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ffee (103) 썸네일형 리스트형 10/11/2021 얼마 전에 산 커피 원두를 개봉하여 향기에 감탄하며 열심히 갈았는데 여과지가 없다. 그래서 며칠 전에 내려 먹고 놔둬서 바싹 마른 커피들을 툭툭 털어내고 어쩔 수 없이 헌 여과지를 통해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내리고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서버와 드리퍼를 그대로 놔두면 컵에 지각한 커피물은 그대로 떨어진 채 증발하고 필터 속의 커피는 마르는 그 장면들에서 뭔가 커피 한 잔의 여정이 완벽이 끝났다는 담백한 느낌이 든다. 축축하고 묵직한 커피 필터를 곧 장 버릴 때 쓰레기 봉지 안에서 젖은 커피들이 미련을 가지고 질척되는 느낌과는 상당히 다른 그런 것. 10월 입문 짧았던 여름을 뒤로하고 지속적으로 비가 내렸다. 비와 함께 무섭게 추워지다가도 다시 따뜻해지길 몇 번을 반복하다가 9월에 내리는 비들은 아직은 꽤 남아 있던 가을과 그 가을 속에 또 아주 미묘하게 엉겨붙어있던 늦여름을 전부 말끔히 탈탈 털어 헹궈버렸다. 낙엽은 3분의 1 정도 떨어졌다. 난방이 시작되기 전, 이 시기의 집안 공기는 때로는 옷을 잘 챙겨 입고 바깥에 있는 것이 더 아늑하다 느껴질 만큼 야멸차고 스산하다. 정점에 이른 겨울이 풍기는 중후한 낭만과는 또 다른 까탈스러운 매력으로 충만한 시기. 그와 함께 커피는 또 얼마나 빨리 식는지 말이다. 어릴 적 가지고 있던 주니어 고전 전집 리스트를 기준으로 시간이 나는 대로 고전 다시 읽기 축제를 하고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주최자도 참가자도 나뿐인.. 9월 절정 오전에 마시기 시작한 커피가 늦은 오후까지 어딘가에 남아있을 때가 있다. 사실 오후 늦게 새로 커피를 끓일 일이 없기 때문에 그때 마시는 그 의도치 않은 한 모금의 커피야말로 사실상 그 순간을 배경으로 완벽하게 새롭게 편집된 커피이다. 명백히 다 식었으며 심지어 아주 조금 남아있어서 가라앉은 커피 침전물이 입에 들어갈 때도 있으나 아마도 나를 기다려줬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건지 선물받은 느낌으로 마신다. 그래서 웬만하면 남의 찻잔이나 커피잔은 씻지 않게 된다. 어쩌다보니 잊혀졌던 한 모금이거나 잊혀짐으로 가장된 충분히 의도된 한 모금일 수 있기때문이다. 30/8/2021 생각해보면 지난 8월은 이렇다 할 날씨가 없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듯 딱히 취향도 성질도 없는 완전히 정체된 공기 속에서 다 마른 것 같기도 하고 덜 마른 것 같기도 한 질긴 청바지 같은 날씨였다면. 간간히 실수인 듯 햇살을 내비치기도 하며 그렇게 8월이 흘러간다. 지갑 속에 웬일로 동전이 있어서 시장 근처의 오래된 과자 가게에서 과자 몇 개를 사서 돌아왔다. 깨물면 여기저기서 투박한 크림이 삐져나오는 묵직한 커피에 잘 어울리는 옛날 과자. 며칠 계속 비가 왔다. 이성경이 어떤 영화에서 불렀던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와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서 인상 깊었던 영화 주제곡들을 찾아들었다. 갑자기 이런 노래들이 뜬금없이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후자는 특히나 옛날 그룹 모노의 메인 보컬과 목소리가 너.. 7월 종료 쓰레기이지만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만 쓰레기인 것과 그저 아름다운 것에 관해 이야기하며 마시는 커피. 7월 중순 일주일간은 매우 무더웠다. 하지만 이 여름이 어처구니없이 짧을 걸 알기에 혹은 서울의 무더위를 (서울에서의 나의 마지막 여름이 15년 전 이었단걸 감안하면 또 지금의 여름과는 비교가 안 될 더위겠지만)아는 나에겐 이곳의 여름은 현지인들의 아우성과는 달리 완전히 견딜만한 종류의 것이다. 몇 번의 비가 가기싫다 버티고 있던 여름을 완전히 몰아낸것처럼 보일때도 있지만 8월에 내리쬐던 어떤 태양을 분명히 기억한다. 쉬운 커피 쉽다라는 것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런 커피는 참으로 속절없이 쉬운 커피에 속한다. 설탕이 쏟아져내려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는 순간에 이미 알 수 있고 한 모금 삼킨 후에 그러면 그렇지 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매일 마실 수 없기에 결국 쉬운 커피의 정상에 오르는 맛. 갈색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주는 오래 된 키오스크 커피와 변두리 앵무새 카페 커피 사이에 교묘하게 위치한 커피. 미움받을 용기로 충만한 커피. 남의 집에서 남의 컵에 남의 커피 내 것이 아닌 것들로 충만한 이것들도 결국은 내 추억 속의 커피로. 전기포트는 온몸을 미친 듯이 흔들며 끓는점 너머로 폭주했고 물을 붓고 한참이 지나서도 커피가 몹시 뜨거웠다. 내가 사용하던 컵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커피를 빨리 식혀버리기엔 그 날씨가 이미 충분히 게으르고 더뎠기때문이겠지. 대나무 막대기 에스프레소 신도심의 구석진곳에 있던 로스터리인데 얼마전에 구시가에 카페를 열었다. 이 카페 이름이 오래 전 자주갔던 신촌의 음악 감상실과 같아서 그냥 정이 간다. 피칸 파이가 너무 맛있어보여 잠시 뜨거운 커피를 먹을까 망설였지만 처음 온 카페의 신선하고 청량한 여름의 인상을 위해서 계획했던대로 토닉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가능하면 구겨지는 잔이 아닌 깨지는 잔으로 마시는 커피가 더 맛있지만 특히 에스프레소 토닉은 다소 촌스럽기조차한 골진 도톰한 투명 유리잔 이외의 경우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날씨가 꽤 무덥다가 비를 한번 내리더니 민망할 정도로 서늘해졌지만 잠시 비가 갠 상태에서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은 부정할 수 없이 여름 태양이다. 물론 얼음 조각은 다 마시고 난 후에도 한참 머물러있겠지만. 이전 1 2 3 4 5 6 7 8 ··· 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