고 인위적인 동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새 가슴 깊이 아련한 마음을 품고 바라보게 되는 주인공들.  하지만 어둡고 절제된 화면속의 인물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그의 영화 특유의 유쾌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것은 한편으로는 특권이고 쾌감이다. 아주 사소한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가 솔직하게 아프다고 말할 때 그리고 그 불평과 요구가 충분히 타당하고 설득력있을때 그 아우성들을 감내하고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제3자에게는 오히려 미묘한 권력처럼 휘둘러질 수 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사회적 약자로 묘사되는 인물들은 그 보장된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분노하지도 그렇다고 우리 괜찮다고 억지로 웃지도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평범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을 불행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컨테이너 박스 앞에 쪼그리고 앉은 겁에 질린 아프리카 소년의 흰자위는 그림의 절반을 채운 옅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울듯 압도적이고도 강렬한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일단 그 눈빛을 가까스로 벗어나면 바닷가 도시의 맑고 나른하고 따사로운 오후의 느낌이 스르륵 밀려온다.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와 그들 모두를 주시하는 형사 사이의 거리감은 미묘하다. 그들은 흡사 팽팽하게 대치중이만 형사는 쉽사리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남자는 오히려 여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의 아내와 가족을 찾고 싶어하는 아프리카 소년을 생각하면 사실 그의 마음은 복잡할것이다.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그의 표면적인 여유가 오히려 내 마음을 급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늘 그랫듯이. 인물들을 향한 나의 수동적인 동정이 어설프게 내민 손만큼 궁색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 조차도 그들에겐 삶이다. 결국 누구도 쉽게 구제해줄 수 없기에 오히려 씩씩하고 단단한 눈빛을 가진 이들. 

역전에서 구두닦이 일을 하는 남자는 아내와 함께 아주 단촐한 삶을 산다. 어느날 다수의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들이 선박의 컨테이너에서 발견되고 그들 중 소년 한명은 탈출을 해서 우연히 구두닦이 남자의 집에 은신하게 된다. 그들을 태운 배는 영국으로 갔어야 했다. 그는 소년의 가족이 있는 영국으로 소년을 보낼 계획을 세운다. 구두닦이일로 꼬깃꼬깃 모아둔 돈에다가 지인들과 합심해서 동네 술집에서 콘서트를 열어서 번 돈을 합쳐 기차표를 마련한다.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형사가 있지만 다행히 악랄하지 않다. 마지막 순간 배의 창고로 숨어든 소년을 확인하지만 그는 모른척 보내준다. 장소 섭외를 잘한것인지 특유의 색감때문인지 2011년에 촬영된 영화라고 하기에는 훨씬 오래 전 영화처럼 보인다. 익히 알려진 핀란드 여배우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는지 핀란드 어디쯤이겠지 생각했지만 의외로 프랑스 항구도시 르아브르가 배경이다 . 옷을 아무리 바꿔입고 아무리 멀리서 걸어와도 걸음걸이만으로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것처럼 배경이 어디든 감독이 결코 자기 스타일을 떨쳐버릴 수 없는것인지 감독의 이전 영화들 특유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 그래도 여기 프랑스 맞는가보다 하고 납득시키는것은 어느장면에서나 등장하는 라벨없는 와인병. 오며가며 머리에 부딪쳐서 휘둘리는 전구가 매달려있는 취조실처럼 침침하고 벽마감도 단순하기 이를데없는 조촐한 그들의 부엌 테이블에 놓인 와인 한 병이 저녁 밥상에 이따금 올라오던 소주 반 병과 아빠의 소주잔을 떠올리게 한다. 

부엌에 있는 밥상을 들고 나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에게는 작은 자기 집 마당에 앉아서 라디오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일상이 있다. 그래 어쩌면 그 집이 다달이 월세를 내야하는 남의 집일 수도 있고 오늘도 신발닦이 벌이가 안좋아서 바게뜨를 슬쩍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누구도 침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오늘의 와인을 마신다. 그의 머릿속은 프랑스어를 잘하지만 굳이 영국으로 가려했던 아프리카 소년을 도울 생각으로 꽉차있다. 그의 가족이 굳이 영국으로 간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민자들의 삶이 어디든 쉽겠냐마는 프랑스가 유독 그런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암전이 되고 나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텝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 그들이 공들여 만든 무대 위에 노장 배우가 서있다. 혹은 마치 극사실주의 화가가 그린 너무나 실제 같은 그림처럼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으로 그림 같은 장면이다. 멋진 연예인들 사진을 보고 어떻게 찍어도 화보 같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탁월한 조명과 촬영이라 어떤 장면에서 멈춤버튼을 눌러도 보도자료 같다. 이들의 숨길것없이 단순한 삶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동작과 동작 사이를 채운 것은 오히려 침묵이고 여백이다. 그들의 삶에 많은 것이 필요없듯 그 삶을 표현해내는데에도 역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 좋은 각본, 훌륭한 연기, 배경 음악 전부가 중요하겠지만 결국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가장 오래도록 남는 이런 잔상들을 생각하면 결국은 영화라면 영상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화면을 채운 균형있는 구도와 음영. 정말 미술관에 걸려있을법한 그림 아닌가? 그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병 속의 꽃 한 송이는 흡사 정물화의 일부같지만 시름에 잠긴 경직된 아프리카 소년에게서는 호흡을 통한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는듯하고 옆에 앉아 있는 개는 금방이라도 밖에서 돌아오는 남자의 소리를 듣고 튀어나갈듯 동적이다. 

해마가 어떤 생물체인지도 잘 모르면서 난 내가 해마를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입구에 해마가 그려진 이 바도 마음에 들었다. 르아브르라는 도시에 갈 일이 있을까 싶지만 어쨋든 이 도시는 르코르뷔지에의 스승(이라기보다는 건축 사무소 고용주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이라고 할 수 있는 오귀스트 페레가 주축이 되어서 전쟁 후에 재건한 도시이다. 찬디가르에 입성해서 도시를 가로 세로로 자로 잰듯 재단하고 엄격한 콘크리트 건물을 채워넣어 인도의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도시를 만들어낸 르코르뷔지에처럼 오귀스트 페레도 프랑스 도시와 좀 다른 분위기의 도시를 만들어냈으니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선다면 현대적인 콘크리트 건물보다는 어쩌면 남자가 살던 동네의 얕은 지붕의 오래 된 작은 집들이 보고싶어질 것 같다. 

 파란 벽에 드리워진 꽃의 그림자만으로도 한 송이 꽃이 덜 외로워 보인다. 누군가가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은, 완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상대를 가진다는 것의 따사로움이 오히려 화면속의 절제된 색채와 움직임으로 극대화된다. 살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아내는 놀랍게도 완쾌되고 아프리카 소년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남자의 일상은 전과 같은 모습으로 흘러갈거다. 꽃 한 송이와 와인 한 잔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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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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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19. 11. 14. 19:08

개인적으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술 특히나 와인에 관한 영화들은 보통 재밌다. 음식 영화도 그렇고 어떤 요소들이 이런 영화들이 재밌고 유쾌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상처받을 걱정없이 어떤 대상을 마음껏 찬양하며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내는 주인공들과 그 대상을 통해 그들이 위안받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져서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으면 행복하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대화 속에서 어느정도 공통분모를 찾을때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단연 영화 사이드웨이 (https://ashland11.com/90)이다. 사이드웨이를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감독과 제작자가 자기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고 있는 제라르 드파르디유를 찾아가서 '선생님, 우리가, 그러니깐 와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우리 프랑스인이 저기 미국인들이 만든 저 사이드웨이를 능가할 영화 한 편 정도는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포도농장 앞에서 삼고초려해서 만든 영화 같다. 실제 와인광이며 세계 각지에 와인농장이 있다는 제라르 드 빠디유. 사실 화려한 그의 필모가 무색하게 그의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진 못했지만 앤디 맥도웰과 출연한 <그린 카드>와 그 영화 속의 조지를 난 너무나 좋아하므로 일흔을 넘긴 그리고 예전과 똑같이 생긴 코를 지닌 거구의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뭔가 반가운 마음과 함께 쓸쓸함도 몰려온다. 나 역시 그린 카드를 처음 보았을때를 생각하면 똑같이 25년 더 나이든 것인데 유독 타인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서 회한을 느끼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사이드 웨이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남자들의 수다가 주를 이루는 로드무비이다. 다른것이 있다면 세대가 다른 남자 세명이 함께 움직인다는 것. 이들도 이동 중 늘상 와인을 마시고 어떤 여인들과 조우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프랑스판 사이드 웨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예민하고 감성적인가 하면 또 그렇진 않다. 화질탓이었는지 카메라 사용 방식때문이었는지 심지어 아주 공들여 만든 흔적도 없다. 그냥 영화 촬영을 핑계로 와인 여행을 떠난 느낌이다. 와인에 관한 과한 담론으로 있는척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이드웨이를 향해 코웃음이라도 치는듯 '무슨 개똥철학이니. 우린 그냥 마신다 이 미국인들아. 이게 진짜야.' 라고 말하는 것도 같다. 함께 여행을 하게 된 젊은 택시 기사가 mike 라고 소개하자 '뭐 마이크? 미케? 그거 미국이름 아니야? 이름이 마이크래. 키득키득. 뭐야.' 라고 보는 사람도 민망할 정도로 웃어제낀다. 

내 할아버지뻘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젊고 아들로 나온 이 배우는 또 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너무 나이 들어보여서 상대적으로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더 나이 든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소를 기르는데 헌신한 아버지 장. 하지만 아들 브루노는 가업을 물려받기가 싫다. 뭔가 지긋지긋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들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가축 박람회(?)에 참여중인 아버지는 아들과의 대화가 절실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피해다니며 박람회장 곳곳의 와인 농장 부스에서 취할 정도로 와인 시음에 열중한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좁힐 수 없는 차이와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려나 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택시 뒷자석에 나란히 앉아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즉흥적이다. 서로에게 초연하다. 사사껀껀 충돌해도 서로에게 삐지지 않는 느낌이랄까. 

장은 틈만나면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주가 되는 것은 하나뿐인 아들 브루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먼저 세상을 뜬 아내 전화기의 자동응답기이다. 우연히 화장실에서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아들 브루노는 그 사이 새 여자가 생겼냐며 아버지를 비난한다. 장은 말없이 아내의 전화번호를 눌러 아들의 귀에 가져다 댄다. 그 뒤로 택시 안에서 장과 브루노는 키득거리며 엄마의 자동 응답기에 메세지를 남긴다. 장은 한밤중에 숙소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지만 전화기의 용량이 꽉차있어서 더 이상 메세지를 남길 수 없게 된다. 뭉클했다. 한편으로는 청승맞은 설정이지만 전체적으로 무뚝뚝하고 투박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영화에서 오히려 아내와 엄마의 빈 자리를 느끼며 서로의 결핍에 공감하는 주인공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사진은 장이 명품 소 시상식에서 수상자로 나와 수상소감을 말하는 장면. 저 소를 끌고 인파 사이를 무덤덤하게 행진하는 그의 모습이 혹은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모습에서 바쁘고 고된 인생을 살아 온 자의 깊은 안도감, 그들이 비로소 획득한 자유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실제로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개인사가 겹쳐져서인지 아들을 쳐다보는 눈빛과 공들여 키운 소의 고삐를 꽉 잡고 있는 그의 모습이 더 절실해보이는 것도 있었다.  나쵸 두 봉지를 먹으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는 사이드 웨이 속의 세련된 농담이 더 좋지만 나쵸를 먹으면서 봐야한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더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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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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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뷰 읽고 이 영화 보구파졌오요 둘다 안봤지만 전 사이드웨이보다 이 영화가 더 보고파요 ㅎㅎ

    2019.11.18 23:3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제라르 드파르디유 러시아로 귀화한거 문득 떠올랐네요. 러시아말을 할까요 제라르드빠르디유는?

      2019.11.20 23:11 신고 [ ADDR : EDIT/ DEL ]
    • 어쩐지 못할거 같습니다 ㅋ 노어 따위 못해도 돈이 많으니 뭔들 ㅠㅠ

      2019.11.24 23:15 신고 [ ADDR : EDIT/ DEL ]

Film2019. 11. 11. 21:35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보다가 머릿속으로 급소환 된 프랑스 영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느 가족>의 엄마 면회 장면이 발단이었다. Guilliaume Canet. 매번 구일리아움? 귈레르메? 뭐 이렇게 저렇게 읽다가 얼굴을 봐야 아 기욤이였지 하고 뒤늦게 인식하게 되는 이 프랑스 배우. 나름 원어를 최대한 살린 한국식 표기이겠지만 왠지 프랑스 시골에 가서 당신 나라의 유명한 배우 기욤 까네 알아요 하고 현지인과 나름 친해지겠다고 이름을 내뱉으면 정말 아무도 못알아들어서 멋쩍어질 것 같은 배우 기욤 까네가 출연한 프랑스 영화이다. 헥헥. 사실 그가 요리사로 나왔던 어떤 영화를 이전에 본적이 있어서 아 혹시 이미 본 그 영화인가 긴가민가 하며 보기 시작했지만 풀죽은 월급쟁이 요리사가 자기 식당을 차려서 희망찬 삶을 시작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 식당을 차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무지막지하게 대출을 끌어쓰다가 폭망하고 모든게 꼬일대로 꼬여서 결국 캐나다로 도피까지 하게 되는 사실상 몹시 암울한 영화.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요소는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행복한 삶과 더 나은 삶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것일까. 재정적인 독립은 얼마만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것은 혹시 환상이 아닐까.  인간과의 끈끈한 감정적인 결속만이 결국 가장 순수한 형태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과연 그런식의 행복만으로 우리 인간은 만족할 수 있을까. 결국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은 완전치란 없이 무한히 확장되기에 끝없이 채우고 또 채워야만 하는 블랙홀 같은 것, 상대적 불만족을 합리화하는 대체어가 아닐까. 

요리사 얀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나섰다 웨이트리스 나디아를 알게 되고 둘은 연인이 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함께라면 뭔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영감과 용기를 얻은 이들은 때마침 매물로 나온 호수 앞 건물을 운명처럼(이라고 생각하며) 마주치게 되고 자신의 식당을 차릴 꿈에 부푼다. 많지 않은 월급에 모아 둔 돈도 없는 이들에게 유일한 대안은 대출. 건물을 사기 위해 적지 않은 대출을 받고 선금을 내기 위해 또 대출을 받고 식당 인테리어를 위해 또 대출을 받으며 결국 한 달에 몇 천유로에 육박하는 대출 이자를 감당해야 할 상황이 되지만 관련 법규에 맞지 않은 식당 설비와 인테리어로 식당 영업은 불가능하게 된다. 대출 상환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 법규에 맞게 고치려면 다시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이들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는 상황. 결국 업자를 만나 헐값에 식당을 되팔고 빚더미에 앉은 이들은 현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분열하기 시작하고 나디아는 자리잡을때까지만 아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캐나다 취업길에 오른다. 하지만 한 달 후를 기약한 나디아는 연락이 없고 얀은 여자친구의 아들을 건사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얀이 식당을 되파는것을 도와준 은인 행세를 한 남자는 알고보니 고리대금에 하층민으로부터 월세를 착취하고 사는 남자, 얀은 결국 그를 강도할 계획을 세우고 훔쳐낸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나디아의 아들 슬리만과 캐나다로 도주한다. 연락이 끊긴 나디아는 알고보니 마약 판매책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다. 나디아는 차마 아들을 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얀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그들은 눈물로 상봉한다. 얀은 변호사를 구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근처 식당에 취업한다. 이들이 얼마나 더 끔찍한 상황에 놓일지 보게 되는 것이 불안하여 영화가 끝나려면 얼만큼 남았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하지만 엄마없이 남은 소년 슬리만에 대한 진심어린 동정과 끝까지 나디아를 포기하기 않고 찾아내려는 얀의 노력은 희망적이었다. 어느 가족의 가짜 엄마와의 면회 장면과 나디아와 친아들의 조우 장면은 사실 그 상황 자체가 확연히 다른듯 보이지만 더 이상 엄마로써의 역할을 해줄 수 없음을 인정해야함에 있어서는 똑같이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래서 아마 이 영화가 떠올랐을거다. 

얀과 나디아의 아들 슬리만이 잠시 머무는 카페 장면이 있는데 이곳이 탕웨이가 만추에서 갔던 카페랑 너무 비슷해서 놀랐다. 감옥에서 출소해서 탕웨이가 들어서는 카페가 우울감 가득한 영화 속에서 가장 고요하고 안정적인 정취를 불러 일으켰듯 힘든 상황이지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길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얀이 잠시 현실에서 도피하여 바닷가에 머물며 유쾌한 웃음을 나누는 이 장면은 이들에게 더 큰 불행이 닥치는 것은 아닐까 끝없이 음울해지는 와중의 영화 속에서 잠시 한 숨 돌리며 마음을 쓸어내리게 해주는 따사로운 장면이었다. 

세상은 살기 다급한 사람들의 약점을 안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잘 살고 싶은 사람들, 모험을 하지 않으면 이 생애에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급한 사람들의 움직임에 온 촉각을 내세우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무서운 사람들로도 가득하다. 비단 고금리 대부업체나 사기꾼들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불행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은 마치 모두가 그처럼 살아야할것처럼 자신의 성공담을 팔아먹고 꼭 막다른 길목에 놓인 불우한 사람들이 아니어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을 뒤돌아보며 더 나은 인생에 대한 청사진을 그린다. 이 세상에 '더 나은 삶'보다 강력한 떡밥은 없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돈을 벌고 돈이 없으면 그런 삶은 불가능해보이는데 돈을 벌고나도 이미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기 힘드니 문제다. 어쩌면 얀은 감당하지 못할 변호사 비용을 치르고도 나디아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해서 그들은 지쳐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인생이 그렇게 우리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때에도 최소한 함께이기에 덜 불안하고 덜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덜 불행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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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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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19. 11. 10. 17:13

 입속에서 제목을 읊조리마자 단번에 마음에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코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영화. 오래 전에 이 터키 감독의 다른 영화를 재밌게 본 기억도 있지만 제목에 겨울이 들어간다니 무조건 마음에 들었다. 세상 모든 곳의 어떤 추위가 기본적으로 공감과 동경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겨울과 추위들을 많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서도 좀 더 풍부하고 산문적인 감정으로 보존하고 싶은 욕구도 있는듯하다. 길고 지루한 겨울임에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 그곳에서 짧고 찬란한 여름 이상의 빛과 따사로움을 맛보고 싶은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이 한 장의 포스터는 영화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포착했다. 포스터의 첫인상은 어느 소인국의 버려지고 황폐한 성을 걸리버 같은 사람이 케익인줄 알고 가져와서는 냉장고 냉동실에 넣어놨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절묘하게 기억해내서 먹으려고 하는데 급한 성질에 정말 너무 꽝꽝 언 나머지 도무지 먹을 수가 없어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 직전의 느낌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을 생각하며 포스터를 좀 더 깊숙히 들여다보면 냉동고 속에서 타성처럼 자라나는 쓸모없는 성에들처럼 봄이 와도 녹아 내릴 것 같지 않은 하얀 눈 더미에 뒤덮힌 빛 바랜 성채가 보인다. 그 안을 가득 메운 것은 습관이 되어버린 권태 그리고 그 모든 권태와 자기 기만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인물들이다. 뒷편의 희뿌연 안개를 넘어서면 그들을 제외한 모든이에게 허락된 듯한 따스한 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을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그 모든 기쁨과 환희에서 열외가 되어버린 그들만의 폐쇄적인 왕국의 느낌은 더욱 짙어진다.      

이 일러스트는 좀 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봄의 태양은 떠올랐고 강은 이미 녹아서 흐르고 있지만 고뇌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뭔가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며 영화가 끝나는 듯 하지만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계절이 바뀌듯 갈등과 화해도 그냥 순환할 것 같은 느낌이다. 터키 영화이고 이곳은 카파도키아의 어디쯤. 동굴 호텔 속의 벽난로, 온화한 조명, 인물들의 대화 한가운데 빠짐없이 등장하는 찻잔이 내뿜는 따뜻한 기운, 끝없는 혹한의 느낌 때문에 더 그랬겠지만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내던져지는 조곤조곤하고도 맹렬한 터키어가 러시아어적 카리스마를 풍기면서 매력적으로 들려온다. 흥미진진한 시나리오도 아니고 영화의 분위기도 관조적이고 명상적이지만 3시간 반 가량 되는 영화는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의 굵은 뼈대가 되는 것은 인물들의 집요하고도 통렬한 대화 장면들. 심지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런 두 인물의 대화만으로 20여분을 끌고가는 대범함을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호텔 투숙객들과의 형식적이고 일상적인 대화들이 깨알같이 배치되어있다.

영화 속의 동굴 호텔, 그리고 아내의 방과 남편의 서재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카파도키아의 특유의 지형이 만들어낸 이 특수한 주거 형태는 한없이 자기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을것처럼 비밀스럽고 동화적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감정적으로 고립된 인물들을 표현해내는데 최적의 배경이 된다. 어려서부터 사진을 찍었다는 이 터키 감독이 포착해낸 아름다운 겨울의 경관들은 인물들의 핏발 서린 말싸움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아내' 에서 소재를 끌어오긴했지만 여러모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여러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 영화이기도하다. 예민한 논쟁을 통한 아슬아슬한 심리 묘사, 인물들의 장황한 대사와 분석적인 서술로 가득한 그의  소설을 읽으며 본능적으로 작가가 그렇게 공들여 표현해낸 장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머릿속에 그려보게 되고 소설에 어울릴 것 같은 배우들을 떠올려보게 되듯이  이 영화를 보면서는 꼭 그 반대의 기분이 들었다. 영상으로 구현해내긴 힘들것이라 생각되는 한 편의 긴 소설을 읽는 기분. 반면 소설이었더라면 한 페이지 정도를 할애해서 내밀하게 묘사되었을 어떤 상징적인 장면들은 아주 차갑고도 객관적인 각도의 정지된 화면으로 순간순간 등장하며 신랄한 대화 장면들을 매끄럽게 이어준다. 천장 아래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축축한 빨래줄을 통해 덕지덕지 붙은 가난을 묘사하다 병을 고치려면 이탈리아로 요양을 가야한다고 말하는 쌩둥맞은 의사를 배치하며 궁핍을 극대화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한 장면이라든가 정신 나간 레뱌드낀의 여동생의 볼품없는 모습과 그녀의 식탁에 놓인 몇군데 뜯어먹은 독일빵을 묘사하는 악령의 어떤 장면이 지극히 시각적으로 다가온다면 서툰 동정심으로 돈을 들고 온 집주인의 아내에게 이미 끓여놓은 차에 뜨거운 물을 넣어 희석시킨 차를 대접하는 가난한 세입자의 모습이 대사없이 무덤덤하게 클로즈업 되는 영화의 한 장면은 역으로 소설속 묘사처럼 읽혀졌다.        

 영화는 월세가 밀려서 티비를 빼앗긴 할머니, 사람을 때리는 바람에 감방에 다녀와 새 직장을 찾기도 수월치 않은 세입자의 어린 아들이 불만을 품고 지주 어른 작가의 자동차에 돌을 던지는것으로 시작된다. 소년의 되바라진 행동과 깨진 유리창에 대해 책임을 물으러 세입자의 집을 찾아간 주인은 어지럽혀진 마당에서 세입자들의 가난을 목도하게 되지만 올리브가 세 알 밖에 없으면 예쁜 접시에 담아먹으면 될 뿐이라고 현실과 겉도는 소리를 할 뿐이다. 반면 세입자는 돈이 없을지언정 굽실거리지 않고 자존심 하나로 꼬장꼬장하다. 동네 이맘인 세입자의 동생은 그런 형과 달리 현실적이다. 돌을 던진 조카를 데리고 밀린 월세와 유리창 값에 아량을 베풀어줍사 거의 헐벗은채로 먼 길을 걸어서 호텔까지 찾아온다. 주인님 손에 입을 맞추고 용서를 빌라는 삼촌의 다그침에 호텔 주인은 겸연쩍게 손을 내밀고 아빠만큼의 자존심과 원칙을 지녔던 어린 소년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절을 한다. 

터키의 현재가 배경이지만 은퇴한 연극배우이자 이따금 지역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것으로 소일하는 주인공 아이딘은 거대한 영지를 거느린 봉건시대의 지주처럼 묘사된다. 그는 마을의 전통적인 부호였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주택들을 임대하고 동굴을 개조한 호텔을 운영하며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살아간다. 그의 삶은 한편으론 질투가 날 정도로 따스해보인다. 바깥의 추위와 누군가의 혹독한 가난과는 동떨어져서 지금까지 그가 누려온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는 물건들로 가득한 그의 서재 안에서 때가 되면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차와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더할나위없이 아늑하다. 이 동굴집에는 남편 아이딘과는 이미 오래 전에 거리를 두기 시작한 듯 보이는 젊고 예쁘지만 차가운 아내 니할과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성실하게 관리하는 오빠네 집에 얹혀서 무료한 삶을 사는 이혼한 여동생 네즐라가 있다. 호텔과 서재, 아내의 방, 거실들은 꽁꽁 언 바깥 마당을 통해서야 비로소 연결되고 마치 성탑에 갇힌 사람들처럼 창문을 통해서만 서로의 동태를 파악한다. 아내와 남편간의 그 어떤 스킨쉽도 남매간의 다정함도 모두 배재된채로 각자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가장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이들. 가정부에게 누가 아침에 커피를 마셨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따위를 물으며 서로를 향한 관심을 내비치는것이 전부이다. 

남편의 돈으로 지역 사회의 기부에 열중하는 아내 니할은  지속적으로 호텔에서 자선 행사를 연다. 아이딘은 자신에게는 항상 냉랭하게 대하면서 자기 집에서 자기 돈으로 자신의 친구들을 비롯한 마을 남자들게 웃음을 보이며 상냥하게 소통하는 아내가 못마땅하다. 반면 아내 니할은 이미 애정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은 돈많은 남편에게 재정적으로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쉽게 그를 떠날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심리적으로 이용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아이딘을 증오한다. 여동생 네즐라는 오빠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척 하면서 사사껀껀 비꼬고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는다. 아내와 여동생은 없는 자에게 별다른 동정을 베풀지 않는 작가를 비판한다. 작가는 손까딱하지 않고 놀고 먹으면서 누군가가 벌어놓은 돈으로 자선과 동정을 운운하며 고고한척하는 아내와 여동생을 이해할 수 없다.  코엔형제의 <아리조나 유괴사건>에서는 불임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지만 전과가 있어 입양도 할 수 없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홀리 헌터가 동네 가구 회사 사장의 일곱 쌍둥이 중 아이 하나를 훔칠 계획을 세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납치를 계획하게 했을까. 아이가 일곱이나 있으니 한 명 정도 없어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서였을거다. 나보다 많이 가졌으니 하나 정도 덜 가져도 괜찮고 많이 가졌으니 당연히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특히나 그런 생각을 덜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열심히 노력해서 가진자에게는 더없는 폭력이다. 항상 덜 가진 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기에는 부라는 것은 너무나 상대적이다. 극 중 여동생 네즐라는 오빠에게 있는 자로써의 관용과 희생을 요구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도 이스탄불에서 산 예쁜 접시를 깬 가정부의 월급을 깎을 고민을 하는 가진자에 불과하다. 젊은 아내는 기부에 참여하겠다는 남편이 준 돈을 가지고 세입자를 찾아간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세입자는 그 돈꾸러미를 보란듯이 벽난로속으로 던져버린다. 누가봐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분인데 그의 다른 소설 악령의 한 부분에는 심지어 이런 구절이 있다. '자선에서 나오는 쾌감은 교만하고 부도덕한 쾌감이며 부자가 헐벗은 자의 의의와 자신의 의의를 비교해서 자신의 권력과 부에 탐닉하는 쾌감이다. 자선은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다 타락시키고 더욱이 목표에 이르지도 못하고 헐벗음을 배가시킬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르바라 뻬뜨로브나의 입을 빌려 전달하는 메세지도 극중 아이딘이 아내에게 쏟아내는 이야기들과 다르지않다.    

 영화의 백미였던 20여분에 달하는 아이딘과 네즐라의 말싸움 장면. 한마디 두마디 나름 이성적으로  오고가던 불만과 비판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가장 예민한 부분들, 상대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약점을 보란듯이 건드리는 인신공격으로 이어지며 겉잡을 수 없는 상태로 내달린다. 상대가 침묵과 이해로 감내하고 있을지도 모를 내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가장 양심적이고 가장 올바르고 이상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치켜세우며 상대를 짓밟는다. 무엇이 우리를 아집이라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늘상 상대의 실수와 결점을 비난하고 그것을 고치겠다는 생각으로  그토록 엄격한 우리가 그 오만한 겨울잠에서 깨어나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내가 매순간 누군가에 의해 이해받고 배려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때에야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혼한 여동생 네즐라가 남편과의 관계를 회상하며 남편의 악행에 맞서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남편 스스로가 그 자신의 악행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인내하고 배려했더라면 그들의 관계는 지금과는 달랐을거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가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도박에 빠져서 가진것을 탕진하고 미리 받은 원고료에 부랴부랴 소설을 써야했던 남편을 그저 지켜보고 노름 못해서 안절부절하는 남편에게 오히려 돈을 쥐어주며 도박장에 보내던 안나. 그런 안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결국 도박을 끊었다는 도스토예프스키도 결국 그의 재능을 사랑했고 그의 결점을 사랑으로 인내했던 아내가 있었기에 존재했던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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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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