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완소( 牛 )영화들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는 The Price of milk... 백 마리가 넘는 소를 키우는 뉴질랜드 커플 이야기이다. 등장하는 소의 규모만 놓고 보면 독보적이지만 모든 소영화에서 그렇듯 그들은 조연일 뿐.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 스미스 요원의 말을 안 듣고 반지를 버리지 않아서 모두를 곤경에 빠뜨리고 사라지는 이실두르가 만든 영화이다.

우리나라에선 <뉴질랜드 이불 도난사건> 이란 제목으로 나왔는데.. 퀼트 이불을 도난당하는게 중요한 사건인 건 맞지만.. 차라리 그냥 투박하게 <우유의 가격>이나 <우유의 대가> 라고 했으면 뭔가 <타인의 취향>이나 <수면의 과학>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좋았지 않았으려나. 장면 몇 개가 필요해서 원제로 검색을 했더니 쓸만한 영화 스틸 컷은 없고 정말 너무 우유 가격에 관한 보도자료들만 난무해서 결국 오래전 중국에서 사 온 디브이디를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뉴질랜드 자연경관이 반지의 제왕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아름답다. 반지의 제왕만큼의 판타지 영화는 아니지만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묘사들이 많고 발칙한 은유로 가득차있는 동화이다. 최소 반경 5킬로미터 내에 둘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의 탁 트인 자연환경, 하지만 고립되었다는 느낌보다는 둘만으로도 충만해서 그 상태를 완전히 만끽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동물 기르는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지루한 루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그런 서사는 별로 없다. 그저 온 세상이 햇살로 가득하고 따사롭고 소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친구가 일하는 시내 마트에 종종 들르는 것 말고는 다른 일상은 없다. 방목된 소들처럼 그들의 삶도 유유자적하고 일상의 고달픔도 없어 보인다.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을 것 같지 않은 완벽한 삶이다. 하지만 욕심은 부리라고 있는 법.

마치 에덴 동산에 둘만 남겨진 것처럼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내는 롭과 루신다. 드디어 롭이 청혼을 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결혼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루신다는 불현듯 롭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의심하고 여러 유치한 방법으로 롭의 사랑을 시험하기 시작한다. 은근히 루신다를 질투하는 마트 점원 절친은 그런 루신다의 의심과 걱정을 부추긴다. 롭이 배가 부르다고 음식을 더 안 먹겠다고 하면 루신다는 사랑이 식은 걸까 의심한다. 몇천 달러 상당의 우유통에 들어가 수영을 하던 루신다는 불같이 화를 내는 롭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사랑한다면 배가 터질것 같아도 먹어주고 우유통에 들어와서 같이 우유장구도 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정말 그럴까. 우리는 그런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 아는 나이가 된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요구를 해오면 들어줄 생각이 절대 없기 때문에 이미 모종의 합의에 이른 걸까. 루신다는 아마 결혼이라는 합의에 앞서 겁을 먹은것 같다. 누군가 결혼을 무덤이라고 했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을 의심할 수 없게되는 상태에 자발적으로 이르기때문이 아닐까.

루신다는 아이처럼 순진하면서도 어리석다. 롭은 자기도 모르게 분노한 것에 스스로도 놀라고 결국 우유통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헤엄친다. 사랑을 확인시켜주기위해서 몇천 달러 정도는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루신다는 자신이 그 무엇보다도 값진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들과 치환해 버리는 함정에 빠진다.

어느 날 루신다가 운전 중에 신비로운 마오리족 할머니를 들이받으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차에 들이 받힌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서 'Keep warm'이라는 말을 남기고 숲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루신다가 롭과 함께 덮고 자는 소중한 퀼트 이불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루신다는 이불 수십개를 훔쳐다가 덮고 누워서 여유만만 책을 읽는 할머니를 발견한다. 누군가의 애착이불이자 집착과 애증의 물건이기도 할 이불을 할머니는 보란듯이 수집했다. 루신다가 할머니에게 이불을 돌려달라고 하자 할머니는 말한다. '너에게 제일 소중한 걸 가져오면 돌려줄게'

루신다는 옳거니 롭의 마음도 확인할겸 아주 황당한 일을 저지른다. 몇십만 달러 상당의 롭의 소를 전부 할머니에게 줘버린것. 결국 예쁜 이불은 돌려 받고 그들은 되돌아온 이불과 함께 따뜻하게 잔다. 잃어버린 소에 비하면 헤엄쳐서 못쓰게 돼버린 우유는 귀여운 수준이다. 졸지에 소를 잃은 롭은 더듬이가 되고 루신다를 남겨두고 집을 나온다. 그리고 마트에서 일하는 루신다의 친구와 가까워진다. 소를 다 잃은 마당에 이 초지가 다 무슨 소용인가. 롭은 맥주만 마시고 삶의 의미를 잃는다.

소를 되돌려달라고 애원하는 루신다에게 할머니는 소는 돌려주겠지만 가장 사랑하는것과 바꾸는 조건을 건다. 루신다는 결혼반지가 매달린 목걸이를 건네고 더이상 롭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소는 돌아오고 할머니의 친척들은(움파룸파 같은 이미지의 마오리 남성들) 그 목걸이를 팔아서 거대한 공장을 짓는다. 사랑을 쟁취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루신다는 결국 교환의 교환을 거쳐 표면적으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다 놓는다. 결혼반지, 소, 거대한 공장, 롭에 대한 사랑 결국 대등한 가치였을까.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 코치나 (La Cocina, 2024) (0) | 2025.03.31 |
---|---|
Rams (2015) - 아이슬란드의 양(羊)영화 (0) | 2025.03.26 |
소 (The cow, 1969) - 가장 소중한 것과 함께 소멸하기 (0) | 2025.03.18 |
말벌 (Wasp,2003) 그리고 피쉬 탱크 (Fish tank,2009) (0) | 2025.03.15 |
굿타임 (Good time, 2017) (0) | 2025.03.13 |
아메리칸 허니 (American honey,2016) (0) | 2025.03.11 |
Heaven knows what (2014) 책임질 수 없음에도 우리가 구원하려는 것. (0) | 202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