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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3.01 바이킹스 시즌 6을 기다리며 잡담
  3. 2019.02.26 The hunt (2012)
  4. 2019.02.21 Lost in Paris (2016)
  5. 2019.02.20 La melodie (2017)
Film2019.03.18 20:43


내가 본 대부분의 제니퍼 코넬리의 영화는 참 우울했다. 그렇기때문에 굳이 그의 영화라면 찾아보는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며 21그램에서의 나오미 왓츠 역을 제니퍼 코넬리가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한때 두 아이의 엄마였던 나나 쿠닝은 불치병을 앓던 둘째 아들을 사고로 잃고 첫째 아들은 할아버지에게 맡겨둔채 극지방으로 떠난다. 자연 치유사로서의 스스로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를 돕고자 하지만 자신의 아들은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 상실감으로부터도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아픈 동생으로 인해 항상 희생을 강요받았던 남겨진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마와의 이별은 가혹하다. 다행히 그는 사냥용 매를 조련하는 할아버지와 자라나고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엄마에게 받은 상처는 그대로 지닌채이다. 이 영화는 20년동안 떨어져 살던 모자의 만남과 자연 치유로 유명해진 나나 쿠닝을 취재하고 싶다는 목적으로 그들을 만나게 해주는 연결자가 되면서 스스로의 병도 치유받고자 하는 프랑스 여기자의 이야기이다. 황량하고 척박한 극지방에서 투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닥친 불행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극복해보려고 하는 어떤 사람들, 조금만 더 걸어가면 갈라져버릴 것 같은 얼음 바다이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삶이기에 결국 선택지 없이 얼음 바다위를 하루하루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때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잘 만들었다, 멋있다 생각하며 그냥 그 느낌 자체에 반하고는 했지만 이제는 이런 우울한 영화는 보기가 좀 힘들다. 스릴러물도 아닌데 보는 내내 몹시 불안했고 보고나서도 시리고 어두운 여운이 잔뜩 남는다. 드라마를 보며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며 긴장을 풀 수 없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어쩌면 타인의 불행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데에서 오는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나에게도 충분히 닥칠 수 있는 불행이었고 단지 나를 간신히 비켜간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더 그렇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저렇게 됐고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거라고 자신의 삶을 넘어 타인의 불행까지 설명하는데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설명에 힘을 쏟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이는것을 좀 더 수월하게 하기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불행의 인과 관계에 집착하는 것은 그런 불행히 나를 비껴간것은 내가 좀 더 잘나서 잘 대처했기때문이라는 오만한 생각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왜? 왜 굳이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나 라고 절규하는 어떤 영화 속 인물들, 그들의 행동들을 열거하며 무엇이 그들을 비극으로 몰고가는지를 나름 논리적으로 묘사하지만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고 나면 함부로 말하기 힘들어진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거야 라는 생각으로 타인에게 엄격했던 순간들, 제니퍼 코넬리의 눈물이 생각나면서 다시 조금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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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9.03.01 07:00



3일 간의 짧았던 베르겐 여행.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웠던 베르겐의 기운이 아직 콧잔등에 남아있는 채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보기 시작한 히스토리 채널 드라마 바이킹. 베르겐의 날씨, 하이킹하는 동안 밟았던 이끼 낀 바위산 그리고 어둑어둑해지는 평평한 산 정상으로 불어오던 날카로운 바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생각났다. 실제로 얕은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베르겐은 드라마의 배경이자 인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노르웨이의 군소 왕국의 지배자들도 호시탐탐 노리는 노르웨이 바이킹의 거점 도시, 카테가트와 거의 동일했다. 베르겐은 13세기에 노르웨이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보다 훨씬 이전의 바이킹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부터 수백 척의 배들이 그 항만을 빠져나가 지금의 영국으로 프랑스로 발트해 연안에 닿았을것이다. 때로는 보물과 식량을 가득 채워 돌아오기도 했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침몰했고 처절하게 참패하여 칼을 갈며 돌아오기도 했을거다. 3일의 기억을 5년 가까이 붙들고 붙들어서 연장시켜 준 드라마가 5년을 잘 버티고 이제 시즌 5를 막 끝냈다. 포스터 속의 배우들은 대견하게도 전부 살아 남았다. 베르겐에서 마주친 노르웨이 남성들은 유치원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이거나 유모차를 끌고 있는 평화로운 표정의 남성들이 많았다. 북유럽 복지 특집 다큐멘터리에 나올법한 그런 남자들말이다. 훤칠하고 우락부락한 선술집의 단골 말썽장이 같은 모습을 상상했던건지 그런 온화한 모습들은 사실 의외였다. 베르겐의 언덕 지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조깅을 하고 있는 여성들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검과 방패를 들고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약탈 나서는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이 오히려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평일 낮의 바깥에서 본 몇몇 사람들의 모습을 가지고 노르웨이 사람들, 나아가서 북유럽의 바이킹 후손들 전부를 특징 지을 수 없겠지만 어찌됐든 계속 떠올리며 연결지을수 밖에 없었다. 가톨릭 개종 훨씬 이전 리투아니아가 야만한 이교도의 나라라고 불리우던 때조차 이웃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빌니우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에도 언젠가 발트해 연안에 숨어들어 뿌리를 내린 바이킹들의 후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증이 필요했을 의상들과 세트 제작, 국적이 다른 배우들이 쏟아내는 각기 다른 영어 발음이나 특유의 액센트 같은 것들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 라그나와 아들들만해도 국적이 가지각색이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출신 배우들은 그런 느낌의 배우들만을 캐스팅했다손 치더라도 확실히 영미권 배우들과는 이미지 자체가 달라서 같은 백인이지만 그들 간의 차이를 비교하며 보는 것도 재미있다. 바이킹과 그들이 점령하려는 카톨릭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기본 토대를 이루지만 결국 바이킹 자신을 단합하게 하고 또 분열하게 하는 것은 노르웨이의 왕과 카테가트를 차지 하기 위한 이 형제들간의 싸움이다. 아버지 라그나의 강력한 통치력을 교과서 삼아 노르웨이를 통일하고 나아가 더 넓은 세상으로의 번영을 모두가 꿈꾼다. 어떤 아들이 좀 더 라그나에 가깝고 누가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아버지를 완전히 빼다박은 아들은 사실상 없지만 모두가 조금씩은 그를 닮았다. 타종교에 대한 관대함과 용맹함, 전술력, 선견지명등 그 아버지가 통치자로써 지녔던 모든 것을 그들은 전부 나눠가졌다. 전부 뭉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바이킹 족의 격언인가. 시즌 1에서 바로 죽어버리는 왕을 가브리엘 번 같은 알려진 배우로 기용한다던가 라그나의 막내 아들을 핸디캡을 지닌 핵심 인물로 설정하는 것 등이 왕좌의 게임 시즌 1에서 뜻밖에 죽어버리는 숀 빈이나 난장이 피터 딘클리지의 경우와 비슷해서 이 두 드라마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척박하고 춥고 거친 풍경들과 그런 조건들을 극복하며 살고 싸우고 하는 모습들도 제법 그럴듯하게 묘사된다. 그런 이유로 왕좌의 게임에서도 킹스랜딩이나 메렌, 브라보스 같은 온화한 기후를 지닌 화려한 풍경의 왕국보다는 무채색의 어둠과 눈보라가 지배하는 윈터펠이나 블랙캐슬 부분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언어와 민족, 시대 또한 다르지만 결국 같은 패턴과 같은 이치로 맞물려 있는 많은 이야기들, 지금이나 그때나 결국 사람 사는건 다 똑같구나, 저기 화면 끄트머리에서 물동이를 들고 볏짚을 짊어 지고 다니는 수많은 엑스트라들의 인생도 마냥 편하진 않았겠지만 권력을 지닌 인간들의 삶은 어쩌면 참 처절하고 피곤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종교를 논하지 않고선 성립될 수 없는 시대. 지금도 어쩌면 그 보이지 않는 권력에 휘둘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교황의 이틀 방문에 수십억을 쏟아 부어야하는 이 동네에서라면. 생각해보면 전염병이 난무하고 화재로 온 마을이 불타는 시대, 내 목숨이 주인의 손아귀에 달려있는 시대에 살았다면 정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신 밖에 없었겠다 싶다. 개종을 빌미로 한 침략과 단지 섬기는 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졌을 무자비한 살상, 심지어 뿌리가 같은 종교 속에서도 나뉘고 또 나뉘는 종파들 간의 배척과 반목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본성을 목도하게 된다. 드라마 속에서 바이킹들은 지금의 영국이나 프랑스등으로 진출하며 그들만의 종교와 신념을 수호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전략적으로 개종을 한다. 때로는 종교와 종족을 초월해서 끈끈한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심지어 형제 간에도 칼로 잔인하게 목을 가르고 나서 '전혀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그래, 내가 너였어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야' 라는 식의 장면들이 많다. 거의 토너먼트처럼 약한 동족을 누르고 살아남은 강한 자들만이 노를 저어 정복에 나설 수 있었던 그들의 생리는 저건 잔뜩 미화된 드라마에 불과해 라고 무릎을 바늘로 찌르면서 봐도 약간 좀 멋있다. 바이킹들이 신처럼 섬기는 라그나의 동생으로 항상 이인자로 남다가 종국에는 프랑스로 항해해서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공주와 결혼해서 왕족이 되는 노르만족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의 허접한 불어를 순순하게 인정하는 저 분. 바이킹은 기후 변화로 빙하가 녹하서 항해 조건이 나빠져서 몰락했다고 하는데 드라마 곳곳에 토속신앙에 집착하고 원시적인 무기로 싸우는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에 대한 묘사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거의 새총과 비슷한 것들을 들고와서 전투에 동맹군으로 참여하는 핀란드의 사미족이 가장 좋은 예. 그리고 그들은 이 프랑스 삼촌이 끌고 오는 프랑스 군대의 선진 군사 기술과 전략에 무참히 짓밟힌다. 이것은 좀 더 비옥한 땅,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은 욕구에 목말랐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살인과 약탈이 묵인될 수 있는것일까.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너네가 먼저 할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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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9.02.26 07:00


The hunt_Thomas Vinterberg_2012


이런 영화를 보고 났을때 가장 기분이 좋다. 우연히 보게 됐는데 생각지도 못한 긴장감으로 눈을 뗄 수 없을때, 보고 나서도 한참동안 여운이 남아서 계속 생각하게 될때, 그러다가 곧 잘 꿈도 꾸게 하는 영화들. 우습게도 얼마전에 빌니우스 거리에 사슴 네 마리가 무리지어 뛰어 가는 꿈을 꾼 것은 아마도 매우 이 영화 때문일거다. 물론 포스터 속에 매즈 미켈슨이 아니라 모르는 배우의 얼굴이 있었다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결국 배우의 힘이 가장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의미하는 표정일까. 어떤 장면일까. 고아로 태어나 용병으로 길러진 슬픈 남자의 이야기인가. 거대한 권력에 철저하게 이용당하다 피를 흘리며 터벅터벅 어두운 아파트로 돌아와 위스키 병 마개를 열곤하던 고독한 스파이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헐리우드라면 이런 눈빛의 매즈 미켈슨을 충분히 그런식으로 소모하고도 남을테니. 이 영화가 특히 좋았던것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매즈 미켈슨이 아니라 덴마크 감독의 덴마크 영화 속에서 덴마크어를 하는 매즈 미켈슨이라서. 그리고 겨울을 좋아하다보니 이런 추운 지방의 일상적인 추위가 자연스럽게 묘사되는 영화들이 너무 좋다. 영화의 배경은 덴마크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각자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은 지금도 여전히 함께 사냥을 나가고 저녁이면 그들만의 지하 아지트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옛날 이야기를 하는 어떤 남자들이 나온다. 오랫동안 감기를 앓다가 감기가 다 나아서 마트에 가면 계산원이 감기에 걸렸었다면서요? 하고 물어볼 것 같은, 개개인의 가정사와 일상이 여과없이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작고도 정겹지만 한편으로는 폐쇄적인 마을이다. 점점 줄어드는 인구로 초등학교마저 문을 닫고 주인공 루카스는 자연스레 교사직을 잃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다. 이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아들을 만나는 날을 정하는데 있어서도 전부인과 큰 말다툼을 해야 하는 상황. 덴마크의 기후는 끝도 없이 차갑고 어두우며 혼자가 된 그의 집은 휑하기만 하다. 그나마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정성을 다해 놀아 주는 일상이 그를 겨우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 딸의 엉뚱한 행동으로 그의 인생은 하루 아침에 엉망이 된다. 친절하고 온화한 루카스를 평소부터 잘 따르던 친구의 딸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구슬로 만든 하트를 선물하고 이것은 나보다는 다른 남자 아이나 부모님한테 주는게 좋을 것 같다는 루카스의 말에 조금 토라졌을 클라라가 루카스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유치원 원장에게 말하는 것이 그 발단이다. 원장은 그 이유를 묻고 클라라는 엉뚱하게도 루카스의 중요 부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클라라는 그것을 본 적이 없고 모든 것이 클라라의 초등학생 오빠가 스쳐지나가며 장난으로 보여준 포르노의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모방과 상상에 불과하다. 루카스는 순식간에 친구의 딸을 성추행한 파렴치한이 된다. 출근길에 친구의 딸을 손수 유치원까지 데려다 주던 그의 친절함은 그를 완벽하게 범죄자로 몰고간다. 물증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심증만이 지배하는 마녀 사냥. 결국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루카스의 범죄 행위를 기정 사실화 해가는 어른들의 행동이다. 원장은 모든 학부모들을 초대해서 최근들어 아이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아이들이 자다가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행동들이 루카스의 범죄를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둔갑한다. 유치원 원장은 치를 떨며 루카스와는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는다. 유치원에 초대된 정신 감정가에게 클라라는 결국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하지만 어른들은 그것이 놀란 클라라가 무서웠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거의 향숙이 예뻤다에 귀신이 씌인 사람처럼 유도 질문을 한다. 당연히 절친들과의 관계는 틀어진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이 그를 믿어주는 아들과 그의 일부 친구들이다. 루카스는 결국 무죄로 풀려나지만 그는 이미 직업을 잃었고 그의 존재와 정체성은 이미 철저히 사냥당한 후이다. 그는 마트에서 물건을 사려다 두들겨 맞는다. 누군가는 그의 창문에 한밤중에 돌을 던진다. 그의 애완견은 죽임을 당한다. 아동 실종이나 아동 성범죄에 관한 영화가 의외로 참 많다. 무슨 이유로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납치하고 납치한 후에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살아 돌아오는 아이 혹은 그렇지 않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은 어떤가에 대한 영화들. 그 영화들 속에서 치밀하고도 설득력있게 묘사되던 범죄자를 추적하는 과정들이 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모두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항상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틀렸음을 인정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인해 우리는 더 큰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휩쓸려 믿고 지나가는 것들이 과연 진실일까. 심지어 나도 그 누구도 루카스와 같은 희생양이 되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누군가를 루카스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갈 어리석은 다수의 입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루카스가 왜 좀 더 적극적으로 결백을 입증하지 않을까 답답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그가 사력을 다해 결백을 입증했을 드라마틱한 순간들은 오히려 화면 밖으로 철저히 숨겨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해 유령처럼 변해가는 그의 모습만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많이 애쓴것 같다. 루카스는 만취 상태에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러 대부분의 주민이 모일 마을 교회로 향한다. 포스터 속의 모습은 교회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절규하며 뒤를 돌아 친구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것은 적막에 휩싸인 눈덮힌 숲 속에 철저하게 고립된 겁에 질린 사슴의 눈빛인지도 모른다. 운좋게 총알이 빗겨나가면 사슴은 도망이라도 가겠지만 말과 불신으로 입은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클라라의 아빠는 루카스의 저 눈빛을 보고 더 이상의 총질을 거두고 화해를 청하러 그의 집을 찾아간다. 그럼 이제부터 그는 만나는 사람 사람마다 붙잡고 루카스의 결백을 입증하러 다녀야할까. 그렇게 하면 루카스가 받은 상처는 치유될까. 루카스의 아들이 사냥 허가증을 받은 날 그들은 모두 함께 사냥에 나선다. 그리고 숲 속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루카스를 향한 총성. 그것은 여전히 그를 불신하는 누군가의 분노일수도 있고 자신의 판단이 실수 였음을 인정할 수 없는 그릇된 자존심에서 비롯된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직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경고음이다. 최소한 루카스 그 개인의 인생에서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무방비 상태의 무기력한 매즈 미켈슨의 독보적 눈빛을 감상하는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영화이다. 사실 그가 국제적으로 알려진데에 미드 한니발이 한 몫 했지만 안소니 홉킨스가 구축한 잔혹한 렉터 박사의 원형도 명랑한 식인종은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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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9.02.21 21:06



좀 더 이전에 본 파리 배경의 영화 한 편 더. 에펠 탑 위의 이들은 캐나다인 사서 피오나와 그녀의 이모 마르타 그리고 파리의 노숙자 돔이다. 피오나는 파리에 사는 이모 마르타로부터 엽서 한 통을 받고 배낭 하나를 달랑 짊어지고 이모를 찾아 파리에 도착한다. 마르타는 피오나가 아주 어렸을때 파리를 꿈꾸며 이민을 왔고 이제는 보호자도 없는 고령의 노인이 되어 요양 시설에 보내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녀는 피오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비록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이지만 시설에 옮겨져서 지금껏 누려온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피오나가 배낭과 함께 센 강에 빠지면서 모든 일이 꼬인다. 그리고 그 배낭을 파리의 노숙자 돔이 발견하면서 그들은 연결된다. 돔은 센 강변의 텐트 속에 살며 쓰레기 통에서 주운 파프리카를 강변의 사각 맨홀을 그릴 삼아 구워 먹는다. 배낭을 건진 돔은 피오나의 옷이며 가방은 물론이고 그녀의 돈까지 쓴다. 그리고 그들은 센 강의 선상 레스토랑에서 만난다. 그리고 마르타를 함께 찾아나서게 된다. 피오나와 돔을 연기한 피오나 고든과 도미니크 아벨은 오랫동안 많은 영화를 함께 연출한 파트너이다. 내가 처음으로 본 그들의 영화는 룸바(rumba) 였다. 이렇듯 그들은 춤을 사랑한다. 돔의 좁은 텐트 속에 붙어있는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영화 룸바는 잔혹한 블랙 코미디였다. 집이 불에 타서 홀라당 날아가 버린다든가 다리가 잘려 나가는 등의 극단적인 상황들이 아무런 대사도 표정도 없이 오로지 무용적 요소들로 무덤덤하게 연결되는 것을 보며 연출자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룸바와 비교했을때 이 영화는 대사도 훨씬 많아졌고 기존의 영화 문법에 좀 더 충실해졌지만 여전히 시니컬하고 연극 무대를 화면에 옮겨 온듯한 느낌 또한 여전히 강하다. 도서관 문이 열려 스티로폼 같은 인공 눈이 음향과 함께 몰아 닥치면 배우들이 의자를 뒤로 움직여 불어닥치는 바람을 표현한다든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종업원이 움직이는 스피커의 베이스 사운드에 맞춰 포크과 나이프를 든채 어깨를 들썩거린다든가 하는 장면이 그렇다. 스피커가 저쪽으로 옮겨가면 방금 전까지 어깨를 움직이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또 칼질을 시작하는 식이다. 에펠탑 위에서의 사다리 퍼포먼스도 그렇다. 에펠탑 위의 사다리라니 그 아슬아슬함을 표현하는데에 겁에 질린 표정이나 괴성은 필요없다. 그냥 무대 위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무용수들처럼 침착하게 움직인다. 영화 속의 모든 비논리적인 움직임들은 보는 이에게도 뜻밖의 자유를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두 발로 이 도시를 얌전하게 걸어다니는 것이 참 지루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느껴질 정도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발을 구르면서 양말을 찾고 싶어진다. 자잘하고 재기발랄한 움직임으로 가득한 영화들이지만 라라랜드처럼 장면 하나를 완전히 장악하는 카리스마 있는 화려한 퍼포먼스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움직임은 하나의 이음새 역할을 하고 장면들은 하나의 프레임 속에 한정된다. 주어진 예산과 한정된 소품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이들은 얼마나 머리를 싸맸어야 했을까. 결과적으로 그것은 누구도 따라하기 힘든 코미디, 그들만의 영화 세계가 되었다. 한 두 편의 영화를 더 보고 나면 이제는 그들의 판타지에도 익숙해질지도 모르지만. 뉴욕이 배경이었던 영화 '5 to 7' (https://ashland11.com/662) 에서 주인공 브라이언이 아마도 그랬다. 뉴욕에서 20 발자국만 걸으면 아는 사람 혹은 알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고. 파리 사람들도 아마 깊게 공감할 문장이다.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과 그런 그들을 완벽하게 포용하는 도시들이 있다. 그런 도시들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누구든 마음에 드는 거리 한 블럭 정도는 지니고 있을테니. 한 블럭의 거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20 발자국도 못벗어나서 누군가과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욕이라면 파리에서 길을 잃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연결된 전화 통화속에서 마르타는 피오나에게 지금 뉴욕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마르타와 피오나는 오래 전 파리의 미국인 이민자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세워 놓은 센 강의 시뉴 섬에서 조우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억속에 파리에서 길을 잃는 마르타의 이야기이다. 사회 복지사의 방문을 피해 집밖으로 뛰쳐나온 마르타를 따라 우리는 마르타의 생애가 녹아있는 파리를 여행한다. 옛 연인 노먼과 함께 페르라셰즈 묘지 벤치에 앉아 춤을 추는 모습, 돔을 만나 샴페인을 마시고 왈츠를 추며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 마르타를 찾는 도중 피오나가 마주치고 스치는 모든 풍경들이 결과적으로는 젊은 시절의 마르타가 기억하는 파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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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Film2019.02.20 21:19


La melodie_Rachid hami_2017


영화를 보고 나서 제목이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점점 잦아 진다. 최근 들어서 부쩍 자주 그러는듯. 심지어 배우나 감독 이름을 몰라서 영영 기억해내지 못하는 영화가 있을 정도. 영화 내용을 대충 적었을 때 검색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학창시절에는 영화를 보고나면 작은 수첩에 기본 정보 정도는 기록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때처럼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조차 잊고마니 우스울 뿐이다. 가끔 보는 프랑스 영화들은 특히나 배우나 감독의 불어 이름들이 입에 붙지 않아서 기억하는데에 더 애를 먹는다. 이렇게 한 번 정도 쓰면서 되새겨보는 이 영화는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파리의 초등학교 음악 수업에 강사로 초대 받는 어떤 바이올린 연주자. 얄미울 정도로 짖궂고 건방진 아이들에게서 그래도 말썽부릴 에너지와 의지라도 느껴지지만 이 음악 교사는 이미 너무 무기력하다. 연습실이 누전으로 불에 타버려 아파트 옥상에 모여 같이 연습을 한다거나 부모들 스스로 십시일반 연습실을 만드는 등의 드라마를 보여주며 활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아이들이 결국 커다란 무대에서 멋진 공연을 하는 것으로 부랴부랴 결론을 맺긴 하지만 감독 자신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드라마와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을 지닌 비판적 이야기 사이에서 어디에 좀 더 비중을 둬야할지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등장하지만 스쿨 오브 락에서의 잭 블랙의 패기나 유치원에 가서 좌충우돌하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특유의 카리스마로 학생들을 휘어 잡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 같은 캐릭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https://ashland11.com/166)이나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와 같은 어둡고 무거운 영화들을 보고 자란 감독이 노골적이고 불안한 선배들의 카메라 앵글을 연습하며 클래식 음악과 아이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말랑말랑하게 프랑스 사회의 분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차라리 음악 부분을 더 강조했다거나 더 탄탄하고 무기력한 갈등 구조를 만들었으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뭔가 아슬아슬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을 주다가도 결국 여러 번 봄직한 온화한 이야기들로 급하게 끝이 나서 조금 아쉬웠다. 영화의 배경은 아마도 이민자들이 주를 이루는 중하층민들이 몰려 사는 동네의 학교일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조금 더 많은 문화적 혜택을 주려고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수업이지만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별로 흥미가 없고 집에서는 바이올린 연습 소리가 시끄럽다고 타박을 하는 것이 부모의 문화적 수준이다. 아이들은 중년의 바이올린 교사가 자기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소통하지 못한다. 바이올린 교사가 알제리인 아빠와 프랑스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되자 노르망디 사람인 줄 알았다고 놀라워 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순간 그들은 일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많은 이들이 파리의 에펠탑을 보려고 모여든다. 허름한 아파트여도 최소한 집에서 에펠탑이 보이는 위치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 일종의 자조섞인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에펠탑이 어떤 무소불위의 원심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느껴진다. 마티유 카소비츠가 증오를 만든지 20여년이 지났는데 이 영화는 심지어 증오에 나온 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 분명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고 있고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계속 겉도는 모습을 비추며 과연 20년이란 시간동안 우리는 어떤 변화를 이끌어 냈는가 자문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 명의  지휘자와 100명이 넘는 연주자가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에서 서로 다른 악기들과 사람들이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1/3이나 차지하는 바이올린 파트만 딱 떼어놓고 봐도 그렇다. 같은 악기, 같은 악보를 보는 사람들에게서도 항상 완벽한 화음을 기대하긴 어려울거다. 아이들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어쩌면 아이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공통적으로 구사하는 프랑스어 같다. 때로는 철자를 틀리기도 한다. 미세한 억양도 다르겠지. 집에서는 코티드부아르의 음식을 먹고 유명한 축구 선수의 이름으로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정도만 환기시킬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같은 언어를 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사실이 완벽한 화합과 상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낯선 나라의 이방인으로 그 나라 국민들과 같은 말을 쓰며 더불어 산다는 것의 안락함과 따스함을 몸소 체험하고 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가늠해보는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만약 마트 계산대 앞에서 나에게 감자를 던지며 너네 나라로 가라고 한다면 정말 참담할 것이다. 한국에 속속들이 발을 들여놓고 있는 어떤 이방인들과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어떤 아이들의 미래가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에 겹쳐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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