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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n 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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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25_ Kopa 사구 사구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람과 모래. 우거지면 우거질수록 결국 그 본연의 사구 자체는 사라지는 중이라는 것이 그저 아이러니하다. 모래 사와 죽을 사 사이의 언덕 어디쯤으로 새벽 5시에 일출을 보러 간다. 캄캄한 찻길에서 여우를 만났는데 라군이 내려다보이는 모래 더미 위에도 여우의 발자국이 지나갔다. 동일한 여우였다면 참 부지런한 여우다. 숙소에서 사구까지 거의 20킬로미터 거리였으니깐. 전 날 저녁 해지는 것을 보고 새벽이 되어서야 도시로 돌아오는 중이었다면 정녕 여우는 기다림의 대명사이다. 물론 여우가 절대 그랬을리는 없겠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해 뜨는 것을 본 게 아마도 20년 전의 시나이 산 같다. 홍해 바다와 태양의 색감은 기억나지 않지만 떠오른 후부터 시나이 산 바위 여기저기에 묻어나며 자리를 ..
리투아니아어 124_Valerijonas 쥐오줌풀 얼마 전에 십자가 언덕이 있는 리투아니아의 북부도시 샤울레이에 갔었다. 50년이 넘은 약국을 겸하고 있는 식당에 들렀는데 가게이름에서부터 포스가 느껴졌다. 발레리요나스 Valerijonas. 수많은 약초 중에 발레리요나스가 굳이 가게 이름이 된 이유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타임이나 카렌듈라, 캐모마일 같은 흔한 아이들은 당당하게 '약초 찻집 Vaistažolių arbatinė'을 지향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겠단 생각은 들었다. 발레리요나스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허브차들에 비해선 그 성격과 효능이 아주 확실한 약초이고 그런 약초들 틈에선 또 비교적 대중적이다. 약국에 가면 발레리요나스가 들어간 약품들을 쉽게 살 수 있다. 5년 전 환으로된 발레리요나스를 병원에서 딱 한번 먹은 적이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무거..
리투아니아어 123_Konteineris 컨테이너 찾는 책이 동네 도서관에 없어서 오랜만에 국립 도서관을 향하는 길. 버스 정류장 뒤로 헤드셋을 낀 여인이 온갖 전자기기에 둘러싸여 나른하게 앉아있다. Neieškok kampo, ieškok spec.konteinerio! 구석을 찾지 말고 전용 컨테이너를 찾아! 컨테이너 Konteineris는 리투아니아에서도 여러 용도로 쓰이는 단어이지만 대개 일차적으로 쓰레기 컨테이너를 떠올린다. 전자 폐기물을 애꿎은 곳에 버리려고 애쓰지 말고 전용 컨테이너를 찾아서 버리라는 내용의 벽화인데 그런 전용 컨테이너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이 벽화는 이미 제 역할을 다했다. 알고 보니 이 헤드셋 여인의 원형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Portrait of Madame Récamier이라는 그림 속의 여..
리투아니아어 122_6월 Birželis 재밌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마크 러팔로 - 지금 뭐가 지나간 거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6월 6월 1일이면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여름의 시작을 축복한다. 일제히 방학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휴가를 준비하고 떠들썩한 하지 축제가 지나고 나면 폭주하던 6월이 끝이 나는데 7월에도 8월에도 여름은 지속되겠지만 여름의 시작과 절정 그리고 그 종료의 이미지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달은 6월이다. 시작과 동시에 끝이났다기 보다는 시작이 마무리된 느낌이랄까.
리투아니아어 121_속옷 Apatinis trikotažas 6년 전 우주피스의 아트 인큐베이터 구역에 있었던 전시물인데 지금도 있는진 모르겠다. 컴퓨터가 무거워져서 불필요한 사진들을 추려내고 있는데 없어진 것 아니면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라 균형잡기가 몹시 애매하다.
리투아니아어 120_ 장화 Botai 여전히 기온이 변덕스럽긴 하지만 한겨울옷은 벗을 수 있는 날씨가 되었다. 겨울 부츠들을 깊숙이 집어넣으면서 봄가을 장화들을 앞으로 꺼냈다. 그네 아래에 파헤쳐진 물 웅덩이도 포석들이 사라져 군데군데 물이 고인 거리에서도 천방지축으로 놀도록 놔두려면 확실히 장화들이 좋다. 겨울엔 아직 라디에이터가 작동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음날이면 마르지만 난방시즌이 끝나면 젖은 운동화를 말릴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일정연령까지 아이들의 신발치수는 매해 달라지지만 철저히 계절용품이라 몇 번만 신을 뿐인 장화는 매번 새것을 사기가 애매하다. 그걸 잘 아는 사람들은 장화를 서로서로 물려준다. 그러니 집에는 과거와 미래의 장화들이 뒤섞인다. 이미 작아진 것부터 줄을 세우고 나니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여행가방 중의 기가막힌 문단이..
리투아니아어 119_당절임과일 Cukatos 이 색감은 가히 팬톤의 올해의 색상 담당 부서직원들이 철야를 해도 구현해 낼 수 없을 영롱함과 말끔함이다. 초록 자몽을 좋아하는데 아쉽게도 잘 안 판다. 껍질 두께도 적당하고 포멜로와 주홍 자몽의 바람직함만 딱 섞어놓은 맛이다. 오랜만에 눈에 띄어 설탕에 절이려고 비슷한 놈들을 하나씩 전부 들고 왔던 어떤 겨울날. 여러색을 섞으면 훨씬 예쁘고 맛있다. 설탕물에 끓여서 굳힌 과일 껍질이나 과육들을 가리켜 리투아니아에서는 쭈카토스(Cukatos)라고 부른다. 절인 귤류의 껍질이면 간혹 캔디드 필 Cukuruotos žievelės라고도 쓰지만 쭈카토스라고 하면 대체로 통한다. 특히 겨울이 되면 su cukatomis라는 설명이 붙은 빵들이 많이 나온다. su는 '~와 함께', '~ 을 포함한'에 쓰이는 5 ..
리투아니아어 118_비율과 관계 Santykis 마들렌의 핵심은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들어간다는 것. 적어도 내가 가진 레시피에서는 그렇다. 물론 반죽에 이것저것 추가하고 위에 부어서 바르고 뿌리고 한다면 그런 단순한 공식은 성립되지 않겠지만 그저 수더분한 마들렌을 원한다면 모든 재료의 양은 1이란 숫자로 통일된다. 홍두깨 선생님이 하니한테 지어주던 흰 밥도 쌀과 물의 비율은 아마 1이었을 거다. 리투아니아어 단어 Santykis는 비율의 뜻도 있지만 재밌게도 '관계'의 의미도 가진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노사관계 등등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관계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이상이라면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이 모든 재료들이 동등한 비율로 합쳐져서 달콤한 마들렌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며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는 좀 벅차오르는 지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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