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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Oslo, August 31st (2011)



 
<오슬로, 8월 31일>, 우리나라에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잘 알려진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다.  데뷔작인 <리프라이즈>부터 <오슬로, 8월 31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까지를 이 감독의 '오슬로 3부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배우 레나테 레이스뵈가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통해 크게 알려지고 상도 받고, 특히 한국어 제목의 유쾌하고 당돌한 어감 때문에 30대 여성 줄리가 좌충우돌하는 생동감 있는 영화의 인상이 생겨버렸지만 사실 내게 이 영화는 줄리의 상대역이었던 '악셀(Anders Danielsen Lie) 3부작'의 완결 편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보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도 사실 슬픈 영화이다. 그리고 3부작을 관통하는 <오슬로, 8월 31일>에 가장 마음이 간다.  
 
사실 제목에 날짜가 들어가는 영화의 전형적인 인상이 있다. 무슨 시위가 일어났다거나 중대한 선언이 있었을 것 같고 지구 최후의 날 뭐 이런 영화같고. 날짜는 딱 하루의 시간을 한정하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관장하기도 하고 어떤 날짜에 누군가는 삶을 시작하고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제목에 날짜를 남기면서 감독은 그 시작과 끝 중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것은 여름의 끝이다. 아직 달력을 넘기기 직전, 한여름보단 확실히 힘을 잃은 해질 무렵의 쓸쓸한 태양으로 충만한 8월의 마지막날. 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의 시작과 끝을 확정하는 것을 늘 망설이지만 여름의 시작과 끝은 좀 분명히 해두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봄과 가을의 존재감이 미미한 상태에서 달리 말하면 그게 겨울의 시작과 끝이기도 해서일까. 
 
감독의 데뷔작이자 오슬로 3부작의 1부 <리프라이즈>에는 작가가 되고자하는 꿈으로 가득 찬 오슬로 청년 에릭과 필립이 나온다. 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첫 원고를 우편함에 넣지만 둘 중 필립의 책만 출판이 되고 필립은 나름의 명성을 얻고. 하지만 카메라는 뒤이어 재활원 같은 곳에 머물고 있는 필립을 방문하러 가는 그의 친구들 몇 명을 비춘다. 필립은 그 나름대로의 애정문제와 정신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에릭은 여전히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출판사문을 두드리고 그들의 청춘이 그렇게 지나간다.  
 
<오슬로,8월31일>는 리프라이즈보다 한층 차분하고 멜랑꼴리 하다. 여름 끝무렵의 오슬로를 찬찬히 보여준다. 주인공은 하루 종일 담담한 표정으로 오슬로를 걷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편으론 내가 좋아하는 장르인 '남자 혼자 걸어 다니는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커피 인 베를린>, <영원한 휴가>, <소년, 소녀를 만나다>, <텐텐>, <버펄로 66> 등등등, 장소에 대한 애정을 겉으로 드러날 만큼 외향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이지만 그 도시의 모든 커브와 모퉁이를 아는 그들을 따라 설렁설렁 걷는 느낌이 좋은 영화들이다. 그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주인공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게 그냥 무심한 표정으로도 막 전해진다. 깊은 주머니가 있는 따뜻한 옷을 입어서 포근하고 주머니에 손만 넣고 있어도 완전히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도시말이다. 하지만 그런 오슬로에서 앤더스가 보내는 8월 31일은 불안하고 우울하다. 그도 도시도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이 영화에는 <리프라이즈>에서 필립을 연기한 배우 앤더스 다니엘슨 리가 이어서 출연한다. 약물 중독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앤더스는 8월 31일에 재활 센터에서 외출 허가를 받는다. 앤더스는 오랫동안 못 본 친구들을 방문한다. 어쩌면 그들의 평범한 삶이 자기 생엔 없을 거라는듯한 표정으로.  클럽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틈틈이 예전 여자친구와 연락을 시도한다. 그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조심스럽다. 그는 살아났지만 어떤 것도 예전과 같진 않다. 약물 중독은 이미 그에게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남겼다. 그 그림자가 그를 중독으로 이끌었겠지만. 
 
일 년 동안 약에 손을 대지 않은 앤더스는 취직을 해보려고 출판사에도 간다. 이력서에서 빈 공간을 포착한 출판사 남자는 앤더스의 적을 수 없었던 인생에 대해 묻는다. 그의 인생 전체를 보면 아주 짧은 시기였겠지만 그 삶을 끝까지 아주 성실하게 잘 살아낸 후에야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다고 증명되고 회상될 그런 시기. 하지만 그는 그 의미심장한 순간을 이력서에 남길 수 없었다. 이력서란 대체로 소소한 성공의 궤적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에. 그는 그 한 줄의 빈자리를 좀처럼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죽음 근처로 불러들이며 한편으론 그를 사로잡았던 그 시기로 다시 돌아가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카페에서 앤더스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에 집중한다. 이뤄지지 않아도 큰 문제없는 자잘한 계획들과 큰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의 작은 불만들을 습관적으로 내뱉으며 자기 인생의 또 다른 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일상을 상상하며 따라간다. 그냥 책을 읽고 식물을 심고 저녁을 준비하고 그런 일상적인 것들에 관한 계획들을 늘어놓는 사람들 사이에서 앤더스는 간혹 그런 것들을 갈망하지만 자신은 다시 그런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결론으로 되돌아온다. 갈망이 얼마나 더 깊은 실망을 남기는지 그는 안다. 그는 좀처럼 동의할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 봐도 삶은 무의미한데 왜 남들처럼 그걸 모른 척 그냥 견딜 수 없는 걸까. 앤더스의 삶에서는 그가 일궈낸 실수와 슬픔들을 모른척하고 수정하고 삭제해 버리기엔 한줄한줄의 실패가 너무 엉겨 붙어 있다. 그걸 한가닥씩 풀고 정리하는 것이 그는 너무 피곤하다. 그저 그걸 통째로 폐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진 여자친구와는 계속 연락이 닿지 않고 그는 결국 약물을 구입하여 주머니에 넣은채로 클럽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오슬로의 밤을 배회한다. 그들은 아직 여름으로 가득 채워진 야외 수영장으로 들어서서 옷을 벗은 채 물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부모님조차 떠나버린 생기 없는 정체된 공간으로 돌아온다. 그는 피아노 한곡을 치고 밝은 밤을 통과하여 어느새 아침이 돼버린 방의 커튼을 닫고 어쩌면 죽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주삿바늘을 찌른다. 
 
<사랑할 땐,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악셀은 나름 유명한 작가가 되지만 줄리와 헤어지고 나서 췌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한다. 그의 죽음도 역시 보여주진 않는다. 감독은 어떤 작품에서도 필립,앤더스,악셀에 관한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진 않지만 의식적이든 자연적이든 그 죽음을 앞둔 사람의 감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오슬로 3부작은 결국 이 세 남자의 표정과 함께 마무리된다. 사실 오슬로 8월 31일에서 앤더스의 얼굴은 너무나 우울해서 심히 짐작하기 힘든 그 내면의 불안이 전염되는 듯한 느낌조차 들었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사람들은 활기차고 그런 면들이 그를 좀 더 힘들게 한다. 
 

 
늘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다. 아주 슬펐거나 빨리 그 슬픈 마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누구나 있고 밥도 넘어가지 않고 가슴이 탁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험도 한두번 정도는 해보지만 만약  그런 상태가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몇 년이고 지속된다면 어떤 느낌일지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해가 지지 않는 여름, 사뭇 모든 것을 갖춘듯한 삶, 그 모든 주어진 조건에도 불구하고 피로와 허무로 점철된 삶, 무엇보다도 한때는 아무 문제없었던 나 자신에게서 소외되는 그 느낌은 아마도 절망적일 거라 짐작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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