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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n 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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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어 111_숫자 Skaičius 이제는 이 동네식으로 숫자 쓰기에 익숙해져서 우체국에서 한국 주소나 전화번호를 적어야 할 때라든가 가장 최근만 해도 대사관에서 주민번호 하나를 적는 데에도 약간의 내적갈등이 일어난다. 오래전에 한국에서 내가 쓰던 식으로 적자니 이제는 내 손에 익지 않아 어색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숫자를 적는 것만 같고 여기서 쓰던 대로 적자니 왠지 어떤 숫자는 오해의 여지를 남긴 채 잘못 읽힐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모든 숫자가 골고루 전부 포함되어 있는 페이지를 보니 숫자 하나하나가 또렷하여 크게 헷갈리거나 딱히 애매해 보이는 숫자는 없다. 주로 문제가 되던 숫자 세 개를 조합하고 보니 반갑게도 외대 앞 정류장에서 수없이 지나쳐 보낸 147번 파란색 버스가 생각난다.
리투아니아어 110_퍼즐 Delionė 1000피스짜리 중고 퍼즐 한 상자. 상자 속의 퍼즐 봉지가 뜯지 않은 상태였고 그림들이 재밌어서 다같이 하려고 샀다. 레스토랑의 번잡한 주방이 배경이라 서빙하다 넘어지는 웨이터들과 술 취한 셰프들, 애벌레 나오는 요리들 등등 비교적 분명하고 개성 있는 삽화여서 복잡한 퍼즐은 아니다. 어떤 퍼즐이든 그 완성에는 다소의 인내심이 요구되겠지만 그건 맞추기 힘든 조각을 집념을 갖고 찾아내는데 쓰이는 인내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성되지 않은 퍼즐을 오래도록 그냥 펼쳐두고도 관조할 수 있는 체념의 인내심 같기도 하다. 눈에 띄는 조각이 보이면 설득력 있는 좌표에다가 놔두고 그냥 지나가거나 오며 가며 한 두 조각씩 맞추는 식이라면 편하고 가볍다. 퍼즐을 잘 맞추는 사람들은 확실히 눈썰미가 좋으니 그냥 전체 그림만 몇..
리투아니아어 109_Rytas 아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중충하고 나쁜 날씨가 결국은 가장 좋다. 눈보라가 치거나 오래된 나무가 꺾일 만큼 험악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좀 어둡고 축축하고 춥고 더 나빠지지도 그렇다고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날씨에 왠지 마음이 기운다. 모범적이고 우등한 날씨들이 모두 하교한 후 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는 중인 듯한 그런 느낌의 날씨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런 날씨에 휩싸여있을 때면 정말 찬란하고 따스하고 너무 분명해서 똑 부러졌던 날을 몸이 먼저 기억해 낸다. 그 순간엔 과거의 날씨도 현재의 날씨도 동등해진다. 어떤 것들은 온몸이 기억한다.
리투아니아어 108_개구기 Lūpų plėtiklis. 우리 집 패밀리 닥터가 있는 폴리클리니카의 수많은 진료실 창밖으로는 대략 이런 흐릿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간호사가 전화기 너머의 퇴직자 할머니에게 그 약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껏 호통칠 때, 진료 예약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진료 가능한 날짜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겨우 찾아낸 미지의 날짜가 보란 듯이 나의 스케줄과 맞지 않아 간호사가 한숨 쉬며 다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할 때, 의사가 나의 피검사 결과를 출력하고자 노력하지만 때마침 말을 듣지 않는 프린터기를 공개적으로 의아해할 때,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저당 잡는 가운데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의 오래된 지붕에 집중할 수 있는 소품 같은 순간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건물이 여러모로 병원 기능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집 근처로 내년 즈음에..
리투아니아어 107_캐슈넛 Anakardžių riešutai 여름에 바다에서 주운 돌이 너무 캐슈넛처럼 생겨서 찍어놓았었다. 색상도 실제론 흡사하다. 이것은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을 혼쭐 내기 좋은 욕망의 돌로써 먹어도 모르겠지 하고 손대는 순간 이를 크게 다칠 수 있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았다. 리에슈타이 Riešutai는 넛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캐슈넛을 보통 '아나카르지우'라고 하는데 리투아니아 생활 초기엔 헷갈려서 '아나르카지우'라고 읽곤 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혹시 검(Kardas)과 생김새가 비슷해서 중간에 저런 단어가 들어갔나 연결 짓다 보니 결국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는데 캐슈나무의 학명이 Anakardium이고 kardium은 심장을 뜻한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어 106_아코디언 Armonika 아르모니카. 얼핏 보면 하모니카를 뜻하는 이 단어는 사실은 아코디언이다. Ar와 Monika 가 합쳐지면 모니카야?라는 뜻이 되니 얼핏 모니카라는 여자에 대한 어떤 물음처럼도 들린다. 지난여름 동네 고목의 갈라진 틈 사이에 끼워져 있던 아코디언을 갈구하는 사람이 남긴 쪽지인데 지금쯤 구해서 연주하고 있으려나. 아슬아슬 떨어지려는 찰나여서 틈 속으로 잘 넣어 주었다.
리투아니아어 105_노랑 Geltona 올여름 바닷가에서 발견한 자잘한 호박들과 지난여름에 주워서 말린 꾀꼬리버섯. 발트의 호박이 만들어낸 우연의 실루엣이 흡사 페루에서 칠레로 이어지는 해안선 같다. 어쩌면 여름을 맞이한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해변에서 그리고 숲에서 코를 박고 찾는 이것들이 리투아니아의 대표적 노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는다는 표현이 심히 전투적이고 상업적으로 들릴만큼 그 발견의 과정들은 차라리 여름 낮잠의 잠꼬대만큼이나 우연적이고 정적이다. 한여름에 꾀꼬리버섯을 말릴 때엔 이들이 자취를 감출 겨울이 되면 먹겠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시지만 그 타고난 철이 여름인지라 결국 여름이 되어 커스터드 빛깔의 신선한 버섯을 본 뒤에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말린 버섯은 또 유예되고 여름은 겨울로 수렴되지 못하고 돌고 돈다.
리투아니아어 104_그네 Sūpynės 소나무 숲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소련 그네. 2년 전과 변함없이 남아 있어서 반가웠다. 절대 그네 줄 돌려서 빌빌 꽈서 풀고 할 수 없는 참으로 경직되고 올곶은 그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고 한다면 사람 없는 깜깜한 숲에서 앞뒤로 움직이다가 서서히 멈춰서는 그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