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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Beautiful city (2004)

 

알라와 피루제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첫 작품의 느낌상 왠지 이 제목이 미심쩍고 간혹 원제가 정말 뚱딴지같은 경우도 자주 있으니 찾아봤더니 실제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을 가진 테헤란 근교의 '샤흐레 지바'라는 동네라고 한다.

샤흐레 지바의 소년원에 수감 중인 아크바르는 16살에 여자친구를 살해한 죄로 소년원에 들어왔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여자친구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란에서 사형집행이 가능한 나이는 18살. 교도소 친구 알라(Babak Ansari)는 그것도 모르고 아크바르의 18살 생일 이벤트를 열고 아크바르는 성인 교도소로 옮겨진다.

아크바르는 영화 초반 소년원씬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문제들은 교도소 밖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진다. 예정된 죽음을 앞둔 그는 누구보다 고통받으며 충분히 반성하고 속죄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하는 사람과 그렇다고 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람의 입장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그곳은 한편으론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또 다른 감옥이다.


철회해주세요.

 

이슬람 율법의 사형 유형 중에는 '키사스'라고 불리는 일종의 피해자의 보복 권리가 있다. 그런데 또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며 사형집행을 철회할 수도 있다. 복수의 권리는 정의 실현으로 보지만 죄를 용서하는 자비를 더 높은 차원의 가치로보고 그로 인해 더 큰 영적 성숙에 이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그 보복권리를 선택하지 않으면 가해자는 피해자 가족에게  '디야'라고 하는 '블러드 머니'를 지급해야 한다. 감독의 가장 최근작 <Hero>에서는 가해자 가족이 그 돈을 낼 여력이 없자 심지어 자선단체가 대신 지급하면서 사형을 면한다. 그런데 피해자가 여성일 경우엔 그 지불액이 또 남성 피해자의 절반이다. 용서를 통한 선의 실현은 얼핏 들으면 나름 일리 있어 보이지만 내가 만약 사건 당사자라고 하면 어떤 입장에서도 참 난해한 논리이다.



딸이 죽은것은 안타깝지만 제 동생은 충분히 뉘우쳤을겁니다.

 

남동생이 중대죄를 졌지만 누나 피루제(Taraneh Alidoosti)는 용서받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없는 살림에 과일이며 이것저것을 잔뜩 사들고 끊임없이 피해자 아빠를 찾아간다. 절도죄로 수감됐던 친구 알라는 아크바르 해방이라는 임무를 쥐고 기한보다 일찍 출소한다. 교도관도 그런 알라에게 행운을 빈다. 알라는 피루제를 도와 피해자 가족을 설득하는데 합세하는 과정에서 피루제와 사랑에 빠진다. 
 
 

죄를 진건 제가 아닙니다.

 
 
 죽은 아내를 닮은 하나뿐인 딸마저 잃은 아버지 아볼카셈(Faramarz Gharibian)은 선처를 베풀고 싶지 않다. 가해자 가족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진행시키고 싶은 아볼카셈을 기다리는 상황은 더 어처구니가 없다. 피해자 가족이 구명을 원하는데도 사형을 감행하려면 그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게 당연하지만 용서를 독려하는 구조속에서는 형집행으로 결국 누군가가 죽게 되니 돈을 내야 한다. 그나마 여자인 딸이 죽었으니 그 액수는 절반이다. 동네 이맘까지 나서서 쿠란의 구절을 읊으며 용서를 권장한다. 아볼카셈은 이 모든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았겠습니까.

 

아볼카셈은 재혼으로 얻은 아내와 그 아내가 데려온 장애인 딸과 함께 산다. 아내는 가해자가 주겠다는 디야를 받고 사형집행을 철회하고 딸의 병원 치료비를 마련하자고 애원한다. 하지만 남자는 집을 팔아서라도 배상금을 마련하고 결국 형을 집행하고 싶어 한다. 

 

또 하나의 영정사진은 당신 개인의 복수심만 충족할 뿐입니다.

 

이 영화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빠지는 도덕적 딜레마를 담담하게 보여주는데 그 상황에 보다 몰입하게 해주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특징이 나오기 시작한다. 여러 작품에 걸쳐 같은 배우를 써서 주인공들은 늘 유사한 상황 속에서 다른 입장에 놓인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여전히 재밌게 볼 수 있는 이유와 비슷하다. 영화 전면에 서있던 사람이 갑자기 주변인으로 물러나면서 구경꾼처럼 바뀌고 옆에서 이래저래 훈수를 두고 삐죽거리던 사람이 다른 영화에서는 문제의 장본인이 된다. 배우들은 언젠가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고 입장이 달라진 주인공들을 보면서 관객은 계속 또 다른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번의 내 얘기도 맞고 네 얘기도 맞고 그와 그녀의 얘기도 맞으니 가장 올바르고 맞다고 생각했던 내 얘기로 돌아와도 혼란이 생긴다. 

결국 내가 죽어야 끝나는 것인가.


<Dancing in the dust>(https://ashland.tistory.com/m/559036) 에서 치정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탈옥을 한 뱀잡이 남자가 이 영화에선 죽은 딸의 아버지로 나온다. 전작에선 여자 때문에 남자를 죽인 것처럼 나오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어쩌면 그가 살해한 사람은 사랑했던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사랑했지만 이혼을 하고 빚쟁이가 되어 뱀을 잡겠다는 어린 나자르를 애써 외면하던 그 뱀장수의 얼굴에 마치 그의 딸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다 결국 그 딸을 살해하고 마는 아크바르를 떠올렸을지 모를 아볼카셈의 표정이 겹쳐진다. 어쩌면 그 자신이 언젠가 아크바르였고 또 나자르였던 것 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랑꾼 알라

 
 
피루제는 남편과 함께 살고 아이도 있지만 가정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 때문에 이혼상태이다. 하지만 남편 없는 여자가 겪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반지를 끼고 아직 결혼한 여자처럼 행세한다. 그런 피루제와 알라는 가까워지고 알라는 피루제를 위해 아크바르의 배상금을 마련하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
 
하지만 아픈 딸을 가진 아볼카셈의 아내는 이들이 당장 배상금을 내기 여의치 않다면 알라가 건실한 청년 같은데 자신의 장애인 딸과 결혼하게 하는 게 어떠냐며 피루제에게 제안한다. 살인 보상금 디야를 결혼할때 남편측이 줘야하는 마흐르로 받겠다는 것이다. 피루제로써는 동생도 구하고 배상금도 해결할 수 있게 되지만 알라와의 미래를 포기하게 되니 그것은 결국 알라의 선택에 남겨진다.
 

내가 너라면 너가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알라는 뱀에 물린 손가락을 치료하고 결국 돈을 들고 레이하네를 찾아간 사랑꾼 나자르를 여러 면에서 떠올리게 한다. 나자르를 생각하고 나서 그를 보면 그는 결국 장애인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돈 때문에라도 결혼을 선택했을 것 같다. 하지만 출소한 아크바르와 피루제와 조우해서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도 그려보게 된다.
 
 

결국 모든게 너에게 달렸다.

 

영화는 살해를 한 사람의 과실보다는 어쨌든 한 사람이 베풀 수 없는 자비로 인해  고통받는 여러 사람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데에 좀 더 집중한다. 그러니 기어코 사형을 고집하는 아볼카셈은 알게 모르게 무자비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런 주변의 압력을 통해서 그가 마음을 바꾸고 복수의 권리를 포기한들 과연 그것이 진정한 자비의 실현일지는 의문이다. 그러니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용서를 실현하느니 복수를 하고 차라리 신의 심판에 놓이겠다는 그의 태도도 이해의 여지를 남긴다.

아볼카셈을 괴롭히는 것은 죽어서조차 남성보다 디야 금액이 절반뿐인 딸의 죽음의 무게이고 피해자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가해자의 태도와 그것에 힘을 실어주는 사회이다. 
 
 어쩌면 아볼카셈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선은 사형도 철회하고 배상금도 받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런 대안은 그 누구도 쉽게 강요하지 못한다. 딸을 잃었는데 갑자기 최고선을 실현해야 할 입장에 놓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당하다.

만약 아볼카셈이 실현할 선의 결과를 그런대로 예측해본다면 아크바르는 풀려나고 피루제와 알라는 결혼하고 평생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며 참회의 뜻으로 장애인 여인의 치료비도 마련해주고 돈까지 거절하고 용서를 행한 아볼카셈은 평생 존경받으며 딸의 자취가 남아있는 집에서 살다가 고귀한 죽음을 맞이하는것일까. 그것은 용서만이 복수의 고리를 끊고 참된 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 가진 환상일지 모른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결국 인간이기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산 자의 위선이 있고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한편으론 인간성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우리가 그토록 믿는 신의 보상에 대한 불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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