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대 이란의 소(牛)영화(https://ashland.tistory.com/559010)를 보다가 생각난 것은 21세기 아이슬란드의 양(羊) 영화...
영화 <소>에는 자신이 소가 되었다고 믿는 남자를 이웃남자들이 소몰이하듯 끌어내서 진흙탕이 된 언덕을 오르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인 형제가 한밤중에 양들을 끌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언덕을 오르는 장면은 분명 이란 영화에 대한 아이슬란드 감독의 오마쥬라는 망상을 가지고 오래전에 재밌게 봤던 아이슬란드 양(羊) 영화를 복기해 보았다.
건조하고 황폐한 중동의 이란과 척박하고 매몰찬 아이슬란드 사이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란인과 아이슬란드인이 중간지점인 헝가리즈음에서 만나 너른 목초지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와 양을 풀어놓고 토카이산 와인을 나눠마시며 손짓 발짓 해가며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 사이에 분명 통하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드문드문 양목장들이 위치한 널찍한 평원이 펼쳐지는 아이슬란드 시골 마을, 40년째 말도 안하고 지내는 아이슬란드인 형제 구미와 키디는 마을에서 주최하는 좋은 양 선발대회에 참여해서 나란히 1위와 2위를 차지한다.
2위를 한 형 구미는 영 언짢다. 동생집에 몰래 들어가서 1등양을 이리저리 살피고선 전염병이 의심된다며 관할기관에 신고한다. 설마 했던 1 등양이 감염 판정을 받으면서 그 동네 양들은 전부 도살 판정을 받는다. 양뿐만 아니라 뜯지 않은 건초도 축사도 작업복도 전부 불태워야 한다.
기르던 양들을 전부 잃은 사람들은 정부 보상금으로 새로운 양들이 교배를 마칠때까지 2년을 버텨야 한다. 양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시골 생활의 무료함을 겨우겨우 이겨냈던 사람들은 고민에 빠진다. 대출을 받아 마련했던 축사며 기계들은 사용할 수도 없는데 대출 이자는 갚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도시로 떠나겠다고 한다. 구미는 담당 직원들이 와서 자기 양들을 도살하기 전에 스스로 총을 쏴서 양들을 전부 죽인다.
하지만 그는 지하실에 예수의 말구유같은 우리를 만들어서 2등 수컷과 암컷 양들 일부를 살려두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집안 대대로 지켜낸 아이슬란드 순종양의 대를 끊기게 할 순 없다. 1 등양은 물론 모든 양들을 잃은 동생 키디는 술에 절어 산다. 구미의 집에 잠시 화장실을 쓰러 들어왔던 담당직원이 발정 난 양이 만들어낸 소음에 살아남은 양들의 존재를 알게 된 날 밤, 구미와 키디는 양 떼를 몰고 산을 향한다.
한국에 살면서 뉴스에서 보았던 깊은 구덩이속으로 내몰려 파묻히던 가축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시작도 어쩌면 시골 마을 사람들 사이의 사소한 시기와 질투가 발단이 되어 벼룩을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웠던 꼴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외교문제까지 얽히고설켰던 그 시작들은 분명 더 복잡하고 정교했을 것이다.
단지 동생이 미워서 구미가 그랬다고 생각하면 민폐가 따로없다. 자신의 신고로 다른 모든 가축들도 도살될 수도 있다는 걸 평생 양을 기른 구미가 몰랐을 리 없다. 프로페셔널한 업자의 입장에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구미는 그렇게 해서라도 동생과의 고집스러운 침묵과 끝이 보이지 않는 생업의 사슬을 끊고 싶었던것 같다. 모두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초인적인 생각에 순간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것을 끝장내고 이 공간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뭔가 빼도박도 못하는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결국 그게 큰 파멸을 몰고 온다고 하더라도.
자연에 맞선다는 것,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그것을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삶은 분명 쉽지 않은 삶이다. 사람을 책임지는 것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그것엔 그래도 뭔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살아 숨 쉬는 순간에 생은 내심 길어 보이고 누군가를 책임지느라 쏟아 넣은 노력과 시간이 가져다 줄 기쁨은 두고두고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날씨와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삶보다 훨씬 짧은 생명주기를 가진 가축들을 보살피고 먹이고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또 탄생시키는 과정은 녹록지 않을 거다. 같이 데리고 여행을 할 수도 없고 집을 오랫동안 비울 수도 없고 때가 돼도 독립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조차도 병들지 않은 양, 오래 사는 양을 원한다. 소설 속의 양은 구멍이 뚫린 작은 상자 속에서도 풀을 뜯어먹고살 수 있지만 현실의 양은 생존에 너무나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 존재를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보살핌으로 생명유지시켜서 그것의 죽음을 배웅하는 것만큼의 큰 구속이 또 있을까.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서 결국 뭔가에 얽매이는 길을 택하지만 그것이 항상 생존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 가축, 자연과의 관계는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온 생존과 직결됐었기에 정말 끊기 힘든 사슬이었지만 그것을 지금 같은 세상에서 계속 지속시켜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너무 큰 헌신을 필요로하는 일이다.
구미와 키디 둘다 결혼을 하지 않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목장을 일궈나간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40년 동안 말을 하지 않는 습성은 양을 기르다 보면 저절로 얻어지는 고집일까. 이들이 죽고 나면 이들이 기르던 양과 목장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들이 뭔가에 무조건적으로 몰두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흘려보냈던 삶과 순간들이 갑자기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서 구미는 몇 마리의 양을 살려둔 것이 아닐까.
아이슬란드하면 미드 <바이킹>에서 플로키가 혈혈단신 도착해서 온몸으로 맞서는 지옥 같은 땅의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농업이 여의치 않은 토지탓에 어업과 목축업에 사활을 걸어야 했던 아이슬란드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가축 중 하나라는 양과 함께 그 땅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대대로 대물림되는 공존의 유전자가 분명히 있을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가축과 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가축의 체온으로 온도를 유지하며 겨울을 이겨냈다는 사람들처럼 언덕 위에서 양 떼를 잃은 구미와 키디는 눈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옷을 벗고 부둥켜 안는다. 흩어진 양들이 살아남았는지 구미와 키디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결국 화해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다. 구미는 모든 역경을 다 견뎌내고 다시 자라나는 양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양들이 아이슬란드의 긴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으면 동생과의 관계에도 봄이 찾아올거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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