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thuanian Language

(121)
리투아니아어 89_집 Namai 아주 오래 전에 집수리를 하면서 걷어낸 두꺼운 나무 기둥들로 좁은 발코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인용 벤치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앉아 있고 그랬는데 비가 오면서 젖고 벌레가 생기길래 빌라 놀이터로 옮겨 놨었다. 이미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상당히 갈라지고 먼지가 쌓이니 앉기엔 불가능했지만 동네 아이들은 그것을 딛고 얕은 언덕을 오르내렸다. 며칠전에 이웃 할머니가 봄이 되면 가꾸는 화단 옆에 놀이터를 뒹굴던 큼지막한 쓸모있는 쓰레기들과 함께 벤치가 분해되어 있었는데 며칠 후 누군가가 이런식으로 벌레의 보금자리를 만들어놓았다. 벌레들이 모래상자나 미끄럼틀 따위를 등지고 전부 이 아늑한 보금자리로 몰려들기를 염원한다.
리투아니아어 88_연극 Spektaklis 부활절을 지내러 갔다가 우연히 연극 한 편을 보았다. 흡연 장면도 많고 총격씬도 있어서 냄새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매케하고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옷 찾느라 줄서 있는게 싫어서 끝난 후에 최대한 끝까지 앉아 있는데 넓은 공간에서 맞이한 고요함이 뭔가 새삼스러웠다. 이 연극은 알고보니 퀜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는데 연극 제목은 Šv. speigas 였다. 영화를 봤다면 심히 납득이 되는 제목이다. 엄동설한, 동장군이라고 하면 저녁 뉴스 일기예보 느낌이 든다만 Speigas 는 어쨌든 혹한을 일컫는 말이지만 약간 미화되고 신성화된 추위의 뉘앙스가 있다. 밀폐된 공간속에서 진행되는 영화가 워낙에 연극적인 느낌이 강해서 정말 누군가가 연극으로 만들면 망설임없이 보러가겠다는 짤막한 감상을 ..
리투아니아어 87_어둠 Tamsa 세상의 여러 전쟁들 중엔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길면 길어질수록 누군가에게는 이로운 전쟁, 그러니 구조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과 알려져 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고 관심도 못 받을 테니 알려지더라도 묻히고 근본적으로 알려지지 조차 않는 그런 전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전쟁들이 대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와 상관없이 그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매한가지로 참혹한 것이다. 그러니 새삼 전쟁이 나면 알려질 가능성이 높은 위치에 살고 있다는 게 최소한 다행이라는 우습고도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겠지만 지금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의 얼마 전 일상도 아마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겠지. 삶의 터전을 등지고..
리투아니아어 86_오리 Antis 지난주에 별생각 없이 집어 온 동화책. 오리는 또 왜들 그렇게 귀여운지. 현실에서 이 오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대포 속의 오리. 전쟁 시작 전. 병사가 다급하게 장군에게 달려온다. -장군님. 대포를 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대포를 쏠 수 없다니! -대포 속에 오리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뭐라고? 공격하려던 도시의 수장에게 대포를 빌리러 백기를 들고 들어가는 장군 -대포 하나 빌려주세요. 전쟁을 하는데 우리만 대포가 없으면 공평하지 않습니다. -대포가 우리도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빌려준단 말이오. -그러니깐 그쪽에서 우리쪽으로 대포를 쏘면 우리가 대포를 가져와서 또 그쪽으로 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절대 그렇게는 안되오. 게다가 우리 대포는 너무 무거워서 꿈쩍도 안 할 거요. ..
리투아니아어 85_백과사전 Enciklopedija '나의 첫 백과사전'이라는 책. 어린이 도서관에 있는 이런 책을 가끔 빌려온다. 한 번도 접할 기회도 말할 기회도 없어서 어떤 때는 알면서도 말할 수 없어 돌려돌려 설명해야 하는 단어들이 예상보다 참 많은데 예를 들면 양서류, 자전축, 홍채 뭐 그런 것들. 이런 책에는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기본적인 단어들이 삽화와 함께 총망라되어 있으니 지루하지 않게 기억을 환기시킬 수 있어 좋다. 약국이나 서점의 세일 상품 전단지와 더불어 비일상적인 단어들의 보고라고 할 수 있겠다. 백과사전을 뜻하는 단어를 리투아니아어로는 '엔찌클로페디야'라고 읽는다. 그리고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나문희와 이제훈이 나왔던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문희가 동사무소 직원인 이제훈에게 영어 과외를 해달라고 조르는..
리투아니아어 84_장작 Malkos 불을 피우다 말고 어디로들 갔을까.
리투아니아어 83_기적 Stebuklas 거리거리에 남겨진 재밌는 물건들. 누군지 거의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누구지 하고 쓰윽 눈을 밀어내본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도서에는 결코 눈이 쌓이지 않더랍니다.' 17세기였더라면 기적이 되었을 텐데. 곧 부활절이다.
리투아니아어 82_장갑 Pirštinės 겨울이면 주인을 잃은 장갑이 지천인데 사실 주인을 잃어서라기보단 제 짝을 잃은 것 같아 처량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보통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있기 때문이다. 장갑이야 한 짝을 잃으면 운 좋게 남은 한 짝도 거의 쓸모가 없어지니 하나를 잃든 둘을 잃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남은 장갑 한 짝 탓에 잃어버린 장갑이 잊히지 않고 계속 생각나니 차라리 두 짝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아예 양 손바닥이 줄로 이어져 절대 서로 이별할 수 없었던 아동용 장갑은 그야말로 주인을 잃었다. 날이 따뜻해져서 장갑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저렇게 작은 손바닥을 지닌 아이라면 분명 다음 겨울엔 저 장갑이 맞지 않을거다. 그나마 장갑은 지난겨울 한 철 제 할 일을 다했으니 주인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