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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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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커피 오후 네 시에 커피 마실 생각을 하면 오후 세 시부터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 커피가 항상 훌륭한 것은 아니다. 보통은 오전에 마시는 첫 커피가 역시 가장 맛있고 커피가 믿음직스러울 때는 그것이 하루의 단 한 잔일 때이다.
아는 냄새의 커피 한국에 갈 때마다 마트에서 꼭 한 두 번 정도 사서 마시게 되는 드립백 커피. 포장을 뜯고 컵 안에 걸치고 물을 붓는 내내 약간은 긴장한다. 왠지 인디언밥 과자 같은 거 너무 세게 뜯어서 산산이 흩어지는 것처럼 뜯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려서 커피 가루가 다 쏟아지거나 물을 붓다가 포트 뚜껑이 열려서 물이 쏟아져 나와 드립백이 컵 안으로 풍덩 빠질 수도 있을 거라 상상한다. 그런 몇 가지 변수들 사이에서 내가 예상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커피 향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분명 도토루 커피를 떠올릴 거라는 사실. 내 기억 속에선 다방과 카페의 공동경비구역 같은 곳쯤에 있는 카페랄까. 일부러 어려운 나라 이름만 골라서 쓴 것 같은 커피 이름들을 마주하고 내 의식이 결국 명동 성당 앞의 도토루 카페로 ..
수집 거리 도서관이라고 불리는 곳들. 누구나 안 보는 책들을 넣을 수 있고 또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는 일종의 도서 교환함이다. 보통 오래된 교과서들과 소설들, 표지만 딱 봐도 발행연도를 짐작케 하는 그런 책들이 대부분이다. 구시가에서 중앙역으로 가는 길목에 특히 19세기 말경에 지어진 임대용 주택들이 많이 있다. 벽난로로 난방을 하던 시기에 지어진 집들이어서 여전히 장작 태우는 집들이 많다. 이 동네의 거리 도서관에 책이 가득 채워져 있어도 돌아오는 길에 보면 텅 비어 있을 때가 많은데 그것은 누군가에게 그 책들이 땔감용으로 유용하기때문. 리투아니아의 교과서는 학생들이 사용하고 학교로 돌려주는 구조라서 돈 주고 사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려워서 쓸만한 교과서는 나도 챙겨둔다. 얼마 전에 가져다 놓은 옛날 4학년..
10/11/2021 얼마 전에 산 커피 원두를 개봉하여 향기에 감탄하며 열심히 갈았는데 여과지가 없다. 그래서 며칠 전에 내려 먹고 놔둬서 바싹 마른 커피들을 툭툭 털어내고 어쩔 수 없이 헌 여과지를 통해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내리고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서버와 드리퍼를 그대로 놔두면 컵에 지각한 커피물은 그대로 떨어진 채 증발하고 필터 속의 커피는 마르는 그 장면들에서 뭔가 커피 한 잔의 여정이 완벽이 끝났다는 담백한 느낌이 든다. 축축하고 묵직한 커피 필터를 곧 장 버릴 때 쓰레기 봉지 안에서 젖은 커피들이 미련을 가지고 질척되는 느낌과는 상당히 다른 그런 것.
10월 입문 짧았던 여름을 뒤로하고 지속적으로 비가 내렸다. 비와 함께 무섭게 추워지다가도 다시 따뜻해지길 몇 번을 반복하다가 9월에 내리는 비들은 아직은 꽤 남아 있던 가을과 그 가을 속에 또 아주 미묘하게 엉겨붙어있던 늦여름을 전부 말끔히 탈탈 털어 헹궈버렸다. 낙엽은 3분의 1 정도 떨어졌다. 난방이 시작되기 전, 이 시기의 집안 공기는 때로는 옷을 잘 챙겨 입고 바깥에 있는 것이 더 아늑하다 느껴질 만큼 야멸차고 스산하다. 정점에 이른 겨울이 풍기는 중후한 낭만과는 또 다른 까탈스러운 매력으로 충만한 시기. 그와 함께 커피는 또 얼마나 빨리 식는지 말이다. 어릴 적 가지고 있던 주니어 고전 전집 리스트를 기준으로 시간이 나는 대로 고전 다시 읽기 축제를 하고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주최자도 참가자도 나뿐인..
9월 절정 오전에 마시기 시작한 커피가 늦은 오후까지 어딘가에 남아있을 때가 있다. 사실 오후 늦게 새로 커피를 끓일 일이 없기 때문에 그때 마시는 그 의도치 않은 한 모금의 커피야말로 사실상 그 순간을 배경으로 완벽하게 새롭게 편집된 커피이다. 명백히 다 식었으며 심지어 아주 조금 남아있어서 가라앉은 커피 침전물이 입에 들어갈 때도 있으나 아마도 나를 기다려줬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건지 선물받은 느낌으로 마신다. 그래서 웬만하면 남의 찻잔이나 커피잔은 씻지 않게 된다. 어쩌다보니 잊혀졌던 한 모금이거나 잊혀짐으로 가장된 충분히 의도된 한 모금일 수 있기때문이다.
30/8/2021 생각해보면 지난 8월은 이렇다 할 날씨가 없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듯 딱히 취향도 성질도 없는 완전히 정체된 공기 속에서 다 마른 것 같기도 하고 덜 마른 것 같기도 한 질긴 청바지 같은 날씨였다면. 간간히 실수인 듯 햇살을 내비치기도 하며 그렇게 8월이 흘러간다. 지갑 속에 웬일로 동전이 있어서 시장 근처의 오래된 과자 가게에서 과자 몇 개를 사서 돌아왔다. 깨물면 여기저기서 투박한 크림이 삐져나오는 묵직한 커피에 잘 어울리는 옛날 과자. 며칠 계속 비가 왔다. 이성경이 어떤 영화에서 불렀던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와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서 인상 깊었던 영화 주제곡들을 찾아들었다. 갑자기 이런 노래들이 뜬금없이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후자는 특히나 옛날 그룹 모노의 메인 보컬과 목소리가 너..
7월 종료 쓰레기이지만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만 쓰레기인 것과 그저 아름다운 것에 관해 이야기하며 마시는 커피. 7월 중순 일주일간은 매우 무더웠다. 하지만 이 여름이 어처구니없이 짧을 걸 알기에 혹은 서울의 무더위를 (서울에서의 나의 마지막 여름이 15년 전 이었단걸 감안하면 또 지금의 여름과는 비교가 안 될 더위겠지만)아는 나에겐 이곳의 여름은 현지인들의 아우성과는 달리 완전히 견딜만한 종류의 것이다. 몇 번의 비가 가기싫다 버티고 있던 여름을 완전히 몰아낸것처럼 보일때도 있지만 8월에 내리쬐던 어떤 태양을 분명히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