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만들일이 생겨서 빌니우스 버스 터미널에 있는 열쇠집에 갔다. 만들어서 가져와서 문을 열려고 보니 안 돌아가는 열쇠. 다시 가서 조금 고치고 다시 와서 열고 또 안 열려서 다시 가서 고치고 또 안 열려서 다시 갔다. 열쇠 자체의 미묘한 두께가 문제였는지 열쇠가게 청년은 결국 가져간 원본 열쇠와 같은 제조 회사의 열쇠를 골라 새로 깎아줬다. 그리고서 다행히 문이 열렸다. 터미널에서 가까운 장소여서 왔다 갔다 했어도 그나마 한 시간 가량 걸렸을 뿐이지만 직원은 혹시 내가 또 오면 어쩔까 신경 썼을 거고 나는 계단을 오르며 혹시 또 문이 안 열리면 어쩌지 신경 썼다. 여긴 지하상가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니고 터미널의 대합실 뒤로 펼쳐진 보도이다. 내가 등지고 있는 열쇠가게가 이 보도의 끝이고 저 끝이 대합실이다. 열쇠를 깎는 소리가 흡사 치과의 스케일링 하는 소리와 비슷하다. 그 소리를 등지고 팔꿈치를 괴고 침침한 보도와 그곳을 띄엄띄엄 오가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사람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재밌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구경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갑자기 그와 내가 네오와 스미스 대원이 빗속에서 떠오르던 것 처럼 붕떠오를것 같다. 버스 출발때까지 별달리 머물 곳이 없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듯 보이는 사람들은 마치 내 열쇠 스케일링 소리에 이끌린듯 보도 끝의 열쇳집에까지 다달아서 가격표가 하나하나 붙어있는 반짝이는 손목시계들을 구경하다 뒤돌아서곤 했다.
지난해인가 빌니우스 아트 페어에 등장했었던 설인. 얼마 전 집 근처로 이사 왔는데 영구 거주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오전 늦게까지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 많아서 안갯속에 휩싸여있는 모습이 사뭇 궁금한데 매번 게으름을 피우다 오후 늦게나 나가서 이렇게 어둑어둑해질 때에야 돌아오게 된다. 설인이 사는 곳은 집 근처에 조성된 작은 공터인데 그늘이 없고 키 작은 묘목들로 가득했던 작년 여름에 비하면 이제 나무도 제법 키가 커지고 아늑해졌다. 소탈한 놀이터 기구 두세 개와 나무벤치가 있다. 뒷모습만 보면 약간 프레데터와 콘의 조나단 데이비스가 생각난다. 다들 별로 신경 안 쓰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2차 락다운이 시작되었다고 의외로 거리가 한산하다. 때맞춰 나타난 이들이라 왠지 좀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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