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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About Elly (2009)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네 번째 영화. 배경도 줄거리도 가장 단순하지만 끝날 때까지 기가 막힌 긴장감을 유지한다. 결론은 이미 난 것 같은데 알려주지 않으려고 밍그적거리는 부분에서 무한한 짜증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결국 이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시대착오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임을 알게 된다.

포스터 속의 배우 골쉬프테 파라하니(Golshifte Farahani)는 짐 자무쉬의 <패터슨>에서 아담 드라이버의 상대역으로 인상적으로 나온다. 언어와 복장 때문인지 같은 배우인 게 믿기 힘들 만큼 다르다.

보통 저런 제목과 포스터 전면에 배우가 등장하면 저 여성이 엘리일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는데 이 여인은 엘리가 아닌 세피데이다. 세피데의 미간은 할 말이 있는 듯 억울해 보이고 모래사장이 먹어버린 자동차를 향해 카스피해의 파도가 휘몰아친다.
 
영화 초반에 많은 등장인물들이 뒤엉켜서 동시다발적으로 대사를 쏟아내기 때문에 이란 이름도 배우들의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누군지 중반까지 헷갈린다. 그리고 대충 그들에 대해서 알았다 싶을 즈음에 엘리는 사라지고 엘리가 누구였고 왜 그곳에 그들과 함께 있었는지 모두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엘리에 대해서 관객과 등장인물들이 동시에 알아간다는 것이 묘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뭔가를 아는듯하면서도 속시원히 말하길 주저하는 세피데는 답답하지만 사라진 엘리와 남은 세피데 모두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하나의 인물 같기도 하다. 


 


 
대학 동창생들이 오랜만에 만난다. 어두운 고속도로 터널을 지나는데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엠티 가는 신입생 마냥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른다. 결혼한 커플, 아이가 있는 커플, 이혼 후 고향에 돌아온 남자가 다 함께 카스피해 연안으로 주말여행을 떠난다. 바다에 가기 직전에 계곡에 잠깐 머무는데 평평한 자갈바닥에 듬성듬성 주차한 차들 옆에 돗자리를 펴고 사모바르까지 들고 와서 차를 끓인다. 한국이었다면 아마 사모바르대신 소화기만 한 보온병이 등장했을까.

그 장면이 뿜어내는 정서는 90년대 초반 친척들과 산으로 강으로 놀러 갔을 때의 그것과 너무 비슷했다. 추석이 되면 우리 친척들은 할부로 산 각자의 차를 몰고 한계령을 넘었다. 금성 텔레비전은 14인치에서 16인치로 넘어갔으며 서수남 하청일이 그려진 짤순이는 사라졌다. 어떤 고모네는 바텔을 샀고 어떤 고모네는 티코를 샀다. 형편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계속 뭔가 조금씩 생활이 나아지는 느낌은 공통적이었다. 아마 국가 전반적인 그런  과열된 분위기가 이란에서는 2000년대 중반이었나 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고 외국에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문명과 문명이 만나면서 늘 있었던 것들, 만져지지 않지만 곪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고개를 든다.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아마 그 흐름을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인 감독 같다. 
 

 
 
졸업하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친숙한 이들 중에 낯선 얼굴의 엘리가 등장한다. 독일에서 이혼하고 돌아온 아흐마드(Shahab Hosseini)와 엮어줄 생각에 세피데가 기어코 데려온, 아이의 유치원 교사이다. 무슨 이유인지 세피데는 시종일관 엘리보다 훨씬 들떠있다.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이 이들은 바닷가 별장으로 장소를 옮긴다.

유치원 선생님 엘리(Taraneh Alidoosti)는 극 중 유일한 미혼이고 아픈 엄마에게 자주 전화를 해서 계속 안심시킨다. 뭔가 근심에 차있고 놀러 왔지만 노는 기분이 아니며 하루만 놀고 가겠다는 엘리를 세피데는 극구 말린다. 동창들은 아흐마드와 엘리를 엮어주려는 분위기를 만들며 짓궂은 농담에 키득거리기에 여념이 없고 엘리는 그것이 내심 불편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진 못한다. 

 

 
 
 
세피데는 대학 다니는 오빠를 졸라서 따라온 철부지 여동생처럼 천진난만 생기발랄하다. 이번 여행도 세피데가 야심 차게 계획했지만 처음부터 조금씩 삐걱거린다. 빌렸다고 한 민박집은 때마침 주인이 돌아온다니 머물 수가 없고 궁여지책으로 소개받은 장소는 깨진 유리에 문도 없는 화장실에 파도는 너무 거세고 아이들은 가지 말라는 모래사장에서만 놀려고 하고 없는 것도 많고 일행들이 불만을 드러내는 와중에서 세피데는 계속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한다. 
 
나이차이가 꽤 있어 보이는 가부장적인 남편, 아흐마드와 엘리를 엮어주겠다는 일념, 어쩌면 세피데가 좋아했던 사람은 아흐마드 같고 남편도 그걸 아는지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이 감독 영화 속의 수많은 여성을 떠올리면 이 여행이 가장 필요했던 사람은 어쩌면 세피데였을 거라 짐작하게 한다. 세피데가 자기 아이를 돌보는 장면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고 그 자신이 아직 아이인 듯 이 소풍이 즐겁기만 하다.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아이를 겨우 구하고 한숨을 돌리고 나자 엘리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아이를 구하려다 물에 빠진 건지 그렇게 하루만 머물고 싶어 하더니 말도 없이 떠난 건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정작 엘리에 대해서는 유치원 선생님이란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세피데를 추궁하지만 세피데는 쉽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전화를 해보면 끝날일이지만 전화기는 세피데가 숨겼던 상태이고 집에다 전화를 해보면 될 텐데 그러지도 않고 실종자 정보가 필요하다는 경찰에게도 제대로 해줄 말이 없다.  
 
 

 
 
엘리는 약혼 상태였다. 놀랍게도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고 가장 큰 문제다. 약혼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세피데는 엘리를 다른 남자랑 이어주려고 했고 같이 있던 사람들도 신나라 합세했고 신혼부부가 있어서 꼭 별장이 필요하다는 거짓말로 임대까지 했으니 엘리가 결혼한 여자라는 증거는 넘쳐난다.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인가 싶지만 이곳에서는 큰일이다. 약혼녀였음에도 미혼녀 행세를 한 엘리의 명예는 물론 그런 불명예를 방조하고 부추기기까지 한 사람들 모두 혼란에 빠진다. 엘리는 약혼 상대를 싫어했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세피데는 그걸 알았다. 그것이 아마도 세피데가 엘리에 대해서 아는 전부이다. 
 

 
 
휴가를 망친 모든 원인이 아내인 세피데에게 있다고 생각한 남편은 이성을 잃는다. 감독의 전작에서 자신의 뒤를 밟은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던 모르테자를 보고 나니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되는 장면이다.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뜻밖의 행동은 아마도 우리가 보지 못한 천 번의 행동을 말해주기에 세피데의 결혼 생활은 어쩌면 순탄하지 않았겠다 짐작하게 한다. 
 
세피데는 자신과는 다르게 엘리가 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길 바랐던 것일까. 약혼자가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엘리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길 바랐고 남과는 좀 달라 보였던, 그들 중 유일하게 새 삶을 위해 독일로 떠날 수 있었던 아흐마드라면 엘리와 어울릴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엘리의 약혼자를 테헤란에서 데려오면서 영화는 결말로 치닫는다. 마치 언제 어디에도 없었던 사람처럼 엘리는 이제는 정말 없는 사람이 되어 시신으로 돌아온다. 잘못을 들키기까지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다 밝혀지고 나서 선택의 여지없이 혼날 일만 남은 사람들, 따지고 보면 우린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 휴가를 망쳤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은근한 안도와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임을 아주 이성적으로 인지한 사람이 만난다.

엘리는 죽었지만 모든 것은 순조롭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 보인다. 약혼녀를 잃었지만 남자의 표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표정 같지 않다. 마치 좁은 어항에 떠오른 죽어 금붕어 한 마리를 건져내듯 담담하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원래부터 좋아하던 사람과 결혼하거나 홀가분하게 또 다른 신붓감을 찾을지도 모른다. 아흐마드와 엘리는 아직 절절한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깊은 감정도 나누지 않았다. 이들 중 그 누구도 그 죽음을 깊이 슬퍼할 만큼의 인연을 만들지 못했다. 
 
엘리는 다른 아이들이 해변에서 연을 날리는 것을 도와주는 장면을 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꼬인 실을 풀자마자 훨훨 나는 연과 함께 아이같이 웃으며 달린다. 엘리가 아이를 구하러 바다에 들어갔다가 정말 그렇게 휩쓸려버린 거라면 아이에게 영영 닿을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의 절망적인 엘리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단순히 스릴 때문이 아니라 아마 세피데가 바라던 엘리의 표정, 세피데 자신이 짓고 싶어 하는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속에서 환호하던 세피데의 웃음만큼 그들의 여행이 행복하게 끝나길 바랐던 우리의 마음처럼, 진짜 웃음에 참으로 인색한 감독이란 것을 우리는 이미 알기 때문이다. 



 
 
카스피해는 왠지 잔잔하고 평화롭고 따뜻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전작의 불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인상적이었다.

엘리와 아흐마드는 7년 후 감독의 다른 작품 <Salesman>에서 결국 부부가 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들이 또 다른 곤경에 빠질 거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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