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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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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nius 176_계단에서 화양연화(花樣年華). 하얼빈의 대학 신입생 환영회를 장식한 현수막에 또렷하게 적혀있던 네 글자. 눈물겹게 아름다운 치파오들을 입은 장만옥과 공허한 눈빛의 양조위가 애잔하게 스치던 어두운 골목길이 이 성어에 대한 이전의 반사적 인상이었다면 언젠가부터는 똘망똘망 총기어린 중국인 동기들의 눈초리가 더해져서 몇 가지 참 다르면서도 공통된 묘한 감상들에 사로잡히곤 한다. 꽃 같이 아름다워 타오르는 시절, 거짓이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가장 완전한 순수함으로 충만했던 한 때, 손에 잡힐 듯 말 듯 일시적인 꿈같지만 아주 깊게 뿌리내려 역설적으로 남은 인생을 전부 지탱하고도 남는 시간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다. 지나고 나면 마디마디 채워가는 이 삶도 그저 하나의 덩어리 진 시간으로 남을 뿐이겠지만 삶의 어떤 한 토막에..
Vilnius 175_모든 성인들의 날 주중의 이틀이 공휴일이어서 여유롭고 차분했던 지난 한 주. 간혹 비가 내리긴 했지만 11월 들어 기온이 많이 올랐다. 하지만 어둡고 휑한 거리를 걷는 옷속의 나와 주머니 속의 손이 유난히 포근했던건 기온 그 자체의 영향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 갑자기 추워진 10월에 꺼내 입은 따뜻한 옷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입은 옷이 문제지 나쁜 날씨는 없다'는 말은 천번만번 맞는 말씀이지만 '너 자신이 옷을 알맞게 잘 입으면 된다'라는 개인책임론은 결국 좋은 날씨는 없다는 것의 반증이려나.
Vilnius 174_미지와의 조우 한참 무르익던 유니텔 영퀴방이 한산해지는 새벽녘이 되면 보통 늘 보이는 사람들만 남고 비몽사몽한 기운에 나오는 문제도 비슷해진다. 마치 가장 마지막까지 술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며 이미 오래전에 바닥을 보인 어묵탕 뚝배기를 습관적으로 휘젓는것처럼. 그 중 유난히 자주 등장해서 기억나는 영화들이 몇 편 있는데 리포맨, 감각의 제국,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 피셔킹,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 북 등등 어쩌면 전혀 접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영화들이지만 모뎀 너머로 자신과 비슷한 영화광을 찾고 싶은 사람들이 최대한 현학적이고 비겁한 힌트를 내밀다 결국에 초성 힌트를 주며 마무리되는 공통점이 있는 영화들이다. 그중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도 출제자들이 좋아하는 영화였다. 아무도 못 맞출거라 작..
Vilnius 173_대마를 씹는 라마 여름부터 구시가에 대마 관련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 가게는 원래 사탕과 초콜릿을 팔던 가게였는데 문을 닫았고 1년 넘게 비어있던 점포에 풀을 뜯고 있는 건지 뱉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귀여운 라마 간판이 걸렸다. 이 근처에 채식 식당이 있다가 문 닫은 게 생각나서 이젠 비건 레스토랑이 생기는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대마 관련 가게. 저렇게 축 늘어진 라마를 보고 비건 레스토랑을 떠올린 것도 웃기지만 라마가 축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생각하니 더 웃기다. 중앙역 과 버스 터미널을 나와 구시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배낭여행자 아인슈타인 벽화를 돌면 만날 수 있는 라마,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대마 껌부터 대마 종자유, 사탕, 젤리, 봉, 파이프, 재떨이, 쟁반 등등 만화 굿..
Vilnius 172_빌니우스의 파블로바 필리에스 거리에서 미콜라스 성당을 잇는 미콜라스 거리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고 서울로 귀환하신 이웃님이 알려주셨다. 빌니우스의 새로운 소식들을 도리어 이웃님께 전해듣기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이 거리에는 나의 식당 동료가 태어나서부터 살고 있는 집이 있어서 자주 갔고 그의 집 마당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고 오곤 했다. 간혹 여행객들이 그 마당에 들어와 기념 사진을 찍는데 도무지 왜 사진을 찍는지 이해할 수 없다던 친구. 여름이 돌아올때마다 휴가비를 들여 빌니우스 근교의 여름 별장을 수리하더니 요즘은 아예 그곳에서 노부모를 모시며 출퇴근 하고 있어 정작 집은 보금자리가 필요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내어주었단다. 친구집에서 돌아올때마다 바리바리 싸주는 잼이며 통조림이며 물려주는 아이들의 옷을 짊어 지고 오느라 택시..
Vilnius 171_세 친구 쌀/세몰리나/밀가루
Vilnius 170_지붕 아래 지붕 아침을 일찍 먹고 밖으로 나갔다. 시장 근처의 놀이터에서 놀다가 비를 피해 시장으로 들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저번에 공원 좌판에서 팔던 리투아니아 전래 동화책을 사려고 했는데 팔렸는지 없다. 비가 오고나면 여기저기에 물이 고인다. 웅덩이에서 놀고 성당 정원에서도 놀았다. 돌아오는 길에 멈춰야 할 곳은 무한하다. 걷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해 걷는 것처럼. 그 사이 토요일 오전의 태양이 성당 건너편에 멋진 지붕을 만들어냈다.
Vilnius 169_전당포 너머로 7월의 아인슈타인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중앙역 근처의 우거진 나무 아래에 서서 순식간에 내린 비가 만들어내는 물줄기를 구경했다.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을 빠져나왔는데 비가 내린다면 시내버스와 트롤리버스가 정차하는 도로변의 나무숲으로 가면 된다. 역 주위가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겪는다면 언젠가 사라질 전당포와 전화기 수리점, 선술집 등이 모여있는 뭔가 불량스럽고 미심쩍은 건물 주위를 배회하는 사람을 구경할 수 있고 올해부터는 여행에 들떠있는 아인슈타인도 만날 수 있다. 비는 금방 그치기 때문에 이 비가 그칠지 말지를 알아볼 안목도 필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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