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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Armand (2024)

 

 
 
<센티멘털 밸류>를 보고 싶은데 아직 볼 방법이 없고 왠지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대로 레나테 레인스베가 나오는 영화들에 대해 짧게 기록해두려고 한다. 이 배우는 작년에 드라마 <무죄추정>에서 제이크 질렌할 상대역으로 나온 걸 처음 봤는데 이미 죽은 상태에서 회상씬에서만 계속 나와서 분량이 별로 없는데도 존재감이 컸다. 제이크 질렌할은 믿고 보는 배우중 한 명이지만 생각해 보면 기억에 남는 상대 여배우가 없다. 출연한 영화들이 거의 혼자 끌고 가는 영화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브로크백마운틴>에서 히스 레저와의 연기가 너무 절절하고 임팩트 있어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시나리오가 안 들어오는 건가 한동안 생각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선 레나테 레인스베와 정말 잘 어울렸다. 분위기가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드라마를 보면서도 영어권 배우라기엔 뭔가 오묘하게 선을 긋는 느낌에 오히려 동네 카페에서 만난 리투아니아인이거나 혹은 리투아니아인이지만 묘하게 '스칸디나비아 느낌으로 훤칠한' 인상을 주는 친숙한 얼굴인데 아니나 다를까 노르웨이 배우였다. 이 배우가 제이크 질렌할과 부적절한 관계를 거의 정리하는 단계에서 죽는데 제이크 질렌할과 사랑에 빠졌을 때의 달달한 아름다움보다는 제이크 질렌할이 미련이 남아서 질척거리는, 가질 수 없는 대상으로써의 퇴폐미가 좀 더 부각된다. 어찌 됐든 좋은 느낌을 가진 배우이고 지금까지 본 영화들만 놓고 보면 어떤 역을 맡아도 정말 잘 어울린다.
 
잉그마르 베르히만과 리브 울만의 손자라는 타이틀이 계속 따라다니는 하프단 울만 퇸델의 데뷔작 <아르망>에서도 레나테 라인스베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자체는 사실 뭔가 좀 부족하다. 아무래도 데뷔작이다 보니 제작비를 지원받는데 애를 먹어서 완성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하고자 하던걸 다 못 끝낸 걸까도 싶다. 초반에 아직 배우들이 본격적으로 대사 하기 전까지 무겁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차근차근 잘 쌓아가다가 배우들의 연기가 아까울 만큼 내용이 좀 엉성해지고 춤추는 아방가르드 연극 같은 형식까지 등장하지만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뭔가 후다닥 어지럽게 끝난다. 그래도 감독 특유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방법은 인상에 남았다. 이 영화로 하프댄 울만 퇸델은 칸에서 황금 카메라상을 탔다. 지금까지 황금 카메라상과 황금 종려상울 딱히 구분해서 인식하지 못했는데 황금 카메라는 최우수 장편 데뷔작에게 주는 상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감독으로선 딱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상이다. 어떤 감독이 데뷔작부터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계속 좋은 영화를 만들면 관객은 좋은 것 같다. 왜냐면 감독이 좀 뒤늦게 알려져서 데뷔작이나 초기작이 보고 싶어도 찾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이 너무 훌륭해져서 데뷔작이 회고되거나 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성공작보단 알려지지 않았을 때의 작품들 특유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그 부분에 집착하게 된다.
 
 

 
 
화재경보장치가 망가져서 쉴새없이 경보음이 울려대는 뭔가 음습한 초등학교, 엘리자벳(레나테 라인스뵈)은 멋진 방수코트를  입고 아들 문제로 학교로 불려 온다. 사실 이 붉은 방수코트가 이 영화에서 엘리자벳의 자세를 규정짓는데 큰 역할을 한다. 정말 어떤 비도 비난도 논리도 다 철벽방어하겠다는 기선제압이 느껴진달까. 그런데 선생님은 학교로 호출한 이유를 설명하길 망설이며 별일 아니라며 우선 엘리자벳을 안심시킨다. 학교로 부모를 불러놓고 별일 아니라고 계속 얘기하니 뭔가 좀 이상하다. 젊은 담임이 학부모에게 압도되어서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려는데 적절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뒤이어 다른 학부모 부부가 합류한다. 
 
학교에서 6살 남자아이 아르망과 욘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아이가 바지를 내린채였다. 성행위 장면을 묘사했다. 아이가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며 때렸다. 얼굴에 상처가 났다'등등의 분명한 목격자도 증거도 없지만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 아르망의 전력과 아이에게서 부모가 들은 이야기 (부모가 모종의 확신을 갖고 추궁해서 얻어낸 이야기라는 느낌을 주는)만을 토대로 피해아동과 가해아동의 학부모는 모호함 속에서 대립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담임교사와 나이 지긋한 교직원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르망과 욘 사이에 벌어진 일의 진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전혀 다른 문제들이 계속해서 끼어든다. 아르망의 엄마 엘리자벳과 욘의 엄마인 사라는 시누이 사이이다. 아르망과 욘은 서로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사촌 지간이며 사라의 남자 형제이자 엘리자벳의 남편인 토마스는 이미 죽고 없다.

심지어 지금은 교장이 된 학교 선생님들은 어린 시절 이 학부모들을 지도한 경험이 있는 토박이들이며 이들은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며 성장하여 동창들끼리 결혼하고 아이들도 같은 학교에 보낸 어른들이다. 한마디로 서로의 모든 역사를 안다. 이들이 만약 서로 모르는 학부모 관계였다면 좀 더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집중하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교장은 한때 가르쳤던 제자가 죽고 없다는 것에 이미 슬프고 일을 크게 만들어서 학교가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생각에 쉬쉬한다. 사라는 토마스가 엘리자벳때문에 자살했다고 생각하며 엘리자벳이 조카인 아르망을 제대로 양육할 수 없는 상태의 여자라고 규정하고 아르망의 나쁜 행동을 그런 엄마의 양육과 부모의 갈등(보통 나쁜 엄마로 인한)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라고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사라의 남편 안데르는 남편을 잃은 엘리자벳에게 연민을 느끼는지, 그런 낌새를 채고 엘리자벳이 안데르에 미묘한 태도를 취하는것인지 안데르는 아내인 사라보다는 엘리자벳에 좀 더 동조하는 자세를 취한다. 사라는 남편의 태도를 느끼고 비난한다. 

대립하는 부모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고 교장 교감이 사건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자 젊은 담임교사는 큰 압박을 느끼고 동료 교사한테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사건에 대해 털어놓는다. 사소한 일로 사사껀껀 딴지를 거는 요즘 부모들과의 상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스트레스 상태의 남자 선생님은 아마도 부모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는지 아르망과 욘의 사건에 대해서 털어놓는다. 정황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네 자식한테 일어난 일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식의 뻔한 공방이 오고 간다. 
 

 
 
서로 잘 알던 사람들이 갑자기 불신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구조,  보고 싶은것만 보려는 사람들의 잘못된 신념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소문 사이에서 망가지는 인간관계, 북유럽 영화 특유의 차갑고 축축한 느낌 때문에 결국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헌터 (https://ashland.tistory.com/793)를 떠올리며 보았다. 이 영화에서 루카스는 거의 죄가 없음으로 판명이 나지만 철저하게 파괴되고 친구들과도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놓이는데  <아르망>에서는 그런 단계까지 가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좀 더 집중한다. 갈등이 왜 일어났는지 파헤치기보다는 갈등이 발생할 때 과연 우리가 어떤 정황과 그럴법한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도 계속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장에 서보며 이 갈등 상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편견을 가지게 되는 과정들도 은근슬쩍 보여준다. 가령 극중 배우로 나오는 엘리자벳은 매력적이고 연기에 탁월하다. 기분 나쁘게 소름 끼칠 정도로 몇 분 간 폭소를 이어가는 것으로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표현하는데 그 상황을 만든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휘말린다. 사라는 저 여자가 또 연기를 시작했다며 비웃는다. 사라는 엘리자벳이 특유의 기술로 주변사람들을 늘 홀리고 지배했으며 토마스도 그 습성의 희생자라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또 그런 것도 같다. 엘리자벳은 아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절박한 엄마이지만 타인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교묘하게 다루는 방법을 아는 영리한 여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엘리자벳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영화는 엘리자벳을 좀 더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그녀에 대한 관심은 과하다고 말한다.
 
오래 전 리투아니아에서 영국이나 아일랜드로의 이민붐이 일었을 때 북유럽 나라 중에서는 노르웨이로 가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그리고 그즈음에 '노르웨이에서 아이들은 국가의 재산이다'라는 꽤나 자극적인 제목으로 노르웨이 당국에 아이를 무자비하게 빼앗기는 리투아니아 사람들 기사들이 많이 있었다. 돈 벌러 말도 안 통하는 외국까지 가서는 아이까지 빼앗기는 상황에 동정 여론이 많이 있었다. 노르웨이에는 Barnevernet이라는 아동 복지 위원회가 있는데 이 기관이 규정하는 양육 방식이나 규칙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아이를 빼앗아서 부모의 동의하에 기관이나 다른 가정에서 길러지거나 일부는 아예 양육권을 박탈당하고 아이들과 격리되기도 한다. 부모가 폭력을 일삼고 알코올중독에 도저히 양육을 이어나갈 수 없는 극단적인 경우라면 국가의 개입은 필요하지만 만약에 말 안 들었다고 무거운 책을 들고 있게 하는 장면을 창문을 통해 본 이웃이 아동 학대로 고소해서 아이를 빼앗길 수 있을 만큼 타인의 개입이 일상적으로 허용된다면 과연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야 하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만약 그렇게 적발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큰 영향을 끼친다면 불필요한 피해자가 나올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도 아동 복지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자기 아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차 아들로부터도 제대로 듣지 못한 엘리자벳은 성적 학대를 일삼는 어린아이를 키워낸 엄마로 몰린다. 그리고 그 의혹을 풀어내는 방식에 엘리자벳은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한다. 학교의 대응이 못 미덥고 자꾸만 아무 상관없는 일들을 끌어다 곤경에 빠뜨리려는 주변 사람들이 얄미워서 오히려 미친 듯이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아르망이라는 아이에 대한 편견은 엘리자벳이라는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이전 스토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얽매여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부모의 '전형적이지 못한 과거'는 아이도 전통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날 수 없다는 편견을 불러 일으킨다.  사회 곳곳에서 전달되는 위험하다는 신호는 과연 정말 언제나 정확하며 그것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까. 만약 그 신호 자체가 잘못되고 왜곡된 상태로 전달될 수 있다면 진짜와 가짜를 애초에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지 학교의 망가진 화재 경보 시스템에 그 누구도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장면을 통해 대신 말한다. 사회의 집단 감시 시스템이 필요이상으로 성실하게 작용하는 곳에서 오히려 개인의 안전은 취약해진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객관적으로 들어주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이민자 학교 청소부이다. 어두컴컴한 학교 복도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에게 엘리자벳은 참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집중하면 큰 혼란을 불어일으키고 너무 깊게 파고들어 가도 불필요한 걸 보게 된다. 그러니 타인의 삶에 대해서라면 아주 적정량의 관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함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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