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송의 <머티리얼리스트 Materialist>는 하염없이 올라가는 클로징 크레딧 뒤로 결혼 증명서를 받기 위해 들뜬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비추며 끝난다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다섯 번째 영화 <A Seperation>은 똑같은 앵글에서 이혼 엔딩을 보여준다. 이혼 후에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살 것인가 결정해야 하는 딸을 담당 직원 앞에 남겨두고 나온 부부가 반대편에 따로 떨어져 앉아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한 발자국 정도 차이를 두고 앉아 수만 가지 생각을 했을 그들 사이로 어쩌면 비슷한 이유로 그곳을 찾았을 사람들이 쉼 없이 지나가며 역시 크레딧이 올라간다.
같은 감독의 영화라고 해도 속았을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그 풍경의 내용은 사뭇 다르다. 부부 갈등이라는 소재만 놓고 보면 감독의 다른 영화 <Fireworks Wednesday> https://ashland.tistory.com/m/559039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A seperation>에서의 단절과 분리는 단순히 부부의 별거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자식과 부모의 단절, 계층간의 괴리, 국가와 인간의 단절, 계율과 양심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분리불가능한 이분법에 얽매여있는 사람들 사이의 단절 모두를 아우른다. 모든 관계에서 화합과 일치를 지향하지만 이상과 현실이 어떻게 부딪치는지 그리고 그 갈등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많은 작품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뤄왔지만 이 영화에는 감독이 자신의 역량을 전부 쏟아 넣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모든 당사자의 시선을 조목조목 포착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표면적인 이혼 사유는 딸의 앞날을 위해서 이 나라를 떠나야겠다는 아내 씨민(Lelia Hatami)과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놔두고 갈 수 없다는 남편 나데르(Payman Maadi)의 입장차이다. 결국 이혼사유로는 부적절하다는 답변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씨민은 시아버지가 살갑게 잡는 손을 힘들게 뿌리치고 결국 친정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싼다. 하지만 나데르는 딱히 씨민을 저지하지도 않는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체념한다. 그가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너무 당연하고 그것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결국 포기할 수 있는것은 국가도 아버지도 자식도 아닌 배우자, 결국 누군가가 이혼에 이르는 근본적인 원인을 단지 사람 사이의 감정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에 중점을 둔다.
씨민이 떠난 후 치매 아버지를 위해 간병인 라지에(Sareh Bayat)을 고용하면서 벌어지는 또 다른 사건 때문에 이혼 이슈는 뒷전으로 밀리는 듯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부부가 결국 다시 뭉쳐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부모 어느 한쪽을 지지하기도 비난하기도 어려운 딸의 입장이 정교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이 지루한 공방에서 법적 도움은 거의 무용하며 결국 그 엉성한 제도를 역으로 이용해야 살아남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과 종교적 양심일 뿐이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급히 고용됐을 간병인 라지에는 정확히 임신 4.5개월째. 갈 곳 없는 어린 딸까지 데리고 나데르의 집을 찾아온다. 길고 검은 차도르 때문에 라지에는 임신한 여자 같지 않지만 태동을 느끼자 환하게 웃으며 어린 딸을 부르는데 이 장면에서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임신한 상태에서 거동이 불편한 또 다른 사람을 육체적으로 돌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일용직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라지에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주지 않는다.
라지에는 소변실수를 한 나이 든 남자를 씻겨야 할 때조차 율법에 위배될까 망설이며 문의를 해야 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여성이다. 그런데 급히 외출할 일이 생기자 치매노인의 손목을 침대에 묶어두고 자리를 비운다. 그 사이에 나데르가 귀가하고 응급상태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라지에가 돌아온다. 나데르는 아픈 환자를 놔두고 집을 비운 라지에를 용납할 수 없고 급기야 증거도 없으면서 돈까지 훔쳤다며 라지에를 몰아세우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문 앞에서 강제로 떠밀려 넘어진 라지에는 그날 뱃속의 태아를 잃는다.
나데르는 자신의 행동이 라지에의 유산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쳤을까 병원을 찾아가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긴다. 법적으로 4개월이 지난 뱃속의 태아는 이란에선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나데르의 행동이 살인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판명될 경우 그는 자연스레 살인자가 된다. 나데르는 자신에게 고의가 없었음을 증명해야 하니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거짓말을 하고 라지에는 나데르가 밀었기 때문에 아이를 잃었음을 어떻게든 증명해야 한다.
참고인으로 불러오는 딸의 가정교사, 라지에가 떠밀리는 순간을 계단에서 목도했던 이웃들, 나데르의 딸과 라지에의 남편 모두 그날의 행동과 말들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내뱉는 말들, 가난한 피해자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온정주의, 지키기에 급급한 기득권층의 뻔한 위선들이 뒤엉키는 와중에 늙은 아비를 돌봐야 하고 딸마저 잃을 수 없는 나데르는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나데르를 연기한 배우 페이만 마디는 전작 <About Elly> https://ashland.tistory.com/m/559041 에서 바다에 빠진 아들을 구하느라 죽음 직전의 공포까지 간 아버지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그러니 나데르의 표정은 또다시 자식을 잃을 수 없다는 듯 결연하게 전달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목격자들의 객관적인 진술마저도 양측의 입장에서 유리한대로 해석되고 선량한 사람들이 나름 신변을 생각해서 내뱉는 사소한 거짓말들은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 증언을 하는 참고인들은 라지에의 남편을 제외하고는 전부 나데르의 주변인물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증언에 따라 양측의 입장이 바뀌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는데 거기서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데 망설이는 이유는 이 사건 자체가 남자의 고의를 증명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가해자의 사고방식에 좀 더 의존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라지에가 뱃속의 태아를 잃은 것은 큰 슬픔이지만 그러한 과실치사로 건실한 가장이 살인죄를 얻고 감옥에 가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보는 것이다.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영화를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합당한 법률 절차를 밟지 못하고 그저 당사자와 목격자들의 진실여부가 불분명한 증언만을 토대로 법적 공방이 진행된다.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개인의 재량과 용서와 합의가 사건 해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사건이 벌어지면 바로 경찰서를 찾아가면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답답하게 당사자들이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자주 보이는데 신앙심을 토대로 당사자들이 양심과 운명에 기대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렸다는 사실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국가의 법체계에 대한 신뢰가 낮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같다.
이란에서는 고의적인 살인조차도 가해자가 돈을 지불함으로써 합의가 가능하고 그런 용서를 복수보다 고귀한 덕목으로 친다고 한다. 하지만 전혀 살인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돈으로 합의하고 끝내자는 주위의 회유는 결백을 주장하는 나데르에게 죄를 인정하는 셈이 되니 나데르는 지켜야 할 명예와 가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라지에는 우울증때문에 제대로 일도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남편 때문에 임신한 몸을 이끌고 일용직 간병인으로 나서니 이런 상황은 나데르의 입장에서는 돈을 얻어내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의도로 읽힌다.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나데르에게만 유리한 진술들이 적정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서로의 명예 유지를 위해서 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자신은 고의가 없었음을 증명하면서도 상대는 불순한 의도를 가졌을 거라 계속 추정하게 되는 것은 그러니 그들 사이의 뿌리 깊은 계급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결국 합의하기로 결정한 날, 부부는 라지에의 집을 찾아가고 나데르는 라지에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나 때문에 유산된 게 맞으면 신 앞에서 맹세하고 서명하자고. 하지만 라지에는 쉽사리 서명하지 못한다. 그녀는 유산의 직접적인 원인은 나데르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지에는 내가 임신한 것을 모르고 나를 밀었다고 신 앞에서 맹세할 수 있냐고 나데르에게 되묻지는 못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물었다면 나데르는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에게 종교의 영향력은 라지에 만큼 크지 않고 현실이 양심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적절한 교육도 받지 못했을 가난한 라지에는 자신의 운명을 신의 권한에 맡기고 현실적인 계산보다는 종교적 양심에 좀 더 얽매여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결국 신과 관련된 그런 질문을 아내인 씨민이 아닌 나데르가 던졌다는 것에서 나데르 자신이 씨민보다는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일 거라 예상하게 한다.
씨민이 계속 딸의 미래를 위한다며 나라를 떠난다고 하자 이혼 담당 직원은 그럼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아이들은 미래가 없냐고 되묻는다. 그것은 제법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일일테지만 그 사회에 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정작 국가를 등지게 만드는 상황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지 되묻는다.
영화 전반에 나데르로 대표되는 중산층과 라지에라는 하층민 사이의 계급 차이가 깔려있지만 교사로 일하는 씨민의 부유해 보이는 친정은 그녀의 이혼 결심에 크나큰 버팀목이 되며 아마 남편의 합의금 조달에도 친정의 도움이 한몫했을 거다. 남편은 이민을 원하지 않아서 이혼을 결심한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상 이들의 선천적 배경이나 경제관념도 다른것 같다. 가정을 이룬 이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출신 계급은 달랐을지 모른다. 각자 은행원과 영어 교사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고 테헤란의 널찍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나데르가 쉽사리 합의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그 액수가 월급쟁이인 그 자신이 온전히 부담하기엔 큰 액수였기 때문이고 씨민이 이민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남편이 아닌 다른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딸에게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차이를 강조하며 틀린 단어를 교정하는 나데르의 모습도 그렇다.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은 가정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이다. 나데르는 처가의 습관적인 도움이 싫고 결혼생활 내내 지속됐을 그런 불균형이 결국 부부관계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힘들게 얻은 미국 비자의 기한 완료를 눈앞에 두고 이혼을 서두르려는 씨민을 보면 서양의 제재로 더 살기 힘들어졌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사회를 등지고 떠나고 싶은 곳이 결국 그런 서방국가라는 것, 정작 그런 선진국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문제 국가들에 차별을 가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내가 딸 테르메였다면 아빠 나데르를 선택했을 것 같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집을 나서는 부모의 뒷모습을 본 경험은 자식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딸 역의 테르메를 연기한 사리나 파르하디(Sarina Farhadi)는 실제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딸이다. 이 배우는 10년 후 감독의 가장 최근작 <Hero>에서 아빠와 함께 인쇄소를 운영하는 딸로 다시 등장하면서 곤경에 빠진 외로운 아빠의 유일한 조력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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