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너 Runner> https://ashland.tistory.com/559051 가 끝나고 제작진 이름이 차례로 나오는데 '편집-바흐람 베이자이'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순전히 감독 아미르 나데리보다 더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면 이 세련되고 독특한 1984년 영화의 완성도는 이분 때문이지 않을까 넘겨 집게 만든 감독, 바흐람 베이자이의 영화 <바슈, 더 리틀 스트레인져>를 연이어 봤다. 바흐람 베이자이 감독은 작년 12월 자신의 87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제목에서부터 '이것은 바슈라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영화. 하지만 영화는 인정사정없는 폭격장면으로 시작된다. 너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지막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한 바슈의 부모는 그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공포에 질린 아이는 폭격을 피해 달리는 누군가의 트럭에 가까스로 올라탄다. 그리고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 운전자는 아마도 모두의 바람처럼 더 이상의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곳으로 사력을 다해 질주한다.
이 영화를 러너에 이어서 봤었기 때문에 혼자인 아미로가 꾸려가는 삶과 졸지에 혼자가 된 바슈의 모습이 자연스레 연결됐다. 어린 이방인 바슈도 아미로가 살던 곳처럼 따스한 곳에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바슈는 어느새 간간히 새소리만이 들려올 뿐인 한적한 들판에 서있다. 여전히 겁에 질린 채 숨어있는 바슈를 한 여인이 발견한다. 나라는 이방인이 보기에는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 피부색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바슈가 아프가니스탄이나 어딘가로 국경을 넘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여전히 이란땅에 있었다.

바슈를 태운 트럭은 이란-이라크 전쟁의 폭격을 피해 이란의 남부에서 북부 어딘가에 도착한다. 나이 (Susan Talsimi)는 카스피해 남쪽 지방, 북부 이란의 방언인 길라키는 쓰는 여성이다. 돈을 벌러 간 남편대신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면서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여인 나이는 작은 이방인을 크게 경계하지 않는다. 말을 걸고 또 걸고 음식을 나눠 주며 아이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린다. 이라크와 맞닿아있는 이란 남부에서 자란 바슈는 아랍어를 쓴다. 이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다. 여전히 죽기 직전의 엄마의 환영을 보는 바슈는 나이를 엄마라고 부르며 조금씩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마을 사람들은 피부색이 검은 바슈를 외계인보듯 대한다. 가족을 건사하러 가장이 타지로 떠난 마당에 모르는 남자애를 자진해서 먹고 입히는 나이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다. 어느 날 바슈가 너무 아파서 나이는 동네 의사집을 찾아가지만 할아버지 의사는 이 약은 하얀 피부에만 든다면서 주지 않는다. 겉모습이 똑같고 오랜 세월 같은 대지위에 살았어도 종교와 분파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은 일어나지만 그 전쟁을 가까스로 피해 도착한 그토록 작은 세계에서 존재하는 차별도 어린아이에게는 전쟁의 연장이다.
어른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동네 아이들도 호기심에 생김새가 다른 바슈에게 장난을 건다. 하지만 바슈는 우연히 동네 아이들의 페르시아어 교과서를 손에 넣게 되고 당당히 한 문장을 읽는다. '우리는 모두 이란의 아이들이다'
나이는 집을 떠난 남편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바슈의 존재를 알린다. 남편은 집에 부담이 될 거라며 나이와 대립한다. 하지만 팔을 잃고 무일푼으로 돌아온 이들의 아버지는 바슈를 결국 받아들인다. 남자는 집으로 돌아왔고 바슈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 이제는 바슈가 팔이 불편한 새아빠를 도와 일손을 보태고 동네 아이들과 학교도 함께 다니고 벌판에서 뛰어놀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면 되는걸까. 나이의 생명력은 결국 그렇게 바슈를 살리고 그 자신도 살린 거라고 생각하며.

바흐람 베이자이는 대대로 시인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은 시인이 될 생각이 없었지만 어쨌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감독이기전에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로 더 유명하다. 이 영화는 생뚱맞고 주술적이고 그 자체로 너무 사실적이어서 기괴하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들이 많았다. 영화가 평범한 장면들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공포에 질린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농사를 망치는 야생 동물이나 새를 내쫓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원시적인 소리를 내지르는데 그게 굉장히 필사적이다. 평소엔 잊고있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겉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어떤 걱정이나 나쁜기억처럼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그런 불안을 과감하게 표현한다.
전쟁 장면은 초반에 아주 잠깐이지만 강렬한데 전쟁과 독대하는 아이의 몸짓이 등장하는게 엘렘 클리모프의 <Come and See> 느낌과 유사하다. 이 불편한 러시아 영화와 이란 영화사이에서 접점을 찾는것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의 <이반의 어린시절>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 아이와 전쟁이라는 테마에서 보면 바슈는 이반과 플료라와도 엮일 수 있을것 같다.
큰 흐름에서 보면 아름답다고 멍 때리기엔 영 불편하지만 간결한 상징으로 처리되는 시적인 장면들도 곳곳에 놔둔다. 영화를 보러 다니느라 학교도 곧잘 빼먹었다는 바흐람 베이자이가 마치 '저는 시네마테크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며 젊은 시절을 보냈죠'라고 얘기할것처럼. 타르코프스키 아버지도 시를 썼다는데 결국 그런 내력이 이들 영화에 담기는건가.
오래전에 타계한 거장 감독들을 보면 서로 회고하고 칭찬하는 부분이 유난히 많다. 지금만큼 영화가 흔하지 않은 시대여서 그런 걸까. 이 정도 감독이라면 내가 칭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친근하게 이어가는 특급 칭찬들이랄까. 정확하게 누가 누구를 어떻게 칭찬했는지는 당연히 기억할 수 없지만 재미삼아 예를 들면 이렇다.
가령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구로사와 아키라는 내 영감의 원천이라고 한다거나 구로사와 아키라는 타르코프스키는 천재라고 한다거나 타르코프스키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 시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한다거나 장 뤽 고다르는 키아로스타미야 말로 살아있는 영화 교본이라고 한다던가 뭐 그런...만약 바흐람 베이자이가 좀 더 유명했더라면, 연극이나 학문이 아닌 영화에 좀 더 주력을 했다면 분명히 누군가 그렇게 칭찬해줬을 같다. 약간의 프로파간다 영화의 느낌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옛날 옛날에 좀 특출한 사람이 만든듯한 인상으로 가득한 영화였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느낌은 아니다. 그건 좀 다른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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