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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1.29 About a boy (2002) (2)
  2. 2020.01.27 Being Flynn (2012)
  3. 2020.01.20 Beyond the hills (2012)
  4. 2020.01.14 Can you ever forgive me (2018)
  5. 2020.01.13 워킹데드 시즌 10을 보다가 잡담
Film2020. 1. 29. 07:15

 

 

Being flynn (https://ashland11.com/877)의 감독이 생소해서 검색해보니 웬걸 아메리칸 파이와 어바웃 어 보이를 만든 감독이었다. 비잉 플랜에서 그려진 부자관계 때문이었겠지만 오래된 두 영화 속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남자와 소년의 모습이 자연스레 중첩된다. 오래전 이 영화는 뭔가 휴 그랜트로 점철된 휴 그랜트 영화의 클라이맥스라도 해도 좋았지만 돌이켜보면 기억에 깊숙하게 남은 것은 똑 부러졌던 어린 니콜라스 홀트의 연기와 엄마 토니 콜레트와 킬링 미 소프틀리를 열창하는 장면이다. 다시 향수에 젖고 싶어 진 듯 결국 또 귀한 시간을 들여 봤던 영화를 또 찾아본다. 새로운 영화와 드라마들이 말 그대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데 가끔 오래된 영화를 보고 있자면 조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2000년대 영화도 20년 전 영화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젠 이런 말랑한 영화도 고전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비잉 플린도 그렇고 두 영화 모두 남의 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편부 슬하에서 자란다는 설정이 같다. 비잉 플린의 엄마가 아들을 남기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면 어바웃 어 보이의 마커스는 우울증에 걸린 엄마의 자살 실패 장면을 목격한다. 불안정한 엄마의 울타리가 되어주려 노력하는 아들이지만 참 어른스럽고 사려 깊은 아들이라고 안심하고 대견해하기에도 그는 그저 아이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의식적으로 최소화하는 능력을 갖기에 그는 아직 너무 어리다. 아버지가 만든 캐럴송에서 나오는 로열티로 세련되고 부유한 삶을 사는 싱글남 휴 그랜트는 뭘 하고 사냐는 질문에서 항상 말문이 막힌다. 남아도는 돈과 시간이지만 그는 이렇다 할 생산적인 취미도 없고 관계를 맺는데에서 조차 귀찮음을 피하려 아이 가진 아빠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엄마에게 남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소년은 어른 남자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남자 친구가 아닌 아빠였는지도 모른다. 어른 남자의 삶이 이기적이고 무의미하게 비춰졌다면 그것은 그의 삶이 재정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정체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물리적으로는 계속 살아지는 삶을 산다. 반면 소년은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늘 고민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뭔가를 계속 의도한다는 것이겠지. 소년의 끊임없는 의도는 정체된 남자의 삶의 작은 울림이 된다. 비잉 플린의 아빠와 아들이 그랬듯 이 영화도 휴 그랜트와 니콜라스 홀트, 두 남자 각각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얼핏 각자의 관점에서 평행선을 그리는 소통으로 시작하지만 도움을 주고 받고자 하는 인간적이고도 선량한 의지로 그들은 접점을 찾아간다. 

 

 

결핍이 매번 불행의 절대적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함께 한다는 것이 늘상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고 반대의 경우는 또 그런대로 자유와 독립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니 타인으로 인해 수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일종의 무덤으로 치부해버리는 오류에 빠진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고 자식을 교육시키는 부모도 있고 어찌 키워야 할지 몰라 남의 방식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부모도 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길러지더라도 인간이라면 모두 조금의 상처를 지니고 성장한다.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늘 구멍은 있고 구멍 투성이의 삶에는 또 그런대로 그 구멍을 메우고자 하는 의지와 방법 같은 것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국 그런 여러 다른 삶의 방식을 보완하는 것은 나와 너무나 다른 타인을 밀어내지 않는 포용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결점을 맹목적으로 방어하지 않고 누구에게라도 배울 것이 있다는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휴 그랜트가 연기한 어른이 마냥 철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를 비난하지 않고 그에게 스스로 마음을 열어 보이는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무수한 영화 속에 숱한 노래장면들이 있지만 마커스가 엄마의 반주에 맞춰 킬링 미 소프틀리를 부르는 장면은 개인적으로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집들이 씬에서 최진실이 부르는 당신이 모르실 거야와 함께 최고이다. 물론 잘 부르지 않는다. 제발 눈만은 감지 마 하는 휴 그랜트의 대사로 조금 코믹하게 그려지긴 했지만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 모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인다. 그것이 비록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 일시적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이 그득그득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저 작은 소년이 엄마를 위한 노래라며 전교생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무대에 오르는 장면이 뭉클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잘 자란 니콜라스 홀트는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미는데 휴 그랜트 어디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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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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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영화 진짜 옛날에 봤는데 갑자기 추억이 새록새록... 이 영화를 비디오인가 디뷔디로 빌려다 쥬인이랑 같이 봤는데 둘이서 약속이나 한듯 두가지의 똑같은 감상을 쏟아냈었어요.

    1. (노래 하나 히트 쳐서 평생 먹고사는-지가 쓴 것도 아니었던-) 휴 그랜트 진짜 부럽다... 건물주보다 더 부럽다.

    2. 어린이가 등장하는 영화인데 그 어린이가 귀엽거나 이쁘지 않고 한대 쥐어박고 싶은 드문 영화이다!!! (..뒤로 갈수록 짠해져서 이입은 되었지만 ㅋㅋ)

    2020.02.09 21:4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둘다 공감가는 감상이네요 ㅋ. 심지어 휴 그랜트는 너무 심심해보이죠. 저 어린이는 그쥐어박고싶은 이미지때문에 조명을 덜 받아서 오히려 의외의 모습으로 자라났나봐요 ㅋㅋ웜바디 보고 같은 사람인걸 알고 깜짝놀랐던기억이나네요

      2020.02.09 22:43 신고 [ ADDR : EDIT/ DEL ]

Film2020. 1. 27. 08:00

 

 

 

 

 

며칠간 본 영화들을 쭈욱 늘어놓고 생각에 잠겼다. 알고 있었지만 세상엔 재밌고 좋은 영화들이 정말 많구나. 그러니 재미없는 영화들이 단순히 재미없음을 넘어 괘씸하게 느껴질 수밖에. 아이리쉬 맨을 볼 날을 기다리며 로버트 드 니로의 출연작을 다시 훑어보다 듣도 보도 못한 영화가 있어서 보기 시작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도 재밌었으니 플린 되기도 재밌겠지. 로버트 드 니로와 폴 다노라니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언젠가 알 파치노와 조니 뎁,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가 그랬듯이. 슬픈 영화가 아니길 바랬다. 이제 슬픈 영화를 보는 것은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영화는 꽤나 도발적인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미국에 위대한 작가 3명이 있으니 마크 트웨인과 샐린져 그리고 나, 조나단 플린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조나단 플린은 이렇듯 자존감 갑인 아저씨이다. 반사적으로 얼마 전에 본 Can you ever forgive me (https://ashland11.com/870)의 리 이즈라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리 이즈라엘이 어쨌든 출판 경력이 있었고 비록 임대료가 밀렸을지언정 경비원이 딸린 아파트에 살며 바에서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즐기는 여유가 있었다면 조나단 플린의 상황은 겉보기엔 조금 처량하다. 그는 틈만 나면 아래층의 밴드 합주 소음이 마루를 뚫고 올라오는 좁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글을 쓴다. 그리고  어느 날엔 그 소음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야구 방망이를 들고 아랫집을 몽땅 다 부수고 나서 그는 아파트에서조차 쫓겨난다. 그리고 그는 18년 동안 연락하지 않은 아들에게 전화한다. 빨리 이삿짐 옮기러 오라고. 너는 나의 유일한 상속자이니 내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라는 꽤나 솔깃한 말과 함께. 하지만 그는 잡동사니만 잔뜩 실은 트럭과 가짜 잭슨 플록의 작품 하나를 던져주고 또 유유히 등을 돌린다. 

 

 

 

 

분명히 폴 다노는 캐스팅이 되고 나서 엄마한테 전화했을거다. '엄마, 나 로버트 드 니로 아들 역 맡았어! 믿어져? '. 뭐 적어도 내 아들이 그런 전화를 걸어온다면 난 기꺼이 눈물을 흘리며 축하해줬을 거다. 닉 플린은 18년 동안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가 보내오는 편지를 읽으며 자랐다. 나는 위대한 작가이며 언젠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거라는 아버지의 당당한 편지 속 외침을 들으며 그 자신도 작가의 꿈을 키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여자 친구의 아파트에서 쫓겨나며 거리로 나앉는다. 그 묘한 시기에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둘은 조우한다. 남편 없이 투잡을 뛰며 아들을 키운 엄마는 유서를 남기고 이미 세상을 등진 후이다. 

 

 

 

 

이 장면은 영화에 없었다. 남편과 아내역을 맡은 드 니로와 줄리안 무어는 단 한 번도 한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 대신 엄마의 남자 친구들이 던져주는 야구공을 받으며 자랐다. 매번 공이 돌아올 때마다 그는 공을 던져주는 사람이 아버지였길 바랬을 거다. 아버지와 남편의 부재. 생각해보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누군가의 삶을 다루던 티브이 드라마들은 사회적 통념상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관계를 얼마나 평면적으로 다루었나. 가족을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심지어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나이가 다 들어서 나타난 게다가 기고만장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드라마대로라면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 영화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아들, 불행한 엄마의 삶, 고개 숙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 모두의 삶은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 불완전한 가족의 불행이 가장의 일탈로 시작된 것이라 치더라도 그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란 좀 찝찝한 구석이 있다. 그 누구도 그 삶에서 불행을 의도하진 않기에.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오갈 데 없어진 조나단 플린은 운전하는 택시에서 숙식을 해결하지만 음주 운전으로 택시는 물론 면허마저 잃는다. 어딜 가도 술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리 이즈라엘이지만 조나단 플린은 심지어 택시 영업 중에도 보드카에 오렌지 주스를 섞는다. 그 시점에 아들 닉 플린은 노숙자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제발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랬지만 마치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등을 돌렸던 아버지는 결국 거리를 전전하다 아들이 일하는 노숙자 센터에 입성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조우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곳에서조차 소란을 피우고 쫓겨난다. 하지만 이 대책 없는 아버지의 생명력이란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버지는 오히려 당당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황당하고 밉지만 사실상 그 생명력에 압도당한다. 어린 소년에게 오랫동안 편지 속에서만 존재했던 아버지는 상상하고 또 상상해도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런 아버지에 실망하고 그를 부정하는 것은 마치 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에서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아버지는 그 질문의 답을 가지고는 있는 걸까. 그런데 표면적으로 가진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아버지는 절대 나처럼 살지 말라는 식의 없어보이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스스로 삶을 등졌다면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당당해 보인다. 이것은 어쩌면 평생을 그 자신이 되고자 발버둥 치면서 산 아버지 이전의 어떤 남자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이제 막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아들 이전의 어떤 남자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리고 어떤 사회적 테두리 안에 머물며 행복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완전한 나가 된다는 것은 늘상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하지만 모든이들이 완전한 자기가 되기 위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타협하고 내려 놓는다. 그것이 결국 내 스스로의 행복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모른다. 스스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우리는 얼마나 가졌는지로 타인의 삶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판단하는데 익숙하다. 보여줄 결과물이 없을 때 우리의 자존감은 곤두박질친다. 출판된 책이 없으니 작가라고 부를 수 없고 물려줄 것 하나 없으니 초라한 아빠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은 허상이다. 우여곡절 끝에 조나단 플린은 임대 아파트를 받고 부자는 다시 조우한다. 아들은 작가라고 자부하는 아버지의 글이 궁금하다. 그리고 그는 거리를 전전하던 순간에도 몸에 지니고 다니던 원고를 꺼내어 보여준다. 조나단 플린에겐 그 수권의 원고가 전재산이나 다름없었을 거다. 그 누구도 출판해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의 의미나 다름없었던 그 자신의 인생에서는 예술로 남을 원고이다. 글을 써보려고 하는 중이라는 아들의 말에 작가는 글을 쓰거나 쓰지 않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인생은 결국 살거나 살지 않는 두 종류의 동사로 귀결되는 것일까. 모두가 남이 보기에 반짝이는 금빛의 인생을 살 수 없다면 자신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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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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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20. 1. 20. 07:44

 

제목이 비슷해서 더 그랬겠지만 빛이 바랜 사진 느낌의 포스터에서 오래전 영화 비포 더 레인을 회상하며 보기 시작했다. 멀리 펼쳐진 언덕을 뒤로하고 또 다른 언덕 어딘가로 급히 오르고 있는 짐가방을 든 두 여자의 느낌도 좋았다. 언덕 너머에 뭐가 있을까. 뭐가 있을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서 오르는 언덕은 아니길 바랬다. 저런 목가적인 풍경은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불행을 도드라지게 했고 세상은 또 나 몰라라 하고 그들에게 등을 돌리곤 했다. 부디 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지 않기를. 비포 더 레인에 마케도니아의 어느 높은 절벽에 홀연히 위치한 정교회가 등장했다면 이 영화는 루마니아의 궁벽한 정교 수도원이 배경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들 나라들은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를 그런 산과 평원, 가까운 하늘을 공유하며 비슷한 색채의 유사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좀 더 멀리 가서 터키나 이란 영화에도 은근히 녹아있는 그런 우울하고도 이국적인 정서가 이 포스터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알리나와 보이치타. 독일에서 일하는 알리나는 보이치타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으로 고향 루마니아로 돌아오지만 정교 수도원에서 수녀의 삶을 시작한 보이치타는 그럴 생각이 없다.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뿐이었던 어린 이들 사이에는 성적 교감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렀으며 알리나는 여전히 그 감정에 얽매여있지만 보이치타는 이제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신 뿐이라며 알리나가 꿈꾸는 둘의 삶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독일로 돌아갈 날은 다가오지만 보이치타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알리나는 불안하다. 보이치타는 오갈데 없는 알리나를 수도원에 머물게 해달라고 신부님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알리나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조건과 함께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자리가 없는 빠듯한 수도원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치타는 알리나 역시 자신처럼 종교에 귀의하기를 바란다. 알리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전처럼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 그 둘이 계속해서 함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나는 입만 벌리면 신을 들먹이는 보이치타에게서 배반감을 느끼고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거짓이라고 비난하며 과격해진다. 수녀들과 신부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난폭해지는 알리나를 악마에 씐 것으로 간주하고 세상에 종말이 온 것 같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결박한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이지만 오히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유머러스하다. 하지만 코미디라는 장르를 빌려 만들어낸 웃음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그 본인들은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남다른 원칙으로 그 상황을 존속하고 보호하려고 진지한 얼굴로 애쓸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을 때의 그 느낌이다. 이 수도원은 신의 부름을 받고 종교적 사명감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기 보다는 나이가 차서 고아원을 나와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발을 들여놓는, 마치 일용직 근로자들을 가득 태우고 일터를 향하는 허름한 봉고차처럼 치열한 곳이다. 보이치타가 수도원의 규율에 반하는 알리나의 행동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친구가 걱정되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수도원말고는 더 이상 그 인생을 책임져 줄 곳이 없다라는 불안감에서이다. 결국 독일에서 유람선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든 루마니아의 고립된 산자락 어디에서 수녀가 되든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이른 아침 수도원의 아침 식사 시간을 채우는 것은 종교적 위엄이 깃든 성스러운 대화라기보다는 여보 쌀이 떨어졌어요 식의 의식주 해결에 관한 세속적인 대화들이다. 수입과 지출을 잘 안배하고 한 푼 한 푼 아껴써야 성당벽에 그림 그릴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 성당이 좀 더 믿음직스러운 곳으로 발돋움하려면 기적의 이콘도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정교적 요소와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서인지 사실 수도원의 일상이 묘사된 부분은 아름답다 느꼈다. 눈으로 뒤덮힌 수도원의 풍경과 극단적인 추위 묘사도 좋았다. 전기가 없어서 촛불을 켜고 생활하고 매번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번거로움도 금욕적인 고행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 모든것은 마치 중세시대를 연상케하는 고립되고 낙후된 수도원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첩첩산중에 한때 곳간으로 쓰였을 법한 집들을 개조해서 만든 듯한 지붕도 채 이지 않은 궁색한 수도원을 보니 이곳은 이제 막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하루하루의 행보가 의미심장하다. 이 장소가 성스럽고 신실하다는 소문이 나야 이 공간은 유지될 것이며 후원금이 생겨야 제대로 된 난방도 할 수 있을 거고 물이 새지 않게 지붕도 고치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구색에 맞춰 성당 벽화도 그려야하고 이콘이 놓일 장소도 잘 보살펴야 한다. 그저 신을 믿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의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난방도 되지 않는 꽁꽁 언 방 속에서 우물을 깃는 쇠사슬로 꽁꽁 묶인 가엾은 양을 향한 기도, 알리나를 결박하는 수녀들의 몸짓과 눈짓은 진심으로 알리나를 걱정하고 있으며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절박하다. 그들은 정말 진지하다. 알리나를 향한 조금의 악의도 없다. 그들은 맹목적인 신념에 매몰되어서 그것이 빚어낼 결과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할정도로 무지하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 선 아니면 악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가장 큰 악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사실 영화의 결말에 있어서는 애매하다. 알리나는 구급차에 실려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결박한 흔적,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알리나의 상태등으로 수도원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간다. 자신들이 한 짓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며 울먹이고 절규하는 사람들 뒤로 보이치타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하다. 결국 알리나를 악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보이치타였을까. 돌아왔던 곳으로 다시 가라며 한밤중 알리나를 감싼 쇠사슬을 풀어준 것은 이제는 해방되고 싶은 스스로를 향한 고발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그 자신을 압도한 무지한 신념의 극치였을까. 이 영화도 크라이테리온에서 발매되었네. 좋은 화질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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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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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20. 1. 14. 07:00

 

 

 

많은 좋은 영화들을 보지만 저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친구가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이나 천국보다 낯선의 에바, 칼리토 같은 내가 두고두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영화 캐릭터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너무나 행복했다. 누군가가 생각나면 그의 사진을 꺼내보는 것처럼 어떤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내 마음을 뺏어간 인물의 습관, 그의 유머, 말투, 그의 생활공간들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허구의 인물에 어떤 추억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나에겐 그것이 영화를 보는 가장 큰 매력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매일의 일상으로 채워진 우리의 삶 자체가 내일이라는 명백한 허구를 향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영화를 두 번째 보는데 첫 번째 볼 때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친 문구가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한 줄. 순간 너무나 슬펐다. 아 저렇게 반짝이는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었다니 출처를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었다. 그녀가 허구의 인물이었다면, 이것이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 자체는 더욱 빛났을 거라 생각하니 역설적으로 이것이 꾸며낸 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 이상야릇한 배반감을 느낀 것이다.

 

 

영화 속의 리 이즈라엘은 슬럼프에 빠져든 전기 작가이다. 장난 전화 걸기를 즐기고 설거지를 할때조차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파트 임대료를 낼 돈도 병든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갈 돈도 없는 그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어떤 작가의 편지를 서점의 수집상에게 팔고 돈이 된 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유명 인물들이 교환했을 법한 편지들을 제조하는 나름의 창작을 시작한다. 고양이 약값을 마련하려고 시작한 일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그의 본능에 불을 지피며 걷잡을 수 없이 규모가 커진다. 그녀는 여러 타입의 타자기를 집에 구비해놓고 작가들의 사인을 위조하고 심지어 오래된 편지처럼 만들려고 편지를 오븐에 굽기도 하며 스스로의 재능에 빠져든다.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스마트한 지능범이 없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그녀의 행위는 발각되며 처벌을 받는다. 그녀는 결국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그러니 있지도 않는 작가들의 편지를 창작해서 벌 받은 사람의 자전적 소설을 다시 각색해서 만들어진 이 영화의 탄생 배경 자체가 신선하다.  

 

 

배경은 90년대의 뉴욕이다. 2년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신기하게도 나 홀로 집에 2탄에서 케빈이 성탄절을 보내던 그 90년대의 뉴욕의 느낌이 너무 진하게 묻어났다. 아마도 그렇게 내가 영화를 통해 접한 뉴욕의 첫인상이 그 도시에 대한 추억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뉴욕이라는 도시 특유의 심상을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내려고 애를 쓰던 우디 앨런의 영화를 필두로 한 많은 영화들에서 때로는 배타적인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영화는 세련되지도 잘 나가지도 않는 어떤 개인의 추억과 애상이 아기자기하게 묘사돼서 귀엽다는 느낌을 가지고 봤다. 마치 특선 대작들 사이에 끼워서 방영되는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오후에 해주는 그런 영화의 느낌 말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내 것이었으면 하는 인물의 일상들 습관들 같은 것이 있다. 지금도 고스란히 저런 장소들이 남아있을까 싶은 뉴욕의 오래된 서점들, 늦은 밤 승객이 드문 허름한 지하철 안에서 미국인들이 손에 쥐고 읽곤 하던 두껍지만 가벼운 그런 책들을 팔 법한. 리 이즈라엘이 낮술을 하기 위해 습관처럼 드나들던 동네 술집, 레즈비언인 그녀의 나이 든 게이 친구, 그들이 걷는 거리와 그들의 자유분방한 대화, 여러 영화들을 통해 등장하던 비슷한 구조의 뉴욕의 아파트 등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도 발랄하게 그려진다. 90년대의 뉴욕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젖어드는 아련함은 아마도 내가 접속이나 초록 물고기 같은 영화를 보며 빠져드는 그것과 비슷할 것 같다.  

 

 

리 이즈라엘의 이 아파트 구조는 익숙하다. 저 정도의 삶은 우리 눈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보통 좀 뭐가 잘 안 풀리는 주인공들이 사는 집으로 나오는 거 보면 미국의 생활 수준이 확실히 나은 건가.라고 생각하다가도 엄청 큰 집에 살고 두세넷의 아이들을 키우며 3리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오렌지 주스를 아침에 꺼내어 먹는 주인공들도 보통 모기지론으로 집 산 처지일 테고 저런 아파트도 우리의 주인공들을 임대료에 허덕이게 만들곤 했겠지. 그 와중에 저 케맥스 드립 포트 옆의 커피 잔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극 중 그녀의 생활 습관으로 보건대 저 필터는 아마 한 달 넘게 치우지 않아 커피 찌꺼기 위에 곰팡이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 그녀도 절대 잊지 않는 것이 있으니 고양이 밥 주기. 고양이 약 사려고 시작한 범죄 행위는 사실 고양이의 죽음과 함께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기며 그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리 이즈라엘의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것은 유명 인물들이 교환한 서신이나 물건들을 되팔고 수집하는, 책 속에 굳어진 케첩 자국조차 상업화하고 소비할 수 있을 것 같은 미국 특유의 문화이다. 게다가 작가들의 삶과 그들 특유의 필치를 잡아내는 그녀의 능력까지 더해져서 편지 위조 행위는 꽤나 그럴듯한 창작 행위가 되어간다. 그것은 결국 범죄 행위였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그의 용기이자 재능이라 느껴졌다. 그녀는 그 능력을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할애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극 중 출판사 사장의 말처럼 상품 가치도 없는 다른 인물의 전기문을 쓰는데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그녀는 게으르고 타성에 젖은 작가일 뿐이다. 그녀에게서 몇 통의 위조된 편지를 사들인 서점의 여주인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리 이즈라엘을 동경하며 그녀가 쓴 짧은 소설의 원고를 읽어 봐 달라고 건넨다. 리 이즈라엘은 그 원고를 쉽사리 읽지 못한다. 자기의 것을 시작할 수 없는 용기.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그녀는 점점 더 위조 행위에 매달린다. 

 

 

영화는 한편으로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 휘황찬란하고 격동적인 그 도시의 한편을 배회하는 외로운 인물들의 삶을 무심한 듯 진실하게 묘사한다. 갈 곳이 없는 나이 든 게이를 연기한 리처드 E. 그랜트의 연기는 내가 본 동성 연애자 연기 중 최고였다.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운 베를린을 배회하던 파니 핑크와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던 동성 연애자인 아프리카 주술사의 모습도 떠올랐다. 미움받고 손가락질당해도 생긴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인물들, 그들이 만나서 오직 자기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선물 받았을 때의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편집장 친구의 삶에서 넓은 아파트를 상속받은 행운만을 부각시키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매너리즘에 빠진 리 이즈라엘이 남의 삶을 위조하며 쾌감에 젖는 것을 보며 아슬아슬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의 행위에 빠져든다. 타자기를 앞에 두고 미친 듯이 위조에 몰두하는 그녀를 보고 범죄자를 향한 비난 대신 우리가 느끼는 이 카타르시스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것에 치이고 저것에 치여서 제대로 나 답게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삶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만이라도 나 자신의 삶에 완전하게 취하게 하는 그 섬광 같은 자기 긍정과 확신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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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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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20. 1. 13. 07:00

 

 

특정 드라마들을 수년에 걸쳐서 보긴 하지만 드라마 공식 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제작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살피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몇 시즌을 이끌어가던 주연급 배우들이 뚱딴지 같이 갑자기 사라져서 나오지 않고 그래도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검색 한 번 이면 알게 될 이야기들이겠지만 육아휴직 갔나?라는 식으로 웃고 넘어갈 뿐 사실 그다지 궁금하지가 않다. '뭐지? 왜 이러는 거야 이 드라마' 하는 물음표를 안고 영향력 있는 주연들의 공백을 메우려 급히 수혈된 또 다른 주연급 배우들의 역할에 그저 이끌려 가며 어떤 식으로든 기사회생하려고 애쓰는 드라마의 생존 방식을 지켜보는 것이 스토리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드라마는 무슨 나루토나 원피스 같은 일본 만화영화(안끝난거 맞나?)처럼 네버엔딩 좀비 드라마가 되고 싶은 건지 수많은 좀비 엑스트라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의 매력을 포기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며 그럭저럭 잘 연명하고 있다. 이래도 저래도 금전적으로 손해 보지 않는 드라마라면 굳이 끝을 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예상하거늘 그런 제작방식들에 질린 일부 배우들은 파업을 선언하며 박차고 나간 거겠지. 하지만 좀비와 싸우는 것도 모자라 좀비를 조종하는 무리를 생각해낸 것은 협소한 상상력을 가진 나에겐 충분히 신선했다. 그리고 그 무리를 이끄는 사만다 모튼(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물속에 잠겨있던 그 여인)을 등장시키며 꺼져가던 드라마를 간신히 살려내고 이제는 안 되겠다 싶으면 미드들이 곧잘 꺼내 드는 소련 카드도 나왔다. 이제 뭐가 남았지. 그게 궁금하니 남은 시즌도 또 열심히 보겠죠.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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