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데뷔작을 보았다. 이분은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 각본을 쓰다가 감독 데뷔를 한 경우인데 이 데뷔작과 다음 해에 만든 <Beautiful city> 두 영화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확실히 좀 더 날것의 저예산 느낌이다. 악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박하사탕, 똥파리 같은 한국 감독들의 데뷔작을 봤을 때 느낌이랑 비슷했다. 그의 최근 영화들이 더 재밌고 절묘하고 볼거리도 많지만 그런 영화는 감독이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이런 초기작의 느낌을 다시 구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64색 물감을 쓰던 사람에게 갑자기 8색 크레파스를 쓰라고 하면 좀 당황스러워할 것 같고 봉준호 감독에게 플란다스의 개 같은 영화를 다시 만들어달라고 애원하면 난처해할 것 같다.

나자르(Yousef Khadoparast)는 레이하네 (Baran Kosari)를 너무 좋아한다. 부인이니깐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냥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에도 평균이 있지 않으려나. 사랑이란 감정은 마치 언제나 100% 같고 쉼 없이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도 쉽게 하지만 세상엔 분명 평균보다 좀 더 많이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노력으로는 안 되는 그런 능력을 가진 두 사람이 이 초기작 두 편에 나온다.

나자르와 레이하네는 곧 이혼을 해야 한다. 아내 레이하네의 엄마가 몸을 파는 '올바르지 못한' 여자라는 소문 때문이다. 나자르는 그게 내 결혼과 무슨 상관이냐며 가족에 반항하지만 장모의 직업이 나자르 가족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이혼한다.

이혼을 하면 방황하고 시간이 지나면 옛사랑을 잊기도 하고 재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나자르가 결혼을 하면서 진 빚, 레이하네의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주고 싶어 하는 돈 때문이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결혼을 할 때 신부 측에 약속하는 '마흐르'라는 돈이 있는데 그 돈을 바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나중에 주기도 한단다. 현실에선 결혼하는 순간 계약서에 명시된 돈이 없더라도 살면서 같이 벌다 보면 결국은 가족의 재산으로 남는 돈일 테니 이란에서도 아마 백년해로가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이란 영화 속에선 보통 그 돈을 먼저 받고 어린 소녀가 나이 많은 남자한테 팔려가던가 어떤이는 이혼을 하고 그것을 낼 여력이 없으니 빚을 지고 감옥에 간다.
여기서 이제 아스가르 파르하디 영화에 빠지지 않는 팍팍한 단어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혼, 보증인, 분할상환, 채권자, 감옥, 합의, 도피 등등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가족 중심사회의 이란에선 어쩌면 아내가 남편의 사정을 알고 그 돈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법적 권리를 내세우고 나라가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돈을 빌릴 여유가 없다면 보증인을 세우고 대출을 받는데 그걸 돌려줄 방도가 없으면 당연히 감옥행이다. 하지만 그 돈을 레이하네에게 진심으로 주고 싶은 나자르는 빚을 지고 감옥에 가야 한다. 자신은 가방끈이 짧지만 레이하네는 하고 싶은 공부를 끝내고 꿈을 이루길 원한다.
감옥에 가면 결국 그 돈을 레이하네에게 벌어 줄 수도 없는 상황이 되니 도피를 감행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화물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도시를 떠나게 된다.

그것은 사막에서 뱀을 잡는 중년 남성의 차였다. 일전에 뱀이 돈이 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자르를 위해 친구가 마련한 기회인데 나자르는 뱀 잡는 법을 배워보려고 남성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지만 계속 무시당한다. 결국 나자르가 겁도 없이 혼자 뱀을 잡다가 손가락을 뱀에 물리고 났을 때야 남자는 그를 도와준다. 남자는 독이 퍼지기 전에 여전히 결혼반지가 끼워진 나자르의 손가락을 잘라서 얼음물에 넣고선 병원으로 달려간다.

사랑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꾼이 아닌 평균의 사람들은 어쩌면 희생해야 할 상황조차 안 만들지 않으려나. 그것도 결국 제도의 문제일까. 나자르는 손가락 봉합 수술을 잘 마치고 뱀을 판 돈을 벌어 레이하네를 찾아갈 수 있을까.

나자르를 그토록 거부했던 뱀장수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갔다가 도피 중인 사람이다. 옆에서 계속 사랑타령을 하며 뱀 잡는 법을 알려달라는 나자르를 보면서 그는 덧없다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눈짓 한번 주지 않는 그를 나자르가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자동차에 남아있던 어떤 여인의 사진이었다. 언젠가 뱀장수가 사랑했었던 지금은 어디에도 없는 여인이다.

2003년도면 딱히 옛날 영화도 아닌데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적당한 사진이 없다. 이 정도 감독이면 크라이테리온 컬렉션 같은데 타이틀이 나올 법도 한데 이 감독 영화는 아직 하나도 없는 게 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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