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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1.20 Beyond the hills (2012)
  2. 2020.01.14 Can you ever forgive me (2018)
  3. 2020.01.13 워킹데드 시즌 10을 보다가 잡담
  4. 2020.01.11 Marriage story (2019)
  5. 2020.01.10 기생충 (2019)
Film2020. 1. 20. 07:44

 

제목이 비슷해서 더 그랬겠지만 빛이 바랜 사진 느낌의 포스터에서 오래전 영화 비포 더 레인을 회상하며 보기 시작했다. 멀리 펼쳐진 언덕을 뒤로하고 또 다른 언덕 어딘가로 급히 오르고 있는 짐가방을 든 두 여자의 느낌도 좋았다. 언덕 너머에 뭐가 있을까. 뭐가 있을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서 오르는 언덕은 아니길 바랬다. 저런 목가적인 풍경은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불행을 도드라지게 했고 세상은 또 나 몰라라 하고 그들에게 등을 돌리곤 했다. 부디 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지 않기를. 비포 더 레인에 마케도니아의 어느 높은 절벽에 홀연히 위치한 정교회가 등장했다면 이 영화는 루마니아의 궁벽한 정교 수도원이 배경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들 나라들은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를 그런 산과 평원, 가까운 하늘을 공유하며 비슷한 색채의 유사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좀 더 멀리 가서 터키나 이란 영화에도 은근히 녹아있는 그런 우울하고도 이국적인 정서가 이 포스터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알리나와 보이치타. 독일에서 일하는 알리나는 보이치타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으로 고향 루마니아로 돌아오지만 정교 수도원에서 수녀의 삶을 시작한 보이치타는 그럴 생각이 없다.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뿐이었던 어린 이들 사이에는 성적 교감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으며 알리나는 여전히 그 감정에 얽매여있지만 보이치타는 이제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신 뿐이라며 알리나가 꿈꾸는 둘의 삶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독일로 돌아갈 날은 다가오지만 보이치타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알리나는 불안하다. 보이치타는 오갈데 없는 알리나를 수도원에 머물게 해달라고 신부님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알리나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조건과 함께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자리가 없는 빠듯한 수도원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치타는 알리나 역시 자신처럼 종교에 귀의하기를 바란다. 알리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전처럼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 그 둘이 계속해서 함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나는 입만 벌리면 신을 들먹이는 보이치타에게서 배반감을 느끼고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과격해진다. 수녀들과 신부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난폭해지는 알리나를 악마에 씐 것으로 간주하고 세상에 종말이 온 것 같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결박한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이지만 오히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유머러스하다. 하지만 코미디라는 장르를 빌려 만들어낸 웃음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그 본인들은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남다른 원칙으로 그 상황을 존속하고 보호하려고 진지한 얼굴로 애쓸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을 때의 그 느낌이다. 이 수도원은 신의 부름을 받고 종교적 사명감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기 보다는 나이가 차서 고아원을 나와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발을 들여놓는, 마치 일용직 근로자들을 가득 태우고 일터를 향하는 허름한 봉고차처럼 치열한 곳이다. 보이치타가 수도원의 규율에 반하는 알리나의 행동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친구가 걱정되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수도원말고는 더 이상 그 인생을 책임져 줄 곳이 없다라는 불안감에서이다. 결국 독일에서 유람선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든 루마니아의 고립된 산자락 어디에서 수녀가 되든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이른 아침 수도원의 아침 식사 시간을 채우는 것은 종교적 위엄이 깃든 성스러운 대화라기보다는 여보 쌀이 떨어졌어요 식의 의식주 해결에 관한 세속적인 대화들이다. 수입과 지출을 잘 안배하고 한 푼 한 푼 아껴써야 성당벽에 그림 그릴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 성당이 좀 더 믿음직스러운 곳으로 발돋움하려면 기적의 이콘도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정교적 요소와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서인지 사실 수도원의 일상이 묘사된 부분은 아름답다 느꼈다. 눈으로 뒤덮힌 수도원의 풍경과 극단적인 추위 묘사도 좋았다. 전기가 없어서 촛불을 켜고 생활하고 매번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번거로움도 금욕적인 고행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 모든것은 마치 중세시대를 연상케하는 고립되고 낙후된 수도원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첩첩산중에 한때 곳간으로 쓰였을 법한 집들을 개조해서 만든 듯한 지붕도 채 이지 않은 궁색한 수도원을 보니 이곳은 이제 막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하루하루의 행보가 의미심장하다. 이 장소가 성스럽고 신실하다는 소문이 나야 이 공간은 유지될 것이며 후원금이 생겨야 제대로 된 난방도 할 수 있을 거고 물이 새지 않게 지붕도 고치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구색에 맞춰 성당 벽화도 그려야하고 이콘이 놓일 장소도 잘 보살펴야 한다. 그저 신을 믿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의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난방도 되지 않는 꽁꽁 언 방 속에서 우물을 깃는 쇠사슬로 꽁꽁 묶인 가엾은 양을 향한 기도, 알리나를 결박하는 수녀들의 몸짓과 눈짓은 진심으로 알리나를 걱정하고 있으며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절박하다. 그들은 정말 진지하다. 알리나를 향한 조금의 악의도 없다. 그들은 맹목적인 신념에 매몰되어서 그것이 빚어낼 결과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할정도로 무지하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 선 아니면 악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가장 큰 악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사실 영화의 결말에 있어서는 애매하다. 알리나는 구급차에 실려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결박한 흔적,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알리나의 상태등으로 수도원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간다. 자신들이 한 짓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며 울먹이고 절규하는 사람들 뒤로 보이치타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하다. 결국 알리나를 악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보이치타였을까. 돌아왔던 곳으로 다시 가라며 한밤중 알리나를 감싼 쇠사슬을 풀어준 것은 이제는 해방되고 싶은 스스로를 향한 고발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그 자신을 압도한 무지한 신념의 극치였을까. 이 영화도 크라이테리온에서 발매되었네. 좋은 화질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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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20. 1. 14. 07:00

 

 

 

많은 좋은 영화들을 보지만 저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친구가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이나 천국보다 낯선의 에바, 칼리토 같은 내가 두고두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영화 캐릭터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너무나 행복했다. 누군가가 생각나면 그의 사진을 꺼내보는 것처럼 어떤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내 마음을 뺏어간 인물의 습관, 그의 유머, 말투, 그의 생활공간들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허구의 인물에 어떤 추억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나에겐 그것이 영화를 보는 가장 큰 매력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매일의 일상으로 채워진 우리의 삶 자체가 내일이라는 명백한 허구를 향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영화를 두 번째 보는데 첫 번째 볼 때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친 문구가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한 줄. 순간 너무나 슬펐다. 아 저렇게 반짝이는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었다니 출처를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었다. 그녀가 허구의 인물이었다면, 이것이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 자체는 더욱 빛났을 거라 생각하니 역설적으로 이것이 꾸며낸 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 이상야릇한 배반감을 느낀 것이다.

 

 

영화 속의 리 이즈라엘은 슬럼프에 빠져든 전기 작가이다. 장난 전화 걸기를 즐기고 설거지를 할때조차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파트 임대료를 낼 돈도 병든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갈 돈도 없는 그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어떤 작가의 편지를 서점의 수집상에게 팔고 돈이 된 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유명 인물들이 교환했을 법한 편지들을 제조하는 나름의 창작을 시작한다. 고양이 약값을 마련하려고 시작한 일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그의 본능에 불을 지피며 걷잡을 수 없이 규모가 커진다. 그녀는 여러 타입의 타자기를 집에 구비해놓고 작가들의 사인을 위조하고 심지어 오래된 편지처럼 만들려고 편지를 오븐에 굽기도 하며 스스로의 재능에 빠져든다.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스마트한 지능범이 없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그녀의 행위는 발각되며 처벌을 받는다. 그녀는 결국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그러니 있지도 않는 작가들의 편지를 창작해서 벌 받은 사람의 자전적 소설을 다시 각색해서 만들어진 이 영화의 탄생 배경 자체가 신선하다.  

 

 

배경은 90년대의 뉴욕이다. 2년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신기하게도 나 홀로 집에 2탄에서 케빈이 성탄절을 보내던 그 90년대의 뉴욕의 느낌이 너무 진하게 묻어났다. 아마도 그렇게 내가 영화를 통해 접한 뉴욕의 첫인상이 그 도시에 대한 추억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뉴욕이라는 도시 특유의 심상을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내려고 애를 쓰던 우디 앨런의 영화를 필두로 한 많은 영화들에서 때로는 배타적인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영화는 세련되지도 잘 나가지도 않는 어떤 개인의 추억과 애상이 아기자기하게 묘사돼서 귀엽다는 느낌을 가지고 봤다. 마치 특선 대작들 사이에 끼워서 방영되는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오후에 해주는 그런 영화의 느낌 말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내 것이었으면 하는 인물의 일상들 습관들 같은 것이 있다. 지금도 고스란히 저런 장소들이 남아있을까 싶은 뉴욕의 오래된 서점들, 늦은 밤 승객이 드문 허름한 지하철 안에서 미국인들이 손에 쥐고 읽곤 하던 두껍지만 가벼운 그런 책들을 팔 법한. 리 이즈라엘이 낮술을 하기 위해 습관처럼 드나들던 동네 술집, 레즈비언인 그녀의 나이 든 게이 친구, 그들이 걷는 거리와 그들의 자유분방한 대화, 여러 영화들을 통해 등장하던 비슷한 구조의 뉴욕의 아파트 등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도 발랄하게 그려진다. 90년대의 뉴욕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젖어드는 아련함은 아마도 내가 접속이나 초록 물고기 같은 영화를 보며 빠져드는 그것과 비슷할 것 같다.  

 

 

리 이즈라엘의 이 아파트 구조는 익숙하다. 저 정도의 삶은 우리 눈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보통 좀 뭐가 잘 안 풀리는 주인공들이 사는 집으로 나오는 거 보면 미국의 생활 수준이 확실히 나은 건가.라고 생각하다가도 엄청 큰 집에 살고 두세넷의 아이들을 키우며 3리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오렌지 주스를 아침에 꺼내어 먹는 주인공들도 보통 모기지론으로 집 산 처지일 테고 저런 아파트도 우리의 주인공들을 임대료에 허덕이게 만들곤 했겠지. 그 와중에 저 케맥스 드립 포트 옆의 커피 잔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극 중 그녀의 생활 습관으로 보건대 저 필터는 아마 한 달 넘게 치우지 않아 커피 찌꺼기 위에 곰팡이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 그녀도 절대 잊지 않는 것이 있으니 고양이 밥 주기. 고양이 약 사려고 시작한 범죄 행위는 사실 고양이의 죽음과 함께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기며 그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리 이즈라엘의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것은 유명 인물들이 교환한 서신이나 물건들을 되팔고 수집하는, 책 속에 굳어진 케첩 자국조차 상업화하고 소비할 수 있을 것 같은 미국 특유의 문화이다. 게다가 작가들의 삶과 그들 특유의 필치를 잡아내는 그녀의 능력까지 더해져서 편지 위조 행위는 꽤나 그럴듯한 창작 행위가 되어간다. 그것은 결국 범죄 행위였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그의 용기이자 재능이라 느껴졌다. 그녀는 그 능력을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할애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극 중 출판사 사장의 말처럼 상품 가치도 없는 다른 인물의 전기문을 쓰는데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그녀는 게으르고 타성에 젖은 작가일 뿐이다. 그녀에게서 몇 통의 위조된 편지를 사들인 서점의 여주인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리 이즈라엘을 동경하며 그녀가 쓴 짧은 소설의 원고를 읽어 봐 달라고 건넨다. 리 이즈라엘은 그 원고를 쉽사리 읽지 못한다. 자기의 것을 시작할 수 없는 용기.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그녀는 점점 더 위조 행위에 매달린다. 

 

 

영화는 한편으로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 휘황찬란하고 격동적인 그 도시의 한편을 배회하는 외로운 인물들의 삶을 무심한 듯 진실하게 묘사한다. 갈 곳이 없는 나이 든 게이를 연기한 리처드 E. 그랜트의 연기는 내가 본 동성 연애자 연기 중 최고였다.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운 베를린을 배회하던 파니 핑크와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던 동성 연애자인 아프리카 주술사의 모습도 떠올랐다. 미움받고 손가락질당해도 생긴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인물들, 그들이 만나서 오직 자기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선물 받았을 때의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편집장 친구의 삶에서 넓은 아파트를 상속받은 행운만을 부각시키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매너리즘에 빠진 리 이즈라엘이 남의 삶을 위조하며 쾌감에 젖는 것을 보며 아슬아슬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의 행위에 빠져든다. 타자기를 앞에 두고 미친 듯이 위조에 몰두하는 그녀를 보고 범죄자를 향한 비난 대신 우리가 느끼는 이 카타르시스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것에 치이고 저것에 치여서 제대로 나 답게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삶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만이라도 나 자신의 삶에 완전하게 취하게 하는 그 섬광 같은 자기 긍정과 확신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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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20. 1. 13. 07:00

 

 

특정 드라마들을 수년에 걸쳐서 보긴 하지만 드라마 공식 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제작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살피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몇 시즌을 이끌어가던 주연급 배우들이 뚱딴지 같이 갑자기 사라져서 나오지 않고 그래도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검색 한 번 이면 알게 될 이야기들이겠지만 육아휴직 갔나?라는 식으로 웃고 넘어갈 뿐 사실 그다지 궁금하지가 않다. '뭐지? 왜 이러는 거야 이 드라마' 하는 물음표를 안고 영향력 있는 주연들의 공백을 메우려 급히 수혈된 또 다른 주연급 배우들의 역할에 그저 이끌려 가며 어떤 식으로든 기사회생하려고 애쓰는 드라마의 생존 방식을 지켜보는 것이 스토리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드라마는 무슨 나루토나 원피스 같은 일본 만화영화(안끝난거 맞나?)처럼 네버엔딩 좀비 드라마가 되고 싶은 건지 수많은 좀비 엑스트라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의 매력을 포기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며 그럭저럭 잘 연명하고 있다. 이래도 저래도 금전적으로 손해 보지 않는 드라마라면 굳이 끝을 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예상하거늘 그런 제작방식들에 질린 일부 배우들은 파업을 선언하며 박차고 나간 거겠지. 하지만 좀비와 싸우는 것도 모자라 좀비를 조종하는 무리를 생각해낸 것은 협소한 상상력을 가진 나에겐 충분히 신선했다. 그리고 그 무리를 이끄는 사만다 모튼(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물속에 잠겨있던 그 여인)을 등장시키며 꺼져가던 드라마를 간신히 살려내고 이제는 안 되겠다 싶으면 미드들이 곧잘 꺼내 드는 소련 카드도 나왔다. 이제 뭐가 남았지. 그게 궁금하니 남은 시즌도 또 열심히 보겠죠.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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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20. 1. 11. 04:38

 

 

누구나 이 영화를 보면 이것이 노아 바움백의 자전적인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할 거다. 공식적으로 감독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제니퍼 제이슨 리라는 걸출한 배우와의 결혼과 이혼이 극중 연극 연출가인 아담 드라이버와 배우인 스칼렛 요한슨의 결혼 생활과 이혼 공방에 투영 되었으리라 넘겨짚게 된다. 사진 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저 장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빰엔 아마 눈물이 흘러 내렸다. 왜 날 사랑하지 않느냐며 펑펑 우는 수동적인 눈물이 아니라 계속 작아지고 작아져서 이대로 매몰될 수는 없다는 독립된 자아의 능동적인 눈물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은 한편으로는 이글거린다. 짧게 자른 머리, 무채색의 얼굴, 손목에 찬 시계, 시종일관 남성적인 패턴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오는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아빠의 역할도 거의 도맡아 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내가 바라는 내가 아니다. 그녀는 그런 자아에 타협할 수가 없다. 아담 드라이버는 도무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는 법적 부부로서의 징표로만 느껴진다. 모든것이 그런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연극은 브로드웨이로 가고 아내도 나름의 커리어가 있다. 때로는 귀찮게 느껴지는 어린 아들은 어쨋든 계속 자라고 있다. 전만큼 뜨겁게 사랑하지는 않겠지만 이혼씩이나 해야 할 정도로 뭔가가 크게 잘못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혼은 얼마나 뭐가 어떻게 잘못되어야 하게되는 선택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없는 이혼은 없지만 이혼이 실패한 결혼의 동의어로 해석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이다. 이혼 할 용기가 있으면 보다 상대를 이해하고 결점을 보듬으며 살아라가 아니라 오히려 이혼할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결혼을 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혼 생활에서 배우자와 부모로써의 역할 기대에 수동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은 과연 가능한일일까. 이 영화는 남녀 둘 중 누구 한명을 굉장한 피해자로 설정하고 이혼 과정에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문제를 숫자로 단순화하고 관계를 도식화하는 피튀기는 법적 공방으로 피폐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광활한 미국 사회 특유의 풍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남이었던 두 사람이 우린 남이 아니야 라는 결혼 장치에 스스로를 세뇌하다 법적으로 다시 처절하게 남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씁쓸했다. 범죄 전문 변호사는 나쁜 사람도 좋게 만들어야 하지만 이혼 전문 변호사는 정상적인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극 중 변호사의 말처럼 누군가는 절대적으로 나쁜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혼은 상대를 짓밟고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계속 성장하고 싶었던 한 인간의 외침이었다.  

 

 

적지 않은 아담 드라이버의 영화를 보았지만 그는 나에게 왠지 밉상 캐릭터로 남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 조금 친근해진 느낌이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참 좋았다. 갑자기 뮤지컬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호소력있었던 노래 실력. 거의 이혼을 당하다시피하고 그 과정에서 마치 몽땅 잃은 듯 보이는 그를 동정하게 만들기 위한 편파적인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승자없는 싸움으로서의 이혼과 패자를 양산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맹점을 환기시킨다. 이 영화에서의 이혼은 결혼의 정반대 개념이 아니라 결혼과 동일한 크기의 조각을 이루는 관계의 일부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랍스터가 생각났다. 절대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돼며 결혼이 불법인 사회와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신시키는 양극의 두 사회. 이래도 저래도 우울한 사회다. 결혼은 정말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인 미친 짓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살며 두 사람 모두 각자 가장 순수한 결정의 자아로 영원히 남고 싶은 열망. 그것은 정말 신기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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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20. 1. 10. 05:52

 

 

 

이 영화도 거의 3시간 가까이나 돼서 더럭 겁이 났지만 너무나 재밌다는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를 지닌 채 기대를 너무 많이 하면 실망할까 봐 최대한 자중했던 그 노력이 불필요했다 느낄 만큼 좋은 영화이기를 기대하면서 보았다. 이것은 확실히 너무나 잘 만든 영화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봉준호 최고 영화가 마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마 괴물을 기점으로 더없이 확장된 봉준호 영화의 스케일과 누구라도 공감할만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 냉소적 유머를 가미한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그의 영화가 이제는 내 개인적 추억과 애정을 가지고 대하기엔 너무 거대하게 느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인공적인 웃음을 뺀 마더 특유의 일관된 긴장감과 분위기가 결국 그의 연출에 있어서는 가장 오리지널 했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여전히 김혜자의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물론 마더와 같은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탈 순 없었을 것이고 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 이만큼 어필할 순 없었을 거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가장 흡입력 있고 영화적 매력이 극대화된 중반 부분 (과외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좁고 궁색한 동네 골목을 빠져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해서 깔끔하고 폐쇄적인 부자 동네를 올라가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가족이 부촌에서 탈출하여 빗속을 뚫고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시궁창이 되어버린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까지)을 지배하고 있는 서스펜스는 결국 이미 마더를 통해 보여준 그의 도발적이고도 탄탄한 연출력이 확장된 절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끊어버릴 수 없는 수직의 사슬로 촘촘하게 직조된 사회와 그것의 최상위 포식자로 위치한 상류 사회에 대한 이물감은 버닝이나 하녀와 같은 영화에서도 다뤄졌다. 그 영화 속의 인물들 역시 그 뿌리 깊은 계층간 모순의 희생양이 되며 결국은 몰락한다. 이 영화는 비슷한 상황을 좀 더 대중적이고 유쾌한 화법으로 풀어낸다. 결론이 좀 달랐으면 좋겠다 생각한 것은 아마 만약 내가 이 영화에 실망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실망할지에 조금 초점을 맞추고 봤기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왕 피를 본 김에 좀 더 하드고어로 갔어도 좋았을 거다. 가령 모든 사건의 발생 이후에도 저택의 지하실에 남아 연명하는 송강호가 화장실 변기를 얼마간 응시할 땐 지하실 속에서 썩어가는 가정부의 시체를 토막 내서 변기 속에 조금씩 내려보내다 미처 내려가지 못하고 떠오른 살점을 응시하는 것이라 순간 상상했는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당에 손수 잘 묻어줬다고 봉준호 영화 속의 송강호 특유의 톤으로 얘기하는 부분은 나로서는 끝까지 조금 더 웃픈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던 불필요한 노력이었다고 느껴졌다. 코엔 형제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했던 자잘한 블랙 유머들을 봤을 땐 좀 더 마음껏 자조하고 비웃으며 끝까지 끈덕지게 빌붙는 식의 극한의 블랙 코미디였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누가 어떤 특정 장르에 좀 더 집착하느냐의 개인적 취향에 따른 아쉬움 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초반의 가장 강력한 복선은 아마도 뜬금없이 과외 선생님을 케빈이라고 칭하는 포복절도할 순간 인디언 복장을 한 아들이 활을 쏘며 등장하는 부분이다. 그 부분에서 이미 이 영화의 참극은 예상됐다. 감독과 몇 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한 틸다 스윈튼이 출연했던 케빈에 대하여에서 그녀의 아들 케빈은 정원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고 학교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무차별적으로 활을 쏘아 죽인다. 거실에 걸어놓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의 그림이 결국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라는 짝퉁 미술 치료 교사의 말에 벌벌떠는 부자 엄마에 대한 냉소적 묘사는 어딘가에서 차용해 온 소재도 뒤틀어서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감독의 능력임이 분명하다. 핸드폰 케이스에 적힌 회사의 이름이 잘 손질한 심플한 명함 위의 회사로 재탄생하고 그 명함 한 장에 솔깃한 표정을 흘리는 사장의 모습에서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누구의 명함이 더 잘빠졌는지로 설전을 벌이는 속물들 속에서 절망감에 빠지는 크리스천 베일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라서 재밌었다. 많은 인상적인 장면들 중에도 잊히지 않는 것은 8분 안에 짜파구리를 끓여야 하는데 한우를 썰어 넣는 장면. 하수구를 배회하는 쥐새끼들처럼 먼발치에서 클로즈업된 계단을 정신없이 내려가는 가족들의 모습과 벼름박에 일관적으로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에게 물을 뿌리는 장면이 슬로모션 처리된 부분이었다. 심지어 이 장면은 아름답기조차 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미장센이 떠오를 만큼. 

그리고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그때, 마치 두고두고 되돌려 보고 멈춰서 보고 늦춰서 보고 싶을만큼 웃음이 남아있던 그 순간, 오줌을 싸는 그 나쁜 놈을 향해 그 거대한 수석을 들고나가 길바닥에 박살 내어버렸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것은 무언가가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느끼는 찰나의 순간 눈과 귀를 가리고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른다. 온 동네를 전부 집어삼키는 폭우 속에서도 보란 듯이 떠오르고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있던 치부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류하며 그 탐욕은 소독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소독약도 결코 박멸할 수 없다. 피땀을 흘려서 번 5천 원과 수를 써서 번 천원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은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만족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5천 원을 향한 노력은 시간 낭비이고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진다. 줘도 못먹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편법이 횡행한다. 그리고 그 모든 혼돈 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누군가는 더 크고 견고한 조각의 빵을 소유한채 군림한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왠지 돈을 쉽게 벌었을 것 같다. 과외비에서 지폐 몇 장 빼내지 않아도 그들은 여전히 풍족할 것 같다. 양주 몇 병 빼서 마셔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도 귀뚜라미가 날고뛰는 반지하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을지도 모르는일이다. 비슷한 형편에 놓인 사람들을 머리 굴려 눌러 밟고 간신히 벗어난 어떤 지난한 삶은 결국 어떤 섬유 유연제로도 씻어낼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표식이 되어 자괴감을 증폭시킨다. 누군가의 삶에 어쩔 수 없이 종속되어 있는 삶.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이 지긋한 삶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잘못 건드린 버튼 하나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삶.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담배연기 속에서 야심 차게 위조한 졸업 증명서 한 장이 영원불멸해 보이는 그 피폐한 삶을 삭제할 수 있었다면. 없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삶. 있어 보인다라는 말에 얽매여 있는 삶. 그리고 그것에 보란 듯이 속는 삶에 그 사슬은 녹슬지 않고 더 촘촘해진다.

언젠가 빅토리아 피크에서 바라 본 홍콩의 야경이 생각났다. 식민지 시절 영국 상류층이 주로 살았다는 온 홍콩이 내려다보이는 그 높은 산까지 오르는 말을 대신할 교통수단으로 설치됐다는 피크 트램. 그 트램을 타기 위한 티켓 오피스로부터 저 아래 내리막길까지 몇 시간에 걸쳐 연결되어 줄어들지 않던 줄. 그 멋진 야경을 가득 채운 높게 증축된 건물들과 그 건물 어딘가에 간신히 사람 한 명 누울 만큼의 작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마도 더 좌절스러운 것은 욕망하는 것 자체도 사치인 삶, 머리를 써서 기생할 가능성조차 갖지 못한 채 완전히 물에 가라앉아 버린 누군가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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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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