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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Fireworks Wednesday (2006)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세 번째 작품. 이 감독의 영화는 보는 동안 늘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에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대로 끝나면 주인공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계속 남은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작에서 돈문제까지 얽혀서 대안 없는 사람들이 겪는 불행을 주로 얘기했다면 이 영화를 기점으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 중산층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 계층간의 거리감이 직접적이진 않지만 은근히 드러나기도 한다.


가정문제,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이 개인이 겪는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는데 아주 단순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당사자 외의 주변인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들면서 영화가 진행되니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도적으로 살린 디테일을 보는 재미가 있다.
 



 
끈질기게 같은 주제를 파고드는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같은 소재를 끊임없이 변주하는 노아 바움백이 많이 생각난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가 만드는 영화들이 인물 개개인의 고고한 자아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모습에 좀 더 집중한다면 비슷한 소재여도 아스가르 파르히디의 영화는 그 결이 좀 다르다. 초기작부터 끊임없이 건드리는 소재가 결혼과 이혼이지만 가장 사적이어야 할 이들의 개인사는 사회 질서와 계급, 주변의 시선, 사회가 요구하는 개인의 도덕성과 종교 관념에 좀 더 강압적으로 얽매여있다.


신이시여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원망하지만 뒤돌아서면 신을 걸고 모든 것을 맹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거수일투족,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그것에 온몸으로 맞서야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유일신 앞에서 한없이 불완전한 개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다만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Fireworks Wednesday>는 새해를 앞둔 테헤란이 배경이다. 자동차 경적이 끊임없이 울려대고 매연 냄새가 흥건한 초밀집 도시에서 바쁜 삶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원제는 '차하르샨베 수리'. 옛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페르시아의 새해 노루즈를 앞둔 마지막 주 수요일 이브에 폭죽을 터뜨리는 전통 풍습이다. 페르시아어 발음들이 아름답다.



 
결혼을 앞둔 루히(Taraneh Alidoosti)는 예비 신랑과 찍은 사진을 보며 깔깔댄다. 오토바이 바퀴에 차도르가 말려들어가서 더 이상 운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마냥 행복하다. 어디서 얻은듯한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직업소개소 화장실에서 입어보며 뚱뚱해진 몸으로도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결혼 비용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루히는 일용직 가정부 자리를 알선받는다. 도착한 아파트는 이제 막 가정을 꾸리려는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나 넓고 쾌적한 꿈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면면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방금 끝난 집수리로 인해 정신없는 아파트, 깨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여자를 고용한 남자 모르테자(Hamid Farrokhnezhad)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있고 뒤이어 우울한 표정의 부인, 모즈데 (Hediyeh Tehrani)가 등장한다. 루히는 깨진 창문 유리를 주워 담으며 청소를 시작한다.  

 
이 부부는 새해를 기념하여 곧 두바이로 가족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그것은 아마도 부부관계를 다시 회복해 보려는 억지 섞인 여행 같다. 창문까지 박살 내며 끝난 어제의 과격한 부부싸움으로 아파트 안에는 냉기가 흐른다. 모즈데는 끊임없이 욕실로 달려가 환기구 앞에 귀를 댄다. 앞집에 사는 미용실 여자, 씨민(Pantea Bahram)과 남편이 불륜관계라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씨민은 아파트의 가정집에서 미용실을 운영한다. 주민들은 그 미용실 때문에 아파트에 낯선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게 못마땅하다. 나름 넉넉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한없이 폐쇄적이다. 별거 중인지 이혼을 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말끔한 차림새의 그녀의 사정도 아파트 여자들은 못 미더웠을 거다. 



 
신경 쇠약 직전의 모즈데는 유치원에 아들을 데리러 가는 일도 처음 보는 가정부 루히에게 맡겨버린다. 모즈데는 루히가 깜박하고 놓고 간 차도르를 걸치고 남편 회사 근처를 서성인다. 남편은 자신을 의심하는 아내의 면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휘두른다. 남편은 아내가 가정일에 소홀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요구사항만 늘어간다며 동료에게 신랄하게 험담한다. 남편과 씨민의 관계에 대한 모즈데의 의심은 남편 말대로 정말 그녀의 망상에 불과할까. 




 
모르테자는 약속대로 아들과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나선다. 이란의 불꽃축제는 위험천만해 보인다. 불꽃은 테헤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대신 값싼 폭죽들이 뿜어대는 연기로 흡사 공사장을 방불케 한다. 축제를 빌미로 범죄의 온상이 되어 새해가 지나서까지 여기저기서 불발된 폭죽들이 터질 것만 같다. 그 모습은 삐그덕거리는 모즈데와 모르테자의 상황과 어우러져서 과연 이들이 무사히 새해 여행을 갈 수 있을지 그 갈등의 끝은 무엇일지 노심초사하게 한다.

불꽃놀이 장소에서 모르테자는 잠시 볼일이 있다며 아이를 루히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향한다. 한적한 주택가에 차를 세우자 미용실 여자 씨민이 합석한다. 행복한 미소가 모르테자의 얼굴을 뒤덮는다. 하지만 씨민은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며 이별을 고한다. 
 



그러니 모즈데의 의심은 사실이었고 남편의 결백은 거짓이었으며 의심하는 여자와 결백을 주장하는 남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도 완전히 흐트러진다. 모즈데는 완벽한 증거를 잡진 못하지만 이들 사이의 신뢰는 깨졌고 아이는 부모의 갈등에 완전히 노출되었으며 신혼의 단꿈에 젖은 루히는 하루 온종일 가정의 불화를 목도했고 모르테자가 정말 씨민을 사랑했다고 해도 그것은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라는 것. 누군가를 의심이라는 지옥에 가두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고 상처를 주며 이뤄낸 사랑은 결국 모두에게 짐이 될 거라는 것. 



 
 
영화에서 그들에게 일상적인 복장이 의도적으로 계속 언급된다. 긴 차도르가 오토바이 바퀴에 낀다던가 중산층 여성인 모즈데가 자신은 착용하지 않는 루히의 차도르를 입고 밖에 나간다던가, '차도르'까지 입고 남편 뒤를 밟냐며 남편이 부인을 노골적으로 모욕한다던가, 차도르 없이 귀가하는 루히에게 약혼자가 차도르는 어디 놔두고 왔냐고 묻기도 한다. 

 
이슬람 사회의 여성 인권에 대해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런 종교적 복장에 관한 것인데 사실  언제 어떤 것을 누가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식적이고 분명한 구분은 없는 것 같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복장너머의 미묘한 사회 계층 차이가 느껴졌다. 극 중 루히가 착용하는 길고 검은 차도르는 심지어 바퀴에 끼이기까지 하니 그것이 여전히 얼마나 걸리적거리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반면 비교적 좋은 아파트에 사는 모즈데나 씨민은 머리와 어깨정도만 가리는 스카프, 검정 일색의 차도르보다는 색상도 다양하고 때때로 예쁘기까지 한 루사리를 착용하는데  갑자기 입은 차도르 때문에 남편에게조차 비아냥거리가 된다. 딱 봐도 온몸을 전부 가리지 않아도 되는 루사리를 쓰는 여인들이 상대적으로 활동적이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문제는 차도르든 루사리든 그것이 그들의 경제사정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고 해도 그 종교적 직물 속에서 강요받는 여성의 내면적 지위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 


그러니 영화 속에서 루사리를 쓴 여성들의 위치는 좀 애매해 보인다. 너무 보수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개방적일 수도 없고 전근대적일 필요는 없지만 또 지나치게 세속적 이어선 안된다. 매일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약혼자와 알콩달콩하는 루히가 좋은 집에서 남편의 외도를 의심만 하고 길거리에서 모멸당하는 모즈데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루히 역시 조만간 결혼생활에서 어떤 풍파에 시달릴지 모르지만 영화 속에서 루히는 적어도 그 하루동안은 자신의 삶이 모즈데보다 그다지 불우하지 않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루히역의 배우 타라네흐 알리두스티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다른 영화들에서 결혼과 관련해 온갖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부분은 모르테자와 승용차 안에서 밀회를 나눈 후 루사리를 여미고 텅 빈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지나가는 씨민에게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가 폭죽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노상에서 모즈데를 손찌검하던 모습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이 장면이 섬뜩했던 이유는 이미 개인차원이 아닌 사회적 분노와 혐오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관계를 끝내자고 하기까지 씨민은 늘 안절부절못했을 거다. 그리고 자신만을 겨냥하고 터진 이 새해전야의 폭죽으로 아마 그 결정이 옳았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거다. 지금의 이란 사회에서는 그 형벌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간통은 이슬람 사회에서 매우 중범죄에 속한다고 한다. 간통 혐의를 씌우는 것도 중죄이다. 간통죄를 증명하려면 최소 4명의 공정한 남성 목격자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공정성은 누가 검증하는지 알 수 없다. 여전히 부모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것에 불만을 품고 여자를 살해하기까지 하는 감독의 전작을 생각하면 어쩌면 씨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모르테자와 연인관계였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힘들게 연장시켜 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꾸려낸 가정에 모르테자는 충실하려고 했을 거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냥 그런대로 믿다 보면 결국 그것이 진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남자인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지척에 둘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이혼으로 발생할 마흐르를 지불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이슬람 율법이 좀 더 잔인한 이유는 많은 법에 돈문제가 얽혀있기 때문 같다. 법은 정의와 질서를 도모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자유를 제약하고 그런 자유를 제약하는 것에 더 강제력을 발휘하고 삶을 끝까지 무너뜨리려고 드는 것은 어쩌면 물질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 안정적인 삶에서 얻어지는 혜택을 적당히 누리며 행복하다며 운신하도록 하는 사회에서 계급에 따라 요구되는 여성상은 확연히 달라진다. 어쩌면 이 정도로 먹고살게 해 줬으니 더 이상은 바라지 말고 가정에 최선을 다하라는 암묵적인 폭력일 수도 있다. 길거리에 번듯한 가게는 낼 수 없지만 어쨌든 미용실로 돈벌이를 하는 독립적인 씨민이나 일용직일지언정 아직은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루히만큼 가정주부인 모즈데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제약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이미 믿음이 깨어진 자리에서 희망찬 새해를 밝히는 불꽃을 구경한들 그 빛은 균열난 가정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결혼을 앞둔 순진하고 어린 이란 여성 루히의 시선은 파국을 앞둔 혹은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진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중산층의 갈등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루히는 모르테자와 씨민이 만난 것을 모즈데에게 얘기해 줄까 하다 말을 멈춘다. 새 유리가 채워진 이미 깨진 창문 속에서 과연 진실이 그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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