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패밀리 닥터가 있는 폴리클리니카의 수많은 진료실 창밖으로는 대략 이런 흐릿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간호사가 전화기 너머의 퇴직자 할머니에게 그 약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껏 호통칠 때, 진료 예약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진료 가능한 날짜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겨우 찾아낸 미지의 날짜가 보란 듯이 나의 스케줄과 맞지 않아 간호사가 한숨 쉬며 다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할 때, 의사가 나의 피검사 결과를 출력하고자 노력하지만 때마침 말을 듣지 않는 프린터기를 공개적으로 의아해할 때,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저당 잡는 가운데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의 오래된 지붕에 집중할 수 있는 소품 같은 순간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건물이 여러모로 병원 기능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집 근처로 내년 즈음에 이전을 한단다. 병원이 가까워지니 좋긴 하지만 뭔가 이 병원특유의 정취를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생각하니 좀 아쉬워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풍경들을 많이 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아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3개월 전쯤에 예약해놓고 잊고 있었던 치과 진료 알림이 왔다. 3개월 전의 시점에서 진료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가 3개월 후였단 의미이다. 거의 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리투아니아의 국가 의료 기관 Poliklinika을 이용할 때 필요한 것은 가까스로 진료일이 다가왔을 때에 병이 씻은 듯이 다 나아서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어지길 바랄 수 있는 아량과 힘들게 예약한 진료 날짜를 잊지 않을 기민함이다. 초음파 검사 같은 경우는 워낙에 줄이 길므로 시간이 지나서 담당 의사 앞에 서면 과연 무엇 때문에 패밀리 닥터가 초음파 검사를 배정했는지도 잊을 수 있다. 출산에 임박해서 병원에 도착한다면 로브를 주섬주섬 저미며 나오는 당직 의료진과도 만날 수 있다.
요즘은 폴리클리니카 치과 치료가 꽤 괜찮다고 하여 입안에 자리 잡은 기암괴석들도 제거할 겸 처음으로 폴리클리니카 치과 예약을 했었다. 사설 병원들이 많지 않은 리투아니아이지만 곳곳에 치과들은 많은데 선천적으로 이가 약하고 후천적으로도 치아 상태가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 없는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아마 폴리클리니카의 치료 순서를 기다리기에 치통의 압박은 감당하기 힘든 모양이다.
치과 침대에 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힐러리 스웽크한테 끼워줬을 법한 마우스피스 같은 물건이 입안에 끼워졌다. 치료 중반이 지나 세척할 일이 많아지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안경까지 씌워주었다. 폴리클리니카의 스케일링의 경우 완전 무료는 아니고 9유로 정도의 아주 상징적인 요금을 지급하는데 병원 1층의 비용 지급기 화면에 내가 사용한 용품들에 대한 가격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었다.
치료 내내 입을 벌리고 있기 힘든 사람을 위해 친절하게 끼워주는 개구기는 Lūpų plėtiklis 1.3유로. 그 외에 내가 사용한 안경과 입을 헹구는 데에 쓴 일회용 컵과 입을 닦는데 쓴 휴지 두 칸과 치위생사님께서 착용한 장갑 등등은 나를 위한 모둠 일회용품에 묶여서 1.2유로. 치위생사님의 업적에는 6.5유로를.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어 기쁜 마음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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