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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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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히든트랙 바리스타가 본격적으로 커피를 내리기 전 커피잔을 세팅하기 시작하면 나는 나대로 옆으로 비켜나 투명잔에 물을 담는다. 카페인으로 연결된 우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풍경의 전형...ㅋ 마지막 트랙이 끝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씨디 플레이어속의 디스크를 마주하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갑자기 솟구칠지 모르는 숨겨진 사운드를 가늠하며 볼륨키를 확인하곤 했다. 빈 커피잔 옆의 반쯤 채워진 물 잔이 남기는 여지만큼 황홀한 것이 있을까. 다 마신 커피는 언제든 카페를 떠나도 되는 이유가 되지만 언제나 조금 더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물 잔이다. 기대할 것이 많지 않았던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 더 매달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히든트랙이 된다.
공연 전의 커피 산타 모자를 쓴 아저씨가 극장문을 열고 나와 배우가 몸이 안 좋아서 연극이 취소됐다고 미안해했다. 세상에 많은 공연이 있다. 감동적인 공연, 형편없는 공연, 두 번째 보는 공연,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공연,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공연, 절대 봐선 안된다고 말리고 싶은 공연, 그리고 취소된 공연. 이들 중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장담할 수 있는 공연은 어쩌면 오직 '취소된 공연'이 아닐까. 공연은 이렇게도 시작되고 저렇게도 끝나지만 취소된 공연은 사정이 생겨 시작되지 못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작과 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소름 끼치도록 일치해서 철저하게 공중분해된 느낌이다. 그리고 관객 모두는 극장 문 앞에서 그 파편들을 한 아름씩 나눠 안고 발길을 돌린다. 어떤 포지션에서든 공연이란 놈은 역시..
비 맞는 중의 에스프레소 아주 애지중지 마셔야 겨우 두세 모금 나오는 에스프레소를 테이크아웃하는 때란 사실 드물다. 뚜껑을 덮는 것은 거의 치명적으로 불가능하다. 에스프레소용 컵에 맞는 뚜껑을 가져다 놓는 카페를 아직까진 본 적이 없다. 있다고 해도 그 뚜껑을 누가 닫겠는가. 안에서 마시면 될 일이다. 오늘 아침부터 일하기 시작한 초보 바리스타에게 아주 결연하게 '어제도 내가 분명히 닫았다'며 에스프레소 뚜껑을 달라고 버티면 그게 원래부터 없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물품 창고를 다 뒤엎고 나서 매니저에게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 뭔가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우린 늘 집요하게 왜 나한텐 없는지 묻곤 하니깐. 에스프레소잔 뚜껑을 닫겠다는 불필요함은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신발과 미니 신발주걱을 세..
리가의 어느 카페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음에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아늑하게 느껴진다면 으레 짐작할 수 있는 도시의 일조량이 있다. 햇살을 지워낸 회색 하늘 속에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겨진 달력의 흔적이 있다. 열린 채로 흔들거리지 않는 창문 곁에는 바람이 잠시 고여있다. 테이블 위의 빗방울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그곳엔 그친 비의 마지막 움직임이 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앉을 곳을 찾고 있다면 이제 곧 피어오를 연기가 있다. 물기를 닦아낸 벤치를 발견했다면 그곳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불건전한 취미를 비벼 끄고 카페를 향했거나 카페와 작별 했을 사람. 리가에서 두번 갔던 이 카페에서는 두 장소가 떠올랐다. 지금은 없어진 동네 티룸과 다르질링에서 들렀던 후덥지근했던 2월의 여행자 카페. 전자인 빌니우스의 ..
노란 정거장 카페에서 자주 가는 카페의 좋아하는 자리. 딱히 아늑하지 않은지 거의 항상 비어있다. 우유 거품 가득 올라간 커피잔을 들고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는 사람들, 반쯤 시작된 수다와 함께 카페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 따뜻하게 포옹한 채로 주문 차례를 기다리는 연인들, 빈자리를 못 찾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모든 주문을 처리하고 숨을 돌리는 바리스타까지. 그 모두로부터의 각기 다른 호흡과 생명력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자리이다. 한 달에 두어 번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고 이곳에서 시작을 읽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반쯤은 고정된 일상이 있다. 이제는 짧은 시간에 작은 커피와 고밀도의 휴식을 취한 후 가볍게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푹 늘어지고 싶은 구석진 곳의 포근한 자리보단 이런 자리가 편하..
카페에서 5분. 이 카페는 정말 날씨가 지나치리만치 좋을 때 킥보드를 타고서 1년에 한 번 정도 간다. 자주 가지 않는 카페는 결코 아니다. 날씨가 그냥 자주 안 좋을 뿐. 대성당부터 베드로 성당 뒤쪽으로 이어지는 안타칼니스( antakalnis) 동네까지 네리스 강변을 따라 별다른 장애물 없이 쭉 타고 올라갈 때의 뻥 뚫리는 기분. 출퇴근 차량과 트롤리버스는 한결같은 매연을 내뿜고 있겠지만 곳곳의 과묵한 녹음들이 피톤치드를 분사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동한다기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는 마음으로 혼자 몰래 불량식품 먹으러 간다는 생각으로 간다. 인터넷에서 중고책을 샀는데 만나서 전해주겠다는 장소가 바로 이 근처여서 오랜만에 이 카페에 들를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11월인데 벌써 너무 춥다. 4시에 만나기로 했는..
2023년 10월 마지막 월요일 10월 마지막 일요일 서머타임의 종료는 아주 깊고 쫀득쫀득한 밤으로 가는 두 달 여정의 시작이다. 그 뒤로 모든 성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한 차분한 애도의 날들이 이어지고 늦춰진 한 시간으로 인해 2주일 정도 도시는 빛의 풍년을 맞는다. 이른 월요일 아침에 잠시 앉아 가는 카페. 멀리로는 보슬비 사이로 여전히 솟구치는 바닥 분수가 보이고 늘 앉는 자리 너머로는 꽃다발을 든 남자가 지나간다. 세상의 라디에이터들이 늘 따뜻했던 손처럼 가까스로 평균 온도를 획득하면 아늑해지는 것은 카페, 맛있어지는 것은 커피.
동네카페의 셈라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어서 통계적으로 가장 자주 가는 동네 로스터리 카페. 2년 전에 중국 대사관 옆의 허름했던 건물이 재단장을 하더니 스타트업이 들어섰고 카페도 동시에 문을 열었다. 카페가 정상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물론 최근 1년 사이다. 작년에 생긴 공유 오피스가 카페 내부에서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 간혹 가볍게 입고 노트북만 들고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면 약간 대학 동기가 살던 대형 고시원의 휴게실이 떠오른다. 대형 고시원들이 다 그랬던 건지 전기밥솥에 담긴 쌀밥이 기본 옵션이었는데 한동안 친구 준다고 반찬 가져다 놓고 거기서 친구랑 밥을 많이 먹었었다. 이 카페에 아침 일찍 가면 빵을 공급하는 배달차량이 도착하는데 그 차량이 떠나고 나면 정말 달디단 시나몬바브카나 라즈베리잼이 들어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