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최근작까지 거의 도달했지만 다시 이란의 21세기 초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사실 2001년 하면 크게 옛날도 아니고 심지어 추억 속의 '쉬리'나 '초록물고기' 같은 영화들보다 나중 영화인데 이즈음 어떤 이란 영화들의 첫인상은 80년대에 빌려보던 화질이 좋지 않은 강시 영화처럼 뭔가 해소되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것 같은 음울함으로 가득하다.
오히려 1968년작 <소> https://ashland11.com/559010는 는 비슷한 시기의 김기영 감독의 영화처럼 때론 보기 불편할 정도로 군더더기없이 사실적이고 말이 안 통해도 그 배우들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악수라도 할 것처럼 그 시대적 감성의 아귀가 적절히 들어맞는데 시간이 흘러 (보통 아이들이 출연하는) 이란의 80,90년대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50년대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의 느낌으로 되돌아가니 다시 시대불일치의 느낌을 받는다. 이란 혁명 이후 검열로 인해 배경도 줄거리도 많은 제약을 받아 비슷한 경향의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아스가르 파르하디를 비롯한 젊은 세대 감독들의 비교적 최근 영화를 보고 있으면 혁명의 여파와 전쟁을 어깨너머로 겪은 세대들의 좀 더 시대반항적이고 자유롭고 냉소적인 시선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그런 스타일에 사로잡혀 뒤늦게 이란 영화의 재미를 체감하는것 같다.

마지드 마지디의 영화 <Baran>의 분위기와 색감은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데뷔작 <Dancing in the dust>https://ashland.tistory.com/559036 와 많이 닮았다. 어쩌면 아스가르 파르하디가 자신의 데뷔작을 통해 바란을 오마주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사랑하는 레이하네와 이혼을 해야 했지만 정작 여자 본인도 크게 요구하지 않는 위자료를 마련하겠다는 책임감으로 사막에 가서 뱀에 물리는 나자르처럼 이 영화에도 사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청년이 나온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이란으로 넘어와 살아가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 적발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가니스탄 불법체류자들을 고용하는 엄격하지만 따뜻한 이란인 메마르 (Reza Naji), 그 밑에서 인부들의 식사와 차를 담당하지만 제대로 된 차 한 잔 끓여내지 못하며 틈만 나면 다투는 다혈질의 철부지 소년 라티프(Hossein Abedini)가 나온다.
안전장치라고는 전혀 없는 투박한 콘크리트 골조가 유령처럼 서있는 테헤란의 건설현장에 불법 체류자 단속이 뜨면 이들 모두는 갑자기 켜진 형광등 불빛을 피해 달아나는 불청객처럼 재빨리 몸을 감춘다. 늘 기관의 엄중한 경고를 받는 메마르는 월급을 다그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와중에도 끝까지 아프가니스탄인을 지키려 애쓴다. 보는 사람은 늘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메마르를 연기한 이란 아저씨 레자 나지가 나오는 마지드 마지디의 영화는 늘 그런대로 풋풋하게 끝나곤 했다. 그 영화들을 한편으론 '퉁명스러운 레자 나지의 달콤한 이면 트릴로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많은 이란 영화들이 그렇듯 도처에 놓여있는 힘든 삶을 이 감독도 애써 미화하진 않는다. 대신 불행을 예감하게 하는 많은 디테일들은 복선이 되는 대신 작은 안도감을 주는 장치로 쓰이고 페이지 중간중간 늘 햇살이 스며드는 동화처럼 인물들은 팍팍한 삶 사이사이 평화로운 웃음을 내비친다.
선의를 베풀면 정말 그것은 그에 걸맞는 대가를 가져다줄까. 정말 가슴 깊은 진심에서 우러나와 타인의 불행을 내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그런 대가조차 불필요한 걸까.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을 살리겠다는 간절하고도 무조건적인 의지는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마지드 마지디는 라티프와 메마르를 통해서 아마도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핵은 어쩌면 구원의 의지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든 사후세계에서든 구원이 이뤄지고 말고는 상관없으며 우리가 그 결과를 인식하냐 못하냐는 더더욱 중요하지 않다고.

아프가니스탄 남자가 건설현장에서 크게 다쳐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일하던 그의 친척은 어린 소년 바란(Zahra Barhami)을 데리고 메마르를 찾아온다. 다친 아빠를 대신해서라도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벽돌 한 장 제대로 나를 수 없을 것 같고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주눅 든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시멘트 자루를 둘러멘다. 결국 자루를 떨어뜨리고 더 이상 그 어린 소년에게 힘든 일을 시키기가 영 내키지 않았던 사려 깊은 메마르는 안 그래도 늘 덜렁거려서 거슬렀던 라티프의 일을 바란에게 넘긴다. 쉽다면 쉬웠던 부엌일을 빼앗기고 별안간 고된 건설 현장에 투입된 라티프는 바란에게 심술을 부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소년 바란은 라티프가 엉망진창으로 꾸려가던 궁색한 부엌살림을 그런대로 말끔하게 정리하고 정성스레 밥을 짓고 내가 본 거의 모든 이란 영화에서 이란인들에게 거의 영혼의 한 모금처럼 묘사되는 차도 정갈하게 끓여낸다. 모자와 스카프로 머리를 칭칭 감고 영화 시작부터 외마디 소리 한번 내지 않던 바란은 알고 보니 소년이 아닌 소녀였다.
사실 이 영화를 다시 되새기게된 계기는 '열여섯 살에 직물공장에서 직원 20명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다 여러 재벌댁의 가사 전담자로 일하며 인정받고 결국 김치 명인이 된' 한국 여성의 기사였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을 한국의 공장 한편에서 직원들의 밥을 챙기던 다부진 한국 소녀와 이란의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건설 인부들을 위한 따뜻한 차를 끓이는 아프가니스탄 불법이민자 소녀를 연결 짓는 그런 짓은 제발 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이 났다. 결국 김치 명인이 된 한국 여성처럼 바란도 지금 어딘가에서 그냥 잘 살고 있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이 아닌 소녀였던 아프가니스탄인때문에 보는 사람은 더 걱정이다. 내쫓기지 않을까, 남자밖에 없는 험한 건설 현장에서 나쁜 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연이 부엌에서 머리를 빗는 바란의 정체를 알게 된 라티프는 갑자기 돌변하여 온 마음을 다해 소녀를 보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란은 그런 라티프만을 위해 끓인 차 한잔과 각설탕 하나를 먼발치에 놔두고 말없이 돌아선다.
바란과 삼촌은 결국 적발되어 건설현장을 떠난다. 라티프는 메마르에게 거짓말을 해서 일 년 치 월급을 미리 받아 어렵게 찾아낸 바란의 가족에게 가져다주지만 정작 바란의 아버지는 그 돈이 더 필요한 친척에게 줘버린다. 친척은 언젠가 꼭 갚겠다는 쪽지를 라티프에게 남기고 사라진다. 라티프는 급기야 자신의 여권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다시 바란의 아버지에게 내민다. 그렇게까지 해야할까. 과연 저 정도의 무조건적인 헌신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을때, 어쩌면 테헤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라티프는 바란에게서 그 자신의 삶에선 너무나 아련한 꿈같은 가족과의 행복한 삶에 대한 희망을 본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는 날, 바란은 채소들을 바리바리 담은 주머니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함께 주워 담던 라티프와 바란은 진창 속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시선을 교환한다. 황급히 부르카를 쓰고 트럭을 향하는 바란의 신발이 진창에 빠진다. 라티프는 그 신발을 주워서 바란에게 신겨주고 바란은 떠나가는 트럭 위에서 작은 창처럼 짜인 부르카의 그물망 사이로 라티프를 응시한다.
바란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만난 할아버지 신발수선공은 말한다. 마음을 불태우는 불꽃은 떨어진 채 활활 타는 불길에서 피어난다고. 나는 혼자지만 결국 신의 이웃이라고. 바란을 떠내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라티프는 수선공이 자취를 감춘 빈자리를 마주친다. 진창에 남은 바란의 깊은 발자국 위로 비가 내린다. 바란은 페르시아어로 비라는 뜻이란다. 비는 앞으로도 항상 내릴 테지만 라티프는 아마 바란과 함께 맞았던 비와 할아버지의 말을 평생 기억할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결하겠다는 의지는 아닐 거다. 무수히 많은 빗방울 중 오직 내 어깨만을 적셨던 하나의 빗방울에 대한 씻어낼 수 없는 추억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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