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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지구를 지켜라! (2003) 와 부고니아 (2025)

 

 

크리스마스 연휴에 본 따끈따끈한 <부고니아>, 오래간만에 국뽕의 기회를 선사함. 지금까지 제시 플레먼스에게 가지고 있었던 모종의 낯섦이 사라졌고, <랍스터> https://ashland.tistory.com/328 적 감성을 잊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필요 이상으로 애쓰지 않는 연출로 다시 되돌아온 것 같아서 기뻤고, 엠마 스톤의 역할도 연기도 크게 튀지 않아서 좋았다.
 
 


 
 
영화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작이다. 아리애스터가 제작에 참여했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했다. 한국어 제목에서 저 느낌표만 덜어냈더라면 만 명 정도는 더 봤을 것 같고, 포스터 속 신하균의 머리에서 헬맷만 벗겨냈더라면 또 만 명은 더 봤을지도 모를, 하지만 손익분기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성공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그럼에도 영화 관계자와 영화팬들 사이에서 왜 이 영화가 크게 흥행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담론이 영화 자체에 대한 담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영화.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저주받은 걸작이라면 정말 시대를 앞서갔거나 한국 사회에서는 생소했던 소재를 다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홍보를 잘못한 탓이라고 하기도 전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런 내용과 주제는 당시 한국 관객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생소할 거라고 관객의 수준을 과소평가하면서 저런 포스터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극단적인가.

한편으론 '참신하고, 기발하고, 누구나 쉽게 생각해내지 못하는'이라는 창의성에 대한 빈곤한 정의에 매몰되어 작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묘사하는데 너무 매달려서 방만해진 느낌도 있다. 이 영화가 한국영화에서 너무 보기 드문 변종이 될 것을 두려워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다 결국 잡종이 되면서 아예 하드보일드 해지거나 한국적인 컬트 장르를 개척할 기회를 스스로 던져버렸다. <복수는 나의 것>과 <살인의 추억>의 확고한 스타일 사이에서 샌드위치되서 중심을 못 잡았고 외계인에 대한 묘사는 데이비드 린치의 듄급 감성이었으나 고통받는 소시민의 모습은 또 처절하게 현실적이라 신비로워지지 못했다. 그러니 그런 억지웃음 버튼들을 알아서 덜어낼 줄 알고 당시에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던 '웃픔'의 개념을 감지한 관객에게는 어찌됐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그 후에도 비슷한 감성의 영화가 나타났나? 어떤 차원에서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정도가 좀 떠오른다.
 
 



 
 리메이크되면서의 가장 큰 변화는 병구(신하균)에게 납치당하는 사장(백윤식)이 여성 CEO 엠마 스톤으로 바뀌었고 신하균을 도와주는 헌신적인 젤소미나는 제시 플레먼스에게 세뇌당한 친척동생으로 바뀌었다. 신하균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범죄 커리어를 쌓게 한 불행한 시절에 관한 구구절절한 서사는 상당 부분 제거되었고 산업재해로 병든 엄마를 보살피는 부분만 최소한으로 남겨뒀다. 퇴출당한 형사, 유능한 신참 형사 같은 한국 영화 단골 요소도 할리우드 판에서는 없다. 리메이크 작에서는 동네 경찰이 순찰을 돌다 제시 플레먼스 집에 들렀다가 죽는다.



 
 부고니아는 우선 포스터가 훌륭하고... 선택과 집중을 잘했다. 원작이 너무 현란해서  더 과하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겠지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았던 원작을 정교하게 가위질했고 캐릭터보단 핵심 스토리를 살리는데 집중해서 배우들이 과한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너무 오래전에 이 영화를 봐서 세부적인 장면들이 잘은 생각나지 않지만 병구의 작업실 겸 고문실 세트 디자인이 암울했던 것, 고문 의자가 신박했던 것, 손 밟고 지나가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난다. 이 영화를 같이 보는데 시어머니께서 저 여자는 저렇게 오랫동안 묶여있는데 남자들 틈에 화장실은 어떻게 가냐고 한편으론 타당한 걱정을 해오셔서 얘기해 줬다. 원작에선 잡혀온 남자가 앉아서 대소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변기기능이 접목된 미용실 의자에 앉아있다고. 이것이 바로 납치를 당한 사람들이 매번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음모를 꾸미는 서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감독의 번뜩이는 재치를 보여주는 대목이자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그런 디테일 따위는 살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속 보이는 점이라면 리메이크했거나 소설을 영화화한 경우 보통 아주 초반에 Based on  어쩌고 저쩌고라고 원작을 표시하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았다. 제작에 참여한 원작자의 이름이 등장하긴 하지만 원작에 대해서는 영화가 끝난 후 올라가는 크레딧을 한참 기다린 후에야 마치 차마 숨길 수 없기 때문에 한 줄 넣은 걸 봤다. '제발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된 이 영화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세요'라고 애원하며 일타제작진을 섭외했고 '그렇다면 원작에 대해서는 우리 막내스탭들 이름까지 지나간 후에 넣는 걸로 하겠소'라고 딜을 한 듯. 실제 내막은 알 수 없고 국뽕의 쪼잔함에 갇힌 나머지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먹튀 했다는 나의 피해의식일 수도 있지만 어쨋거나 저쨋거나 영화는 너무 좋았다. 특히 완전히 자기 이론에 매몰된 제시 플레먼스의 조곤조곤한 미친놈 연기, 아무 의심 없이 캐비닛 안으로 들어가는 연기는 너무 멋졌다. 
 
요즘은 한국 감독들도 리메이크하거나 다른 원작으로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한국의 훌륭한 영화들, 어쩌면 내가 그냥 좋아하는 영화들이 다른 나라에서 많이 리메이크됐으면 좋겠다. 미국에 온 베네수엘라 여성이 고생하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앤드류 가필드가 마거릿 퀄리를 유혹해 달라고 하비에르 바르뎀을 고용하는 내 아내의 모든 것, 휴 댄시와 로즈 번이 나오는 만추, 8월의 크리스마스, 반칙왕, 소공녀, 곡성 등등등 뭐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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