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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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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13구 (2021) 오래전 파리여행 때 파리 5구에서 지냈었다. 자연사 박물관이 있었던 집에서 나와 작은 구멍가게 같았던 카르푸와 꽤 삼엄한 모스크와 바그다드 카페를 지나 아랍 인스티튜트가 나오던 길과 팡테옹과 소르본에서 뤽상부르 공원으로 이어지던 동선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지하철 5호선이 지나가는 생마르셀역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었지만 마침 공사 중이어서 버스를 타거나 두 정거장 떨어진 플라스 디탈리역을 꽤나 자주 이용했는데 아마 이 역이 환승역이어서 그랬을 거다. 버스를 타기 싫거나 조금 걷고 싶으면 보통 이 이탈리아 광장 쪽으로 걷곤 했다. 그렇게 걷다가 고층 건물들을 지나 어쩌다 미테랑 도서관을 발견했고 센강변에 다다랐다. 숫자로 구가 표시된 파리의 시티맵은 참 재밌는 지도였다. 지도를 보기 전까진 노..
가솔린 레인보우 (2023) 로스 브라더스의 는 여러 로드무비를 떠올리게 한다. https://ashland.tistory.com/559005와 그리고 , 바다를 보러 간다는 데에서 어쩌면 까지. 외형이 닮지 않아도 왠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내밀함이 이들 사이에는 있다. 정서적인 염기서열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여정들은 다른 듯 비슷하게 대체로 허무하고 쓸쓸하다. 의 윌리와 에디가 황량한 기차선로 위에서 나누는 클래식한 대화를 보자. "이상하지 않아? 새로운 곳에 왔는데도 어딜 가나 똑같잖아."."닥쳐". 뉴욕을 떠나 클리블랜드를 거쳐 플로리다를 향하는 그들의 여정이 그랬다. 여행은 늘 그 길에 발을 들여놔야 그제야 무엇을 꿈꾸며 떠나왔는지를 다시 되묻게 하는 아주 고약한 버릇을 가진 놈이니깐...
화이트 갓 (2014) 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의 최신작 가 어제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개됐단다. 나중에 베를린에 가면 반드시 영화제 기간에 한번 가봐야겠다. 은 https://ashland.tistory.com/559062 의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의 더 이전 작품. 널찍널찍한 부다페스트의 거리를 구경하는 재미와 넘사벽 헝가리어를 듣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영어권 감독들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하면 아예 미국에 가서 영화를 찍는다는 게 좀 아쉽다. 트럼펫을 부는 이혼 가정의 열두 살 소녀 릴리(Zsófia Psotta)와 그녀의 개 하겐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배경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잡종견에게 특별세가 부과되는 이상한 정책이 시행되는 곳이다. 사람들은 잡종견은 물론 견주조차도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현실적..
뉘른베르크 (2025) 독일 독수리(https://ashland.tistory.com/559076) 하면 사실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가 생각나고 루프트바페 하면 창설자이자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무시무시한 일을 벌인 전범에 불과하고 사형을 선고받고 자살하지만 이 약쟁이 사령관 자체는 솔직히 말해서 재밌다고 말하면 안 되지만 재밌는 게 사실이다. 나치 전범들은 세상에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 일을 저지르는 과정들을 기록해 놓은 많은 글들 속에서의 그들은 출근해서 자기들끼리 꽁냥꽁냥 열내며 일하다가 퇴근하고 다음날 또 출근해서는 어제 하던 나쁜 짓을 이어서 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집단에 소속되어 어떤 신념에 완전히 종속당했을 때 그 정당성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할..
The Color of Paradise (1999)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 모하메드(Mohsen Ramezani)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맹인 기숙학교에서 생활한다. 그곳은 다른 이란 영화 속의 일반학교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은 훨씬 따뜻하고 사려 깊다. 그들은 쉽게 속도를 낼 수도 없고 아이들을 다그칠 수도 없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정상인들과는 다른 출발선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시험을 위해 배운다기보단 언젠가 그들이 내던져질 세상을 보다 예민하게 인지하기 위한 감각을 키우는데 열중한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친구들이 모두 부모와 만나 학교를 떠나고 모하메드는 여전히 아빠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둥지에서 떨어져 울고 있는 새를 감지하고선 주머니에 넣고 나무 위에 올라가 둥지에 올려준다. 볼 수는 없지만 들을..
The Passengers of the Night (2022) 엘리자벳(샤를롯 갱스부르)은 청소년기 딸과 아들을 혼자서 키우는 이혼한 중년 여성이다. 긴 세월 동안 아이들을 키우며 이렇다 할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던 엘리자벳은 이혼 후 돌연 가장이 되면서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직 이혼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데서 오는 절망감이다. 그러다 이력서에 '감수성 풍부' 한 줄을 적어 넣은 엘리자벳은 야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화 교환원 일을 시작한다. 라디오 방송에 전화를 걸어오는 청취자들을 진행자에게 연결해 주는 일은 꽤나 드라마틱하게 그녀를 다시 세상과 연결해 준다. 엘리자벳은 센강과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산다. 커다란 통창이 있고 적절한 컬러가 섞인 가구와 패브릭, 그림들이 걸려있는 아름다운 ..
참새들의 노래 (2008) http://ashland.tistory.com/559070 에서 알리의 아버지로 나왔던 레자 나지가 이 영화에서는 세 아이의 아빠이자 다정한 남편 카림으로 등장한다. 그가 일하는 타조 농장에서 타조 한 마리가 도망치자 그는 해고된다. 직업을 잃은 남자는 타조알 하나를 퇴직금처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기대에 찬 아이들에 둘러싸여 망치로 타조알을 깨는 모습이 모스크에서 가져온 설탕을 깨던 알리의 아빠를 떠올리게 한다. 아내는 샥슈카를 만들어 이웃과 나눈다. 타조알이 얼마나 큰지 열 접시는 넘게 나온다. 해고당한 가장의 막막함이 전해지면서도 풍성한 샥슈카 한 접시를 보는 순간 마음이 놓인다. 귀가 잘 안 들리는 큰 딸은 동네 아이들과 버려진 수조에서 놀다가 보청기를 빠뜨린다. 카림은 딸의 보청기를 ..
천국의 아이들 (1997) 한국에서 이란 영화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키아로스타미의 코케르 트릴로지와 마지드 마지디의 〈천국의 아이들〉이 개봉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이란영화는 공책, 운동화, 좁은 골목길, 언덕 위의 나무 한 그루 같은 어떤 소박한 이미지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키아로스타미의 https://ashland.tistory.com/559048 에서 아이는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온마을을 달린다. 마지드 마지디의 에서 알리는 여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린 대가로 골목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공책과 신발. 너무 사소해서 이야기로 만들기조차 어려울 것 같은 소재들 (실제로 마지드 마지디는 신발 잃어버리는 이야기로 무슨 영화를 만드냐며 투자를 받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대박이 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