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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n Language

리투아니아어 114_어드벤트 리스 Advento vainikas

 
 

 
부활절즈음해서 초콜릿 토끼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11월 중순이 되면 어드벤트 달력들과 파네토네가 담긴 둥글고 큰 틴 케이스들로 이미 리투아니아의 마트도 점령당한다. 보통은 대목을 맞이한 초콜릿 회사들이 내놓는 초콜릿 달력들이 주를 이루고 마트의 또 다른 한쪽은 붉고 푸른 성탄 장식들로 화려해진다. 꽁꽁 얼기 시작한 어두운 거리 곳곳은 크리스마스 조명들로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



리투아니아의 크리스마스 공식 휴일은 24,25,26일  3일이지만 크리스마스이브부터 1월 첫째 주까지 2주간 겨울 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12월은 크리스마스 연휴와 겨울 방학 전의 싱숭생숭한 분위기로 상당히 빠르게 정신없이 지나간다. 12월 1일,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드벤트 달력을 열기 시작하는 그날, 유치원에서 어드벤트 리스 만들기 수업이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14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카톨릭을 받아 들였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을 종교적 전통을 지켜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빗대기엔 너무 경박하고 야멸찰지 모르지만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카톨릭을 받아들인 나라치고는 의외로  종교적 관습이 리투아니아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마스마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바티칸의 성탄 미사처럼 다소 요란하게 거룩한 형태라기보다는 예수의 탄생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서 유치원의 창턱 한쪽에 마련된 작은 마구간처럼 소박하고 동화적이다. 리스 만들기는 평소에 궁금했던 부분이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갔다. 교실에 들어서니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주웠을 푸르른 나뭇가지들이 테이블 한가득 놓여있었다. 
 
 

원하는 크기로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어드벤트 리스 Advento vainikas 를 비롯하여 둥근 형태의 화환을 모두 Vainikas라고 부른다.  대림절을 뜻하는 어드벤트는 크리스마스가 시작될 때까지 4주간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기간이다.  빠르게는 11월 말부터 4번의 일요일을 지나보내면 크리스마스가 된다. 어드벤트는 기다림의 대명사이다.   아주 초창기에는 잎장식 없이 그냥 나무 바퀴의 형태였다고 한다. 나뭇가지를 둥글게 엮어서 상록수의 잎사귀들로 촘촘히 감싸는 화환은 생명의 순환, 영원을 상징한다.
 

의외로 유연하게 잘 구부러져서 아무런 장치없이 서로 잘 엮이는 나무가지들.

 
세상의 어떤 전통과 풍습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탈한 장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잣대에 의한 삶의 여유로움과는 상관없이 각자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어느 평범한 하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귀여운 노력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행위들에 더 많은 의미와 규칙들이 추가되고 건강하고 단단한 근육뿐 아니라 불필요한 비계살도 함께 붙으면서 상업적으로 이용되어 변질되기도 하고 지배와 통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겠지만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와는 상관없이 어떤 형태로 전통을 기리느냐와도 상관없이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그 아름다운 가치와 본질을 되새긴다는 자체로 의미 있다. 
 

원하는 나뭇잎들을 틀에 잘 고정시킨다,

 
사실 화환을 만들고 사용하는 풍습이야 정말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거다. 월계관 그런 것들, 영원을 상징하니 장례식에도 사용되었다고 하고 수메르인조차 화환을 만들어 쓰고 다녔을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기간에 종교적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루터교에서부터였고 어드벤트 풍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19세기 독일의 함부르크이다.  버려진 아이들을 보살폈던 함부르크의 어느 교회 목사가 아이들이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시기를 좀 더 따뜻하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크리스마스까지 매일매일 하나의 초를 켜도록 한 것이 그 시작이고  24개의 초를 전부 엮어서 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현재의 4개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어릴 때 양양 큰집에 가면 소나무가 많으니 추석이면 정말 소나무 잎을 가득 넣고 찐 송편을 먹을 수 있었는데 함부르크도 큰 항구도시이니 거기도 아마 소나무가 많지 않았을까. 넘쳐나는 단호박이 어떤 축제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남아 나는 상록수의 잎사귀들을 주체할 수 없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이 화환들을 엮기 시작한 건 아닐까 혼자 상상해 본다. 
 

소나무(pušys), 향나무(Kadagys) 가문비나무(Eglė) 측백나무(Tuja) 등의 잎사귀들로 빈틈을 채운다.


좀 더 촘촘하게 채우거나 긴 가지들은 줄여가면서 더 둥근형태로 만들고 싶었지만 손이 느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우선은 나무틀을 감추는데 집중했다. 
 

화환에 얹을 장식물들

 
현관이나 벽에 걸어놓는 리스와는 또 다르게 어드벤트 리스를 편평한 곳에 놔두고 그 안에 4개의 초를 세워두는 풍습도 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될 때까지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어두워지지만 일요일마다 초 하나씩을 켜고 총 4번의 일요일이 지나는 동안 세상은 점점 밝아지고 비로소 모든 초에 불이 들어오면 세상을 밝히는 예수의 탄생일이 된다.  때에 따라서 예수를 상징하는 다섯 번째 하얀 초를 켜는 경우도 있단다.

 
 
얼추 다 엮은 후에 장식할 것들을 고르러 다른 교실로 갔다. 소라 껍데기부터 속이 빈 호두 껍질 하나하나에 정성스레 묶여있는 구리선들, 오렌지 껍질을 잘라서 만든 별과 말린 사과 껍질을 돌려 만든 꽃봉오리들,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른 식물들과 솔방울 들과 잎사귀까지.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서 손질해서 빈 상자들을 채우는 과정 자체가 아름답다. 모든 것은 숲으로부터 나온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숲과 나무를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들이 가진 가장 큰 유산으로 생각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우선 하나씩 전부 가져왔다. 사과 껍질로 만들어진 꽃은 이미 락카칠이 돼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향기가 났고 짓궂은 아이들은 입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장식물 하나하나에 제자리를 찾아주는데 유치원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 화환들을 팔에 걸어 집으로 전부 가져온다. 
 

 
세 개의 화환 중 두 개는 발코니에 설치해 놓은 새집 근처에 그냥 걸어놓았다. 

 
오래 놔둬도 금세 변하거나 썩는 것들이 아니어서 보는 그 자체로 예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 것은 겨울이란 생각이 들었다. 
 

빌니우스의 성 베드로 바울 성당의 어드벤트 리스.

 
12월이 되면 구시가의 성당들 제단에도 어드벤트 리스가 놓이고 그 가운데에는 4개의 초가 세워진다. 양초는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이다. 초들 중 세 개는 보라색이고 나머지 하나는 분홍색이다. 사실 분홍색 초는 마치 보라색초가 모자라서 황급히 놓인 것처럼 뭔가 좀 뜬금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들에게 부여된 의미가 있다 . 어릴 때 집집마다 있던 촛농이 흘러내리는 형태의 정말 요란했던 색깔의 양초도 생각이 났다. 그 초들은 하얗고 길쭉한 초들에 비해 나름 듬직하고 무게감이 있었는데 리스 가운데에 놓으면 퍽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렇다고 마트에서 어드벤트용 초를 따로 팔거나 하진 않는다.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저런 초들은 설마 바티칸에서 규정한 특정 높이와 굵기로 제작되는 그런 엄격한 양초일까. 상복을 1년 입을지 3년 입을지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던 시대처럼 마음만 먹으면 저런 초의 높이를 결정하는 문제가 어리석은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첫 번째 일요일에 켜는 보라색 초는 희망, 두 번째 일요일의 보라색은 평화, 세 번째 일요일에는 분홍색 초를 켜는데 그것은 기쁨을 상징하고 크리스마스 전 마지막 일요일에 켜는 마지막 남은 보라색은 사랑을 상징한다. 
 

 
 
어쨌든 좋은 기회로 어드벤트 리스를 만들게 되어서 수업에서 전해 들은 대로 성당에서 본 그대로 주어진 조건에서 우리만의 리스를 완성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를 일부러 살 것까진 아니고 집에 있는 몽당 크레파스로 하얀 양초에 색을 덧입혀보기로 한다. 운 좋게 보라색과 분홍색 크레파스가 있었고 서랍에 작은 초도 마침 5개가 있다. 어릴 때 크레파스를 녹여서 종이컵에 층층이 부어서 무지개 양초를 만들었던 것도 떠오른다.  

 
크레파스와 양초를 섞어서 녹인다. 결코 좋지 않은 화학 약품 냄새를 폴폴 풍기며 참회와 기도를 상징한다는 보라색이 하염없이 녹아내린다. 저것이 이제 희망과 평화와 사랑을 뜻하는 불멸의 보라색이 된다는 소리다. 뒤집어진 양송이버섯에 고인 국물을 비워내듯 펜치로 잘 잡고 양초 위에 붓는다.  

 
 원래도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초인데 녹인 크레파스를 붓는 바람에 심지가 짧아져서 잘 켜질지 모르겠다. 
 

 
일주일 동안 벽에 걸어두었던 어드벤트 리스가 그사이 조금 푸석해지고 홀쭉해졌다. 창턱에 올려놓고 가운데에 급조한 초 네 개를 놓았다.  지난여름에 덤벨추로 부숴먹은 코코넛, 언젠가 공원에서 주워 온 솔방울, 작년 여름에 친구네 시골집에서 가져온 양귀비 씨앗 주머니는 흔들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낸다. 작년 가을  자전거 여행에서 데리고 온 낯선 도시의 도토리 5개도 여전히 살아남았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이웃님이 가져다준 마로니에 몇 톨, 유치원에서 생일 선물로 받아 온 펠트 곰 두 마리까지 각기 다른 공간에 존재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집에 모인 이들을 전부 한 자리에 놓고 보니 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들 모두는 서로 상관없는 개별적인 사건에 불과했지만 나의 지나간 시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결국 한 줌의 순간임이 묘하게 느껴졌다. 수분도 색채도 다 빠져나가서 조금만 움켜줘도 힘없이 부서질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변한 상태 그대로 애쓰지 않고 존재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평온함과 여유가 느껴진다. 
 

 
이 사진에 교황님을 태그 하여 바티칸 공식 트위터에 올려야 한다고 농담했다. 선량한 어린양이 어드벤트 리스 초를 켜기 위해 거의 손을 태울뻔하다니 그럼에도 결코 불이 붙지 않는 대단원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 나올법한 시퀀스라고. 작은 불길이 크레파스를 끊임없이 삼키면서 하염없이 고꾸라진다. 
 

 
결국 이 웃픈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동원한 것은 크레파스를 녹이는데 쓰고 남은 초의 알루미늄 케이스에 덩그러니 남았던 심지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무런 콤플렉스 없이 가장 밝게 빛나주었다. 

 
분홍색초를 세 번째 켠다는 것을 알기 전이어서 혼자서 짱짱하게 살아남은 어떤 세 번째 일요일의 어드벤트 리스.
 

 
어드벤트 리스는 걸어놓기보다는 이브 때까지 탁자에 올려두고 초를 켜는 것이 정석이지만 사실상 집에 그렇게 조신하게 리스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냥 내가 자주 머무르는 부엌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았다. 
 

 
눈이 전부 녹기 시작하고 짓눈깨비까지 내려 질척거리던 어느날 들어갔던 좁고 고요한 정교 성당. 늘 좀 더 마음에 와닿는것은 지워낼 수 없는 성당냄새와 손에 겨우 잡히는 작은 기념품들을 정리하고 있던 교회지기, 이콘을 배경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가느다란 밀랍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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